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0)화 (30/120)

# 29화

“…….”

윌리엄은 예를 위하여 장갑 낀 손으로 턱 주변을 매만졌다. 그가 뮌제를 죽일 당시, 로헤올의 기사들과 함께 터진 뮌제의 피와 살점이 그의 온 얼굴을 덮었다. 그때의 허무한 황홀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순순히 죽었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녀가 그의 눈앞에서 폭사하는 걸 보아놓고서도 어느 정도는 뮌제가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희망이었고, 경계였다.

그는 그녀가 죽었길 바랐고, 또한, 살아 있길 바랐다.

생각건대, 그 모순은 그에게 몹시도 정당하고 논리적인 모순이었다.

그녀가 두렵다. 하여 무사히 죽었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가 더, 이보다 더, 더 고통받길 바랐다. 하여 무사히 살아 있길 바랐다…….

뮌제의 생명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걸, 그녀를 살해한 후에야 알아 버렸었다.

그런데 그 새벽의 그 느낌이라니.

그……, 마치 뮌제 로헤올이 그에게 닿은 것처럼 그 날카로운 느낌이라니.

윌리엄은 뮌제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벌써 두려워 명치가 비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소원했다.

아, 나의 원수. 부디, 차라리, 살아 있으라……. 네가 철저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시야에서 거의 다 사라진 사신단을 보며 윌리엄은 다정하게 미소했다. 윌리엄 로헤올의 누이인 뮌제가 사랑하던 미소였다. 뮌제가 약해지던 미소이기도 했다.

뮌제는 산길에 나타난 그를 보고, 그가 이렇게 웃는 걸 보고, 싸움을 포기했다.

충분히 살아 나갈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윌리엄을 보고 경악했던 그녀의 기사들도 주군을 따라 순순히 포기하고 죽었다.

분명 다들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이를 어떡하나. 심장이 뛰고 손발이 덜덜 떨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뮌제 로헤올이다. 죽어 있든 살아 있든 윌리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뮌제, 로헤올이다.

윌리엄은 로헤올 공작을 승계한 이래 이 순간 가장 실없이 웃었다.

곧 사신단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공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기대로 빛나던 웃음은 즉시 꺼졌다.

빌어먹을 새끼가 있던 탓이다.

윌리엄은 저를 가만히 보고 있는 라파엘을 향해 애써 미소했다. 저 새끼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게 뮌제 로헤올보다도 기척 느끼기가 어렵다. 이를 갈면서도 그는 라파엘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다가가 살갑게 인사했다.

“격조했습니다, 대공 전하.”

“오랜만입니다, 공작.”

라파엘은 담담하게 화답했다.

그는 로헤올 공작가와도 그 위세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대공국의 주인이다. 로헤올의 역사보다 에흐베의 역사가 훨씬 유서 깊기도 하였다. 더더군다나 어릴 때부터 뮌제와 허물없이 지내 오기도 하여, 남매의 부친, 뮌제, 윌리엄으로 이어지는 로헤올 공작을 마주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나 윌리엄이 라파엘을 거리껴 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르와셔에 오신 듯합니다. 어찌 오셨습니까. 황제께 알리고 오신 겁니까?”

“글쎄.”

라파엘은 적당히 대답하고 눈길을 윌리엄의 어깨 뒤로 주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윌리엄은 뮌제의 눈동자 색보다 진한 회색의 머리카락에 눈을 주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전에는 로헤올 저택에서 자주 대화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 누이가 그렇게 가 버리기 전에.”

“…….”

라파엘의 연한 잿빛 눈동자가 윌리엄에게로 돌아왔다. 뮌제의 것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였다.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입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 순간 윌리엄은 섬뜩한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 저 새끼가 싫다는 것이다.

라파엘은 두 팔을 늘어뜨리고 단정하게 서 있었고, 자세 어디에도 힘이 들어간 구석이 없었으므로 모든 게 평범하였음에도 윌리엄은 그가 당장 발검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라파엘의 속내는 새파랗게 얼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적대도 내비치지 않는데.

저토록 평온한데.

라파엘은 나직하게 답했다.

“물론 기억합니다.”

뮌제 로헤올보다도 강한 자가 저리 평온하게 살고 있기에 윌리엄은 라파엘이 거리꼈다.

조용히 살고 있는 이 자가 뮌제 로헤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옆에서 보아 왔기에 윌리엄은 라파엘이 거리꼈다.

들쑤시다가 아리오로 돌아간 왕자보다 대공국에 틀어박혀 잠잠히 있는 라파엘이 더.

“뮌제를 잊은 적 없지만……. 요즘 들어 더 생각이 납니다. 뮌제도. 우리 보냈던 시간도. 대공 전하와도 다시 그때처럼 교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윌리엄은 씁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달라서 죽도록 짜증스러워했다.

죽여야 했는데. 기회가 있을 때.

예를 들면, 아직 뮌제가 살아 있을 때.

그때 이 새끼를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약점이 윌리엄이었던 뮌제와 다르게 윌리엄은 라파엘의 약점이라곤 뮌제밖에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뮌제를 없애기 전에 라파엘부터 처리했을 것이다.

라파엘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계속 공작의 초대를 본의 아니게 거절하게 되어 미안할 따름입니다.”

“괜찮습니다. 대공께서 바쁜 걸 모르는 게 아니니. 그저, 후에 시간이 나면, 언제든 들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뮌제가 있을 땐 종종 그러셨었지요.”

“그렇다면, 조만간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 같으니 그때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 뜻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 뜻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레 반응을 보인 이는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절대 미숙한 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뮌제에 한해서 감정적이었다.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이 웅크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태 초대에 응하지 않다가 뮌제가 살아 있을 확률이 생긴 지금,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 같아’? 무슨 일이? 초대에 응해? 왜? 갑자기?

윌리엄의 동공이 둥그렇게 커졌다.

그때는 루미나리에단의 기사가 두 높으신 분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었다. 루미나리에단의 현 단장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의 어깨 너머를 잠시 보고 있던 라파엘은 윌리엄을 다시 보았고, 로헤올 공작은 표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하고 미소했다.

힐끔 뒤를 돌아본 윌리엄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정중하게 인사한 윌리엄은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대공을 지나쳤다.

그에 비해 기사는 상당히 급하게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경례는 긴장으로 각 잡힌 채였다.

“각하. 실종 신고가 한 건 추가로 올라왔습니다.”

지난 일주일 새 사람을 살해하는 아티팩트의 출현이 수도 르와셔에 급격하게 증가했다. 지난 수년간 온느발레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던 기사들이 이제는 르와셔 곳곳에 파견되어 있을 정도였다.

기사가 건넨 한 장의 보고서를 읽어 내린 그는 미소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경도 가야겠군. 선임은 새뮤얼 경으로.”

“알겠습니다.”

다시금 경례한 기사는 빠르게 사라졌다. 선임으로 지정한 새뮤얼을 부르러 가는 것일 터다.

윌리엄은 기사가 간 방향으로 걸어가며 보고서를 한 번 접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는 라파엘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 * *

라파엘이 온느발레에 공식적으로 걸음을 한 건, 2년 반 전 뮌제의 장례식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그렇게 남을 것이다.

라파엘은 오늘 비공식적으로 온느발레에 왔다. 윌리엄과 루미나리에단 기사에게 거리낌 없이 얼굴을 보였으나 그가 여기 온 건 실은 비밀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타국에 이만큼 멋대로 드나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대공이 된 이후 로헤올 저택에 수개월에 한 번씩은 드나들었다는 것도 사실 바깥에는 비밀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뮌제가 에흐베 대공국에 종종 여행을 다녀오는 것 따위로 뮌제 로헤올과 라파엘 에흐베의 특별한 우정을 떠들었다. 겨우 그걸로.

라파엘은 윌리엄을 보내고 나서 다시 광장을 보았다. 사신단이 떠난 자리였다. 바람이 불었다.

“…….”

윌리엄과 마주했을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처리하였으나 대공은 분명히 보았다.

조금 전 윌리엄 로헤올은 선명하게 반응했음을.

라파엘의 눈에 가볍지 않은 감정이 스쳤다.

역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생겼나.

그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온느발레의 황제가 아리오에 사신단을 보내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그 사신단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난데없는 사신단이었다. 공식적인 파송 이유는 거짓일 터. 파송하게 된 계기가 필시 따로 있을 것을 짐작했다.

마법으로 몸을 숨길 수 있음에도 윌리엄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도 윌리엄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

라파엘은 광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윌리엄에게서 오늘 같은 동요를 본 적이 없었다. 윌리엄 로헤올은 미소가 버릇인 사람이다.

또한, 그 동요 이전에 보인 즐겁게 웃고 있던 낯은 어떤가. 오래간만에 보았다. 그걸 보는 심기가 일렁거리지 않을 리가 없다.

라파엘은 걸으며, 오늘 윌리엄을 본 순간부터를 가만히 반추하였다.

뮌제와 닮은 색의 눈이 눈꺼풀에 잠시 가렸다가 나타났다.

윌리엄 로헤올. 그리 즐겁다가 순식간에 씁쓸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그 얼굴로 천연하게 뮌제를 입에 담을 수 있는 것 역시, 능력이다. 세상 위에서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구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으니, 그것 또한 능력이다.

찬비를 맞은 것처럼 머리부터 명치까지 사늘하게 식었다.

그는 끓는 것처럼 날숨 지었다. 부정할 수 없다. 뮌제가 윌리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윌리엄을 죽였을 것이다. 뮌제는 살아가는 매 순간이 윌리엄이었다. 어린 눈에도 각별하게 비쳤던 우애는 성인이 되어서는 그 세월만큼 익어서, 끔찍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아닌 척 윌리엄의 눈치를 보는 뮌제를 라파엘은 오래도록 보아 왔다.

윌리엄이 종종 우울해하는 기색에 대경하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도 보아 왔으며, 몸이 건강하지 않아 지양해야 하는 단것을 즐기는 윌리엄에 대해 뮌제가 걱정하는 모습도 보아 왔다. 그리 걱정하면서도 윌리엄에게 맞춰 주겠다고 단것을 함께 먹는 모습도 라파엘은 보아 왔다. 뮌제는 본디 단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을 대하듯, 제 약점을 쥔 사람을 대하듯 뮌제는 조심스러웠고, 그럼에도 윌리엄을 사랑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해. 윌리엄.’

그것은 라파엘의 옆에서 쓰인 고백이었다.

어느 가을날, 모처럼 한적하였던 시간 중에 뮌제는 라파엘의 옆에서 그것을 썼다. 낙서마저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녀가 부러 그가 보도록 낙서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뮌제는, 실로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한다면 라파엘이 그 일을 행한 자를 살려둘 리 없음을 알고 있었을 유일한 사람이므로.

그 뒤에 조금 더 무언가를 적는 듯 보였으나 그녀가 그에게 보도록 한 건 앞부분의 애정뿐이었다.

그때를 회상한 대공은 찬 숨을 떨어뜨리며 입가를 쓸어내렸다.

가슴은 뮌제로 꽉 차 있어 외려 비었다. 넘치도록 뮌제로 가득한데, 그래서 초조하고 허무할 만큼 텅 비었다. 라파엘은 흐린 속삭임을 보냈다.

바로 봤어.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윌리엄을 죽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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