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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28)화 (28/120)

# 27화

이리 못 일어나는 위즈를 당장 일으켜 세워야 할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일도 할 수 있는 대화였다.

차라리 내일 출근 전에 들르는 게 낫겠다. 위즈가 출근할 시간에 엘르시어는 본궁에 있을 테고, 몇 달 전 위즈를 밀착 감시한 다니엘과 미니의 보고대로라면 위즈는 새벽 같은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할 터다.

그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느라 벗었던 장갑을 도로 끼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주 어리석고, 악랄한 마법사들을 상대하며 상당히 심정이 메마르게 된 엘르시어도 가끔은 알량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낼 때가 있었다. 그 예가 지금이다.

장갑을 끼고 차림을 정돈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위즈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으나, 위즈는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서늘하게 자게 두면 병이 들지도 모른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녀를 향한 특별한 염려가 아니었다. 보편적인 상식이다. 조치하고 가는 게 좋으리라.

엘르시어는 고개를 돌려 카운터 쪽을 보았다. 위즈가 이불을 밀어 넣는 곳은 카운터 아래의 공간이다. 그는 카운터에서 덮는 이불을 가지고 왔다. 잘 펴서 위즈의 위에 덮어 주었고, 어깨까지 약간 끌어올려 주었다.

이불 무게, 작은 바람, 필시 한결 따스해졌을 변화.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

엘르시어는 새근거리는 숨을 잠시 들었다.

못 말리는 사람.

그는 자신이 위즈에 대한 경계심을 거의 무너뜨린 건지, 잠시 일부 숨겨둔 건지, 혹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더 높이 쌓아 둔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마냥 신뢰하는 것은 분명 아닌데.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었다.

약간 뜨거워진 숨이 물안개처럼 퍼졌다. 연이은 일들로 체력이 떨어지긴 했다. 이러다 내일 된통 감기에 든 몸으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엘르시어는 위즈를 방문함으로써 완전히 끝난 일정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겉옷 안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사탕 두 개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서고에서 밤을 지새우던 기사들이 쌓아 둔 게 있기에 몇 개 챙겨 온 것이다.

위즈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쪽을 살핀 엘르시어는 서점을 나와서 문을 잘 닫았다.

서점에서 조금 멀어졌을 때 타이를 슬슬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피곤해서인지 몸도 답답해져서. 그러나 그는 다시 매듭을 단정하게 조이고 손을 내렸다. 바깥에서 차림이 헝클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엘르시어는 잡동사니의 길을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어떤 사내 둘을 맞닥뜨렸다.

앞장 서 있던 사내는 그를 그저 지나치려다가, 뒤늦게 멈추어 서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남자도 허리를 굽혔다. 제복을 알아보거나 사람 얼굴을 알아보기에 충분한 달빛이었다.

인사가 실로 자연스러웠다. 평민 아닌 자에게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이 시간에 이곳에 왔나.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아 주긴 했는데 의아했다.

엘르시어는 잠시 멈추어 서서 두 남자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금방 어둠 속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가늠하던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길을 완전히 벗어났다. 잡동사니의 길에서 그의 저택까지는 걸어갈 만한 거리다. 퇴근 후 위즈에게 잠시 들르는 게 아주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요한 큰길을 따라 울리던 단정한 걸음은 겨우 삼 분만에 느려지기 시작했고, 끝내는 완전히 멈추었다.

“…….”

잠깐 묵묵히 있던 엘르시어는 몸을 돌렸다.

아무 일 없을 확률이 높지만.

그러나, 굳이 이 시간에 잡동사니의 길에 올 이유가 여타 예술 작품들보다는 희귀 서적에 있을 확률이 역시 높았다. 그는 한숨을 삼키고 빠르게 걸어갔다.

간단하게 확인하러 가는 김에 이번엔 위즈를 깨워서 문단속까지 하게 해야겠다. 어떻게 된 게 그 서점에 대해서는 주인보다 주변인이 더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빨랐던 엘르시어의 걸음은 종국에는 급해졌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조급했다. 서점이 위치한 골목에 들어섰을 때, 그는 여전히 생기 어렸으나 억눌려 있는 신음을 들은 것 같았다. 문 닫힌 서점 앞에 섰을 때는 확실하게 들었다.

“전 중앙탑 소속의 박사입니다. 이러시면 탑주님이 화내실, 컥.”

“천한 것이 감히 내 앞에서 무엇을 주장하나.”

“흐억.”

“죽여라.”

카운터에서 끌려 나와 있는 위즈가 남자의 발에 차였다. 명치 부근.

문을 연 엘르시어는 그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숨이 훅 들이찼다. 잘 차려입은 두 남자가 엘르시어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위즈만을 보았다.

바닥에 고인 위즈는 숨도 못 쉬고 파들파들 떨었다. 갈고리처럼 구부러든 손이 바닥을 움켜쥐었다. 먼지, 나무 가시였다. 그 손안의 절박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으로 책을 껴안은 채로 평화롭게 자고 있던 게 불과 오 분 전이었다. 위즈 스미스. 연한 회색 눈동자, 갈색 머리칼, 활기에 찬 웃음,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 평소의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엘르시어는 웃지 못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나라에서 사람을 분별없이 죽일 수 있는 분은 국왕 전하 이외에 없다.”

적어도 다른 사람 보는 곳에서는 그러하며, 그 목격자가 엘르시어 클리포드라면 더더욱 그렇다.

“중앙탑 소속 학자라는 걸 들었음에도 죽이려 한다는 건 중앙탑과 외교 문제를 일으키고 싶다는 뜻인가.”

“…….”

나직하게 경고하자 어두운 긴장이 서점을 휘감았다.

남자와 남자의 명령을 행하려던 사내가 낭패 어린 표정으로 물러났다.

얼숍에서는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중앙에 머무르며 왕에게 얼굴을 보일 수 있을 만큼 권세 있는 귀족이 아닐 터다. 엘르시어는 그 두 사람을 날카롭게 눈에 담고는 위즈에게 다가갔다.

고통으로 끅끅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는 그녀에게 조금 전 잠든 사람에게서 느껴졌던 천진난만함이라곤 없었다. 숨길이 막힌 것처럼 호흡이 끊긴다. 명치를 잘못 맞은 모양이었다.

“숨이 계속 안 쉬어지면 의사에게 보여야 합니다. 괜찮습니까?”

“흐으. 괘, 괜찮으…….”

“통증은.”

“뼈가 부러져서 내장을 찌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범인은 저 사람들…….”

“뭣!”

“일단 앉아 보는 게 좋겠군요.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천진했다. 죽을 뻔한 것을 기억은 하고 있나.

엘르시어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위즈를 부축했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괜찮은 것 같긴 했다. 그는 그녀가 구부정한 자세로 앓으며 좁은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자에도 잘 앉았다.

카운터 위에 이마를 기대는 것까지 확인했다. 엘르시어는 조금 전까지 위즈가 쓰러져 있던 바닥 옆에 부서져 있는 액자와 약간 찢어진 탑주의 인증서를 일별하고, 두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차갑게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지.”

* * *

사람들이 나가자 상체를 세운 위즈는 명치에 손을 올렸다.

맞은 직후에 비하면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신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팠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많이 겪은 것도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생소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그녀는 명치 위 손을 주먹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불붙은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손을 풀었다.

위즈는 다시 카운터에 머리를 박고 끙끙 신음을 흘렸다. 진짜 아프다.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왼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 문이 열렸다.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왔다.

“괜찮아요?”

친절한 말씨에 위즈는 말없이 코를 훌쩍였다.

작은 머리를 내려다보던 엘르시어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쩐지 얼굴이며, 손이며, 표정이며 잘 보인다 했더니 그가 떠날 때와는 다르게 촛불이 켜져 있었다.

손님이라고 들어왔을 테고, 잠에서 깨어난 위즈는 손님맞이를 한다고 초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곳은 책을 팔지 않는다고 했을 테고, 분위기는 좋지 않아져서 위즈가 탑주의 인증서까지 꺼낼 상황까지 도달했을 터다.

과정이 눈에 그린 듯 선했다.

그건 엘르시어가 위즈를 자주 겪었기 때문이고, 비슷한 일을 겪은 적도 있기 때문이다.

첫 만남 당시 제가 무어라 했는지가 떠오르자 쓴웃음이 나왔다. 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인증서를 집어 들었다. 유리 조각을 신중하게 털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는 위즈의 머리 옆에 내려놓았다.

산발이 된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장갑 손등에 조금 닿았다.

엘르시어는 잠잠히 손을 거두고,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몸을 세워 보겠습니까?”

“…….”

“위즈 씨.”

“…….”

“상처 난 곳만 볼게요.”

액자 유리와 바닥에 피가 떨어져 있었다. 손을 다쳤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해한 이들의 처리가 급하여 일단 위즈 앞에서는 입에 담지 않았었다. 나가서 그들과 대화할 때는 출혈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짚었으나.

위즈는 꼬물꼬물 상체를 세웠다. 우는 것처럼 코를 훌쩍이더니 역시 눈가가 발그스름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오늘 유독 위즈가 울 일이 많이 일어난 것 같다.

엘르시어는 저를 향해 내민 손을 살폈다. 유리가 박혀 있지는 않았다. 깊이 벤 것 같지도 않으니, 꿰맬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는 위즈를 다독이듯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약이나 붕대 같은 게 있나요?”

“부엌에…….”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

위즈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즈가 드나드는 걸 자주 봤지만, 직접 들어가 본 일은 없는 부엌에 들어선 엘르시어는 생각보다 넓은 부엌에 조금 놀랐다. 그는 한쪽 벽에 세워진 서랍장을 먼저 살폈다. 다행히도 단번에 찾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소독약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값이 제법 나갔을 텐데.

장갑을 겉옷 주머니에 넣고 수도에서 손을 씻었다. 붕대와 연고, 소독약, 물수건을 들고 나오자, 위즈가 그를 보았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어째서인지 우스웠다.

엘르시어는 카운터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위즈는 자연스럽게 카운터 위로 손을 내밀었다.

그에 그는 정말 웃을 뻔했다. 혹시 화상이라도 입었을까 하여 잠시 손을 살피던 것도 피하던 게 얼마 전인데 오늘은 참 얌전히도 손을 맡긴다.

먼저 다친 손에 번져 있는 피를 닦았다. 환부에서 여전히 새 피가 솟고 있지만 다친 직후에 비하면 많이 멎은 상태였다.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엘르시어는 나직하게 물었다.

“그런 사람이 자주 오나요?”

“그런 사람?”

“당신을……. 당신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이해했다고 위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자주 오셨었나, 그런 손님이……? 어, 그런데 여기는 책을 안 파는데? 헛. 손님이란 게 오신 적이 있나?”

“…….”

잠깐. 그런 근본적인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복잡해진다. 이쪽이. 다시 설명하고 주제로 돌아올 생각을 하면 벌써 끔찍해질 지경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피로가 올라오려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던 그는 다시 그녀의 손으로 눈을 내렸다.

차라리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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