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뮌제가 윌리엄을 그토록 사랑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실한 한 줄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언젠가 윌리엄을 죽였을 것이다. 뮌제에게 해를 끼친 이상 윌리엄이 뮌제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라파엘은 뮌제가 윌리엄을 향해 보내는 사랑부터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라파엘이 그러지 않았어도, 뮌제는 윌리엄에 한해서는 라파엘마저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윌리엄에 한해서 뮌제는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런 뮌제가 아프고 괴로웠다. 그녀가 윌리엄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는 저를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알아서 더욱.
그립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짧은 숨을 흘린 라파엘은 시커멓게 적막한 시선을 올렸다. 본궁 사 층. 어느 창문 앞에서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녀를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황제가 에흐베 대공을 연모한다. 그래서 공작을 죽였다.’
소문 중의 하나가 그런 내용이던가.
헛소리 중의 헛소리임을 대공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를 연모하지 않는다. 한시라도 그런 적이 없었다. 황제와 직접 대면한 게 겨우 두 번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겨우 두 번이라 해도 사랑할 사람은 사랑할 테지만, 분명한 건, 황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
황제가 문득 미소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는지 저 존귀한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움직임 탓에 뮌제의 것과 비슷한 긴 금발이 흔들리는 걸 보자마자 라파엘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기와 같이 일상적으로 수그린 인내가 걸음마다 고였다가 흩어졌다.
걸어가는 대공의 모습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 * *
귀국한 이래 제이는 발롬브로사에게 엄중한 경고를 이미 두 차례 들었다.
전 로헤올 공작에 관해서였다.
사교 활동 중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부디 입 닥치라는 말을 고상하게 말하기는 꽤 어렵다. 빽빽한 일정 탓에 시간을 길게 낼 수도 없었을 텐데도 왕은 상당히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욕했다. 발롬브로사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타격이 전혀 없어서 문제지만.
제이는 멍한 얼굴로 뒷목을 쓱쓱 문질렀다.
부왕이 어째서 질색하는지 설명도 잘 들었다.
이 나라 공작도 아니고 원수와 같은 대국 온느발레의 공작을 챙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온느발레에서 사신이 오는 중이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왕자가 제발 입 닥치고 자중하면서 평판 좀 챙기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음.”
그리고 발롬브로사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도 제이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이는 온느발레에서 자신이 얼마나 돌아 있었는지 귀국한 후에야 느끼고 있었다. 중요한 가주마저 쳐내 버린 황제다. 아무리 볼모라도 소국의 왕자 따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타국의 왕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시선, 원망, 비웃음 등을 받을 수야 있겠지. 그래도 그 여자는 여전히 황제였을 것이다.
뮌제가 공작이었을 적에 제이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애썼던 이유 중에도 맥락이 같은 부분이 있었다.
명문 공작가인 로헤올이 책임지고 있는 왕자가 혹시라도 살해당하였다면 뮌제는 큰 비난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비난을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도록 황제가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여자는 뮌제를 죽일 정도로 싫어했으니까.
“…….”
제이는 온느발레에서 뮌제 사망의 진상을 파헤치려 할 때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다. 눈이 뒤집혔던 탓에.
그러나 지금은 각오했다. 아니, 했나?
한 것 같다.
막상 죽을 생각을 하면 두렵긴 하지만, 이 정도면 꽤 단단히 했다고 생각한다.
뮌제는 제이를 맡을 때부터 목숨을 걸고 맡았다. 그녀 생전 사 년을 지키며 항상 생명을 걸고 있었다. 제이의 안전과 평온은 로헤올의 가주인 그녀가 태산처럼 서 있던 덕분에 보장받을 수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마땅히 목숨을 걸어야지.
제이는 사신이 오면 그 사신단에게도 접근할 계획이었다.
그는 부왕이 속 터질 생각을 태연하게 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실은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발롬브로사의 앞에서 약간 졸았던 것 같기도 했다. 요즘 들어 잠이 늘었다. 체력이 떨어진 건가.
다른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나른하게 두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깨도 아프고. 온몸이 뻑적지근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서 낮잠을 잘 수도 없는 게, 곧 살롱으로 나가 봐야 했다. 아리오로 사적인 여행을 온 온느발레 귀족 일가가 있었다. 르와셔 중앙 흐름에는 거의 손대지 못하는 방계 쪽이라 큰 쓸모는 없어 보이지만 한번 만날 필요는 있었다.
타이 대신 맨 크라바트를 누르고 있는 브로치를 검지로 톡톡 괜히 두드리고 툭 한숨을 쉬었다. 한숨과 함께 두 어깨도 축 늘어뜨렸다.
“아이고. 으으.”
역시 뻐근하다.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듯이 양팔을 마구잡이로 흔들면서 걷고 있는데, 앓는 소리를 흘린 직후 기사 한 명과 마주쳤다. 엘르시어였다.
제이는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그러나 내심 혀를 찼다.
와. 눈 밑 그늘 보게.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역시 다 죽어 가는 얼굴이었다. 얼굴이 꽤 창백했다. 엘르시어는 담담한 태도로 예를 갖추었다.
“로드를 뵙습니다.”
“수고하네요.”
빙긋 웃으며 가볍게 치하했다. 삼 주쯤 전 기사 한 명이 순직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엘르시어의 얼굴에 생기가 있었다.
“부왕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까?”
“예.”
“그래요. 그럼. 나 때문에 꽤 노하셨을 텐데 행운을 빕니다.”
그 농담에 엘르시어는 얼핏 미소를 보였다.
제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왕자는 걸어가며 다시 두 팔을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뻐근해.
체면이라곤 조금도 생각지 않은 행태에 왕자의 시종만이 울상이었다.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잠시간 응시하고 있던 엘르시어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분명 상당한 꾸짖음을 받고 나왔을 텐데도 저 태도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소와 같이 가벼웠다.
왕의 호령을 그새 훌훌 털어 버린 거라면 실로 대단하며, 평온한 태도를 가장하고 있는 거라면 그건 더욱 대단한 것이다.
사실 저럴수록 왕은 저 왕자를 놓지 않으리라는 걸 제이는 몰랐다.
제이가 온느발레에서 마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오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이미 제이는 왕세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제이의 형제자매를 모두 처리한 뒤 제이에게 안전한 왕위를 물려주려던 발롬브로사의 계획은 여러모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제이가 일찍 귀국하게 되자 이왕 이렇게 된 것 제이를 왕세자로 바로 올리려던 발롬브로사가 여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 건 그래서였다.
엘르시어는 다시 가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오랜 기간 묵은 피로가 내려앉은 그의 얼굴은 까맣게 창백했다.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구두 밑으로 나뭇가지가 밟혔다. 물러난 그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티팩트를 상대하다 보니 여타 기사들에 비해도 거친 편에 속하는 손가락 살갗에 나뭇가지가 걸렸다.
그는 그것을 길 가장자리로 툭 던졌다.
그래. 제이의 일을 슬슬 조사해 보긴 해야 했다.
이 아리오에 있어 제이는 중요한 왕자였다. 그에게 일어난 비상식적인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태 발롬브로사가 엘르시어에게 어떠한 명령도 하지 않았던 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캐물을 수 있겠나. 다른 것도 아니고 세상 대부분이 질색하는 마법에 관해서인데. 심지어 세간의 상식을 전면 부정하게 되는 일에 관해서인데.
하여 제이가 전해 준 로헤올 전 공작의 말만 그럭저럭 믿고 어영부영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겠느냐마는, 뮌제 로헤올 그 여자가 살아 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죽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위즈를 떠올렸다.
“…….”
그녀는 뛰어난 학자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생각에 잠긴 옅은 갈색 눈동자가 돌 사이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한참 보았다.
지방 남작에게 위즈가 맞았던 날이 벌써 삼 주 전이었다. 그 이후로는 더 바빠져서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저녁에 퇴근하는 날보다 업무를 보던 의자에 기대어 짧게 눈을 붙였다 뜨는 날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해가 지면 저택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 나오는 실정이었다.
거의 잊고 있었다. 그동안 거친 손님들이 또 방문하지는 않았나.
그가 만났던 남작은 엄히 경고하여 돌려보냈으나, 그 이후에 있었을 다른 방문자들을 엘르시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엘르시어는 시선을 올려 하늘을 보았다.
정오 되기 전의 오전이라 빛이 연했다. 이토록 하늘 밝은 시간에 외출하기는 역시 수하들에게 미안했다. 반드시 지금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 기사들을 떠올린 그는 고개를 내렸다.
밤에 갔을 때 위즈가 또 자고 있지만 않으면 좋겠다.
* * *
서점은 잠겨 있지 않았다.
촛불도 흔들리고 있었고, 위즈도 깨어 있었다. 엘르시어는 문을 연 채로 멈추었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위즈와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밤 어둠과 달빛, 그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엘르시어가 습관처럼 짓고 있던 미소가 더 옅어졌다. 위즈에게 해를 끼치러 온 손님인가 하여.
분위기가 그러했던 탓이다.
“…….”
위즈는 평소와 같았으나 청년은 애매했다.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날 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었다.
문간에 서 있는 엘르시어를 보는 청년의 인상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깨가 펴져 자세도 좋았다. 풍파에 해어진 것처럼 보이는 감 낡은 옷을 입고 있지만 단정했다. 엘르시어는 청년의 잠잠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손님이신가요? 책은 팔지 않습니다!”
물끄러미 엘르시어를 응시하던 청년이 고개를 휙 돌려 위즈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위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년을 보았다. 말똥말똥 깜박이는 눈을 보아하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엘르시어는 나직하게 웃었다.
서점인데도 책을 팔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하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힘이 들어갔던 기사의 어깨가 그제야 약간 풀렸다. 엘르시어는 슬며시 웃으며 대꾸했다.
“압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손님인가요?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겠습니까?”
“음? 아니요. 들어오십시오. 아, 그런데 책은 안 파는데.”
“알아요.”
익숙하게 재차 대답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어느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청년이 사과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은 비굴해 보일 만큼 갑자기 쩔쩔매는 기색이었다. 누구에게 하는 사과인지도 불분명했다. 몸이 위즈를 향한 것도 아니고 엘르시어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급한 걸음으로 서점을 나서기까지 사내는 위즈를 보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던 위즈가 심각하게 자문했다.
“사과받을 만한 일을 했었나……?”
“…….”
엘르시어는 저를 지나쳐 나가서 멀어지고 있는 청년을 말없이 보다가, 서점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의 손에서 놓인 문이 펄럭거리며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