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2)화 (32/120)

# 31화

의자를 카운터 앞으로 끌어오며 물었다.

“여기에 처음 온 손님이었나요?”

“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책 때문에…….”

말이 점점 흐려져 가더니 잠깐 그를 보던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디서 뵌 것 같은데.”

“당신이 일한 적 있는 은여우단의 단장입니다. 엘르시어.”

“에너지 씨. 여기는 책을 팔지 않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책 때문에 왔다는 건 무슨 뜻이지요?”

꽤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계속 소개해 봤자 계속 잊을 게 분명해서. 이것도 요령이라고 도움이 되었다.

위즈는 눈을 끔벅거리다가 건조한 콧숨을 들이켰다.

“저는 수도를 떠나지 않는데 어떻게 새 책을 계속 구할 수 있겠습니까. 조달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요.”

“……책을 계속 구하고 있었습니까?”

“예. 서점도 그래서 연 건데. 소문 듣고 책 팔러 오라고.”

아니…….

잠깐. 그러니까 어디부터…….

엘르시어는 말을 잃었다. 반박의 시작점을 잡아야 하는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연 서점이었나. 보통 서점은 책을 파는 곳……. 아니, 그러니까 파는 곳은 파는 곳인데…….

[규격 외입니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이 순간 경건하게 엘르시어의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좀처럼 평정을 잃지 않는 귀족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마를 짚는 게 아니라 입가를 덮었다. 눈꺼풀도 내리자 머릿속이 한결 나아졌다. 위즈가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눈을 뜨고 손을 내렸다. 속을 긁고 나온 숨이 퍼드덕 떨며 나왔다. 그런 깊은숨을 쉬고도 모자라서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그는 애써 말했다.

“구하기 어려울 텐데.”

평범한 평민의 몸으로는 더더욱 그렇다. 밀수입을 하거나 뒷거래에 익숙한 자가 아니라면 희귀 서적을 수집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엘르시어는 설마 새 책이 지금도 들어오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모은 서적으로 서점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단신으로 이만큼 모은 것도 중앙탑의 부탑주쯤 되니까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위즈는 제 의자에 앉은 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렵지요. 주인에게서 정당한 값을 주고 사들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버릴 책들 사이에서 찾아 오는 겁니다. 많이 어려울 겁니다.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조는 천연스러웠다. 엘르시어의 기분이 미묘해진 것과는 반대로.

누굴 고용하여 부리는 사람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지만, 누군가의 고용주를 앞에 두고 이렇게 미묘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위즈와 고용주라는 단어는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느낌은 그랬다.

사람을 부리는 것보다는 부려지는 것에 익숙할 것처럼 보여서.

실례인 생각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마주한 기분을 억눌렀다.

“그렇군요. 오늘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책은 팔지 않습니다, 손님.”

“비마법사가 마법을 느낄 수 있게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위즈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용건을 물었다.

위즈가 멈칫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

“방법이 있을까요?”

딴 데로 새지 않도록 다시 묻자, 그녀는 턱을 당기고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 질문은, 정상인이 마법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인가요?”

정상인?

비마법사를 정상인으로 지칭했음을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멈칫한 엘르시어는 대답을 조금 늦게 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마법을. 마법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 지나가는 사람이 마법사인지 알아볼 수 있냐고? 이 주머니가 아티팩트인지 알아볼 수 있냐고?”

그녀는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그런 뜻의 질문이 맞았다. 엘르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위즈가 짧게 웃었다.

“마법사들끼리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데, 후천적으로 그런 게 가능할 리가요.”

“역시 그러…….”

아니, 잠깐.

엘르시어의 음성이 멈췄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위즈가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니요?”

“아. 그러고 보니 그건 알려지지 않았지요. 마법사들이 워낙 자기 약점 감추는 건 잘해서.”

“위즈 씨.”

“못 알아봅니다. 만든 걸 잊어버리면 못 알아봐요. 눈앞에 아티팩트를 두고도 이게 아티팩트인지 모릅니다. 마법사들이 워낙 똑똑하고 기억력 좋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였다. 위즈는 이 대단한 정보를 태연한 얼굴로 알려 주었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

엘르시어는 아연한 눈으로 위즈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대고 위즈는 못을 박았다.

“정상인들만 마법을 못 느끼는 게 아닙니다. 마법사들도 마법을 못 느낍니다.”

“…….”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는 물론, 다른 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도 못 알아봅니다. 왕실 마법사가 아티팩트를 만들 줄은 알면서 아티팩트를 찾아내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

“어쨌든, 왜요. 누가 후천적으로 마법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까?”

위즈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예상했던 반문이었다. 엘르시어는 새로운 정보에 싱숭생숭해하면서도, 그녀의 질문 자체에는 놀라지 않고 부정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혈’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 있나요? 마법과 관련해서. ‘혈이 열린다.’는 표현도 좋습니다.”

“마법과 관련해서 혈……. 들어본 적 없습니다.”

위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금은 기대를 했었을까. 아주 옅은 실망감이 들었다. 바로 직전에 엄청난 정보를 준 사람이라서 좀 더 쉽게 실망감이 든 것 같기도 하였다. 쓴웃음이 나왔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잠깐 위즈의 얼굴을 살피고는 일어섰다. 어딘가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더 물어볼까 하였지만, 이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하고 오지 않아서 무얼 물어봐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차라리 후에 다시 와서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몸을 돌리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카운터를 살짝 짚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이걸 물어도 좋을지 잠시 계산하였다.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로헤올 공작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겠지요. 전 로헤올 공작.”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위즈의 색 옅은 눈동자가 멈추었다. 촛불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의미 모를 침묵을 지났다.

숨 쉬던 위즈의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드러난 이가 보였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생기 있는 기대감이었다. 그녀는 마치 벅찬 것을 떠올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온느발레의 공작 각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연히요. 그, 그, 공작 각하!”

뮌제 로헤올은 이렇게 유명했다. 위즈는 마법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니 그 전 공작을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위즈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엘르시어는 눈가를 찡그리듯 살짝 접고 물었다.

“그 공작이 마법사들의 최대 적수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건 멋져!”

“그럼 그 공작이 마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위즈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어……. 잘 알고 계셨지 않을까요? 저보다는 모르셨겠지만.”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학자보다는 짧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말일 터다. 보통은 그럴 것이다. 엘르시어도 그렇게 동의했다.

그러나 만일, 학자도 모르는 것을 뮌제 로헤올이 알고 있었다면.

“당신이 모르는 마법이나 마법사에 대한 것을 그 공작이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겠습니까?”

위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앉아 있고 그는 서 있는지라 그의 시야에서 그녀의 전신이 보였다. 구부린 다리 위에 놓인 손도. 엘르시어가 직접 감았던 붕대는 온데간데없이 멀쩡한 손. 그 손과 처음부터 멀쩡했던 손을 위즈는 웅크렸다.

그리 가볍게 주먹 쥔 채로 그녀는 우물거리던 입을 열었다.

“그 공작 각하가 돌아가신 지도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엘르시어는 침묵 끝에 대답했다.

“……예.”

“그분의 시간은 거기에 멈춰 있고, 저는 여전히 살아서 연구하고 있잖아요.”

“예…….”

“저는 그분보다 더, 더, 훨씬 더 많이 공부했어요. 제가 더 많이 알아요.”

‘공작보다 내가 더 대단하다.’ 정도로 적당히 치환하기로 했다.

눈빛이 형형했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학자의 자부심과 자존심일 터. 첫 만남에서 보였던 희귀 서적에 대한 자부심보다도 더 중요한 자부심일 것이다. 위즈는 서점 주인이지만 결국에는 학자였다.

……왜인지 기특했다.

기분이 약간 묘해진 엘르시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지막으로, 그날 이후로 거친 손님이 왔었는지 물은 뒤, ‘그날 다친 일’ 자체를 잊어버리고 의문에 잠긴 위즈를 보고는 차갑게 몸을 돌렸다.

* * *

엘르시어가 갔다. 서점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위즈는 카운터 아래에 숨겨 둔 새로이 온 책 《최후의 악마》를 힐끔 일별한 뒤, 카운터를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에 부엌에서 탈출한 탑주는 조금 전까지 엘르시어가 앉아 있던 의자를 옆으로 치웠다.

“오늘이 무슨 만남의 날도 아니고 웬 사람들이 이리 옵니까? 식겁했네.”

초점이 흐려진 연한 눈이 스르르 탑주의 얼굴을 보았다.

콘셉트조차 잃은 얼굴이다. 탑주는 아리오의 왕을 앞에 두고도 탄탄했던 것이 이 순간 이토록 깨끗하게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이유를 전달해 준 사람이 바로 저였다. 엘르시어가 오기 전. 책을 전해 주러 청년이 온 후.

용건을 끝낸 탑주를 갑자기 부엌으로 밀어 넣은 이유를 엘르시어가 온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청년은 그대로 남겨 놓았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적막한 눈을 마주하던 노인은 고개를 내리고 저도 모르게 매무새를 고쳤다.

위즈가 흔들린다.

위즈가 위즈가 아니게 되었다.

위즈 아닌 사람 앞에서 그는 오싹했다.

그가 전해 준 온느발레의 사신단이 온다는 소식 하나로 이렇게 동요할 거라면, 부탑주 지위를 버리려 할 때 온느발레를 잠시라도 연관케 한 까닭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식을 이토록 늦게 받고 동요한다면 위즈는 그 어떠한 사람에게서도 근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정말 연구에만 파묻혀 있는 건가. 목적을 알 수 없이 희귀 서적들을 찾아 헤매면서.

“……탑주님.”

“예? 예. 예.”

간단한 부름에조차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부랴부랴 정중하게 대답했다.

위즈는 나직하게 물었다.

“탑주님과 저, 마지막 만남이 몇 년 전이었던가요?”

“예? 아니……. 몇 달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두드리던 손이 멈추었다. 탑주의 호흡 역시 멈추었다. 초점 돌아온 위즈의 눈이 서럽게 빛난다. 그녀는 눈꼬리를 내리고 울먹이듯 말했다.

“무슨 몇 년 치 세월을 직격타로 맞은 것처럼 이렇게 얼굴이……. 주름이이…….”

“…….”

“지식 받아들이는 것처럼 전부 받아들이지 마시고, 좀, 피할 세월은 좀 피하면서 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리 탑주님 얼굴 어떡하지…….”

그녀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노인의 얼굴을 그리듯 손가락이 허공 속에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저 썩을……. 탑주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공손하게 모으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흔들리기는 개뿔. 그렇게 심각했던 이유가 그거였냐. 이유를 가져온 사람이 저는 맞았다. 완전 이유 그 자체, 이유 덩어리였네. 탑주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픈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그럼 부디 한 번만 멱살을 잡아도 될까요. 혀끝까지 올라온 말이 하마터면 튀어 나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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