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주방에 쟁여 둔 식재료들을 보이는 대로 넣었을 게 눈에 선했다. 그에 따라 여기저기 많이 비었을 찬장도 눈에 선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목이 메었다.
“차라리……, 차라리 완전히 새까맣게 태우지 그랬어. 이것보다는 맛있었을 텐데.”
“아, 그 정도입니까? 엄청 맛없나 보네요.”
“안 먹어 본 거냐?”
“그, 왜, 있잖습니까. 느낌 같은 거. 아, 여기로 가면 나는 죽겠구나. 아, 여기서 이 말을 하면 나는 죽겠구나. 아, 이걸 먹으면 나는 죽겠구나. 직감 같은 거.”
직감 따라서 자기는 안 먹고 그에게 퍼부어 주었다는 말이다.
피트는 옅은 한숨을 쉬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의미로 대접하고 싶다면서 그의 주방과 그의 식재료들을 뒤집어 놓고, 사과의 의미로 대접하고 싶다면서 자기도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내온 이 자식을 당장 처단하고 싶었으나, 처단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절대 함부로 물을 것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그는 말없이 뒤통수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간 손끝으로 더듬다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분위기가 달라진 걸 아는지 위즈도 무어라 말하지 않고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피트는 다시금 숨을 천천히 내쉬고 입을 열었다. 최대한 건조하게. 최대한 담담하게.
“나 살면서 처음으로 기절해 봤다.”
“……! 제가 당신의 처음을 가져간 건가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그렇게 감동한 얼굴로 하지 마, 이 자식아!”
그리고 ‘최대한 건조하게’는 단 2초 만에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하하하, 아듀, 마이 프렌드.
위즈에게 휘말리는 일은 이토록 몹시도 쉬웠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그때부터 바람 앞 갈대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손에 꼽히는 현자가 와도 위즈에게는 쥐어 잡힐 것 같다. 천재들만 모여 있는 중앙탑의 탑주가 와도 위즈에게는 안 될 것 같아.
실제로는 ‘안 될 것 같아.’가 아니라 ‘정말 안 된다.’지만 피트는 그 참담한 현실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앓는 소리를 흘리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예.”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묘하게 신체적 공격력이 엄청나.”
정신적 공격력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세계최강이지만, 지금 말할 건 그쪽이 아니었다. 신체적 공격력. 오로지 그것.
위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실수로 정수리 때려서 사람 쓰러트리고, 실수로 사타구니 때려서 반쯤 죽여 놓고. 이번에는 뒷목 때려서 기절이잖아. 단 한 대로 기절시키는 일이 흔할 것 같진 않다. 혹시 일부러 기절시킨 거냐?”
지나가는 물음이 아닌 것을 지나치듯 묻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 보기에 위즈는 알 수 없는 바보다. ‘지나치게’ 알 수 없는 바보다. 바보인 정도가 지나치니 오히려 평범한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음모론처럼 비추어지게 되는 이런 의문도 그래서 들게 된 것이었다.
위즈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일부러라니요. 아니요. 그냥 잠에서 깨어나게 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몸을 던진 것뿐인데 그게 그런 식으로 회심의 일격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회심의 일격?”
“헛.”
말실수했다는 것처럼 위즈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속으로부터 우러나온 깊은 한숨을 쉬며, 피트는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뒷목이 영. 뻐근함이 어느 정도 가시자 그가 양 입꼬리를 올리고 상냥하게 웃었다.
“너, 아주 그냥, 사과하겠다는 마음이 조금도 없구나.”
“아니, 그걸 어떻게!”
결심했다. 오늘 이 자식을 끝내겠다.
숨겨진 공격력과 광기를 일깨우는 데에 위즈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 분야에서만큼은 그녀는 천재일지도 몰랐다.
식탁 엎어치기를 할까. 저 바보의 목구멍에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스타를 들이부을까. 어떤 필살기를 쓸지 잠시 고민하는 그를 보던 위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저,”
그건 정말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이 담뿍 담긴 음성이었다. 약간 놀라고 만 피트는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위즈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게요. 제 입으로 말하기엔 민망해서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
“저는 천재입니다.”
?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그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천재 어쩌고 하는 말을 하고는 있는데, 그래도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저 말이 왜 나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이자, 위즈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천재는 그런 나쁜 짓 안 합니다.”
“…….”
그 순간 피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별건 아니었고, 혈압 오르는 소리라든지 피가 거꾸로 솟는 소리, 정상적인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저도 모르게 했던 기대가 박살 나는 소리 같은 거다. 굉장히 별것 아니었다.
“그리고 저는 실내에 박혀 있다 보니 몸이 많이 약해요. 식사가 워낙 불규칙해서 더욱 그렇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영양을 생각해서 삼시 세끼를 다 챙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부탁해요.”
“…….”
기승전식사. 기승전강탈. 기승전철면피. 기승전어그로. 기승전프로도둑놈.
그래서 피트는 자신도 기승전상냥한옆옆집이웃이 되기로 하였다. 그렇지. 영양을 생각해서. 삼시 세끼. 그렇다면 당장 지금부터 챙겨 드려야지.
그는 손을 들어 위즈의 손목을 잡았다.
“음?”
“조금 타긴 했지만, 보니까 몸에 좋은 건 많이도 들어간 것 같다. 앉아서 다 먹고 가라.”
“음?!”
위즈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에 우중충한 기운이 폭풍처럼 내려왔다. 옅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주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하였다.
피트는 웃으며 일어났다. 대체로 위즈에게 당하고 있는 젊은 화가는 이 악문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다 먹고 가라.”
“…….”
‘다’와 ‘먹고’ 사이에 ‘처’가 생략되었다. 그걸 피트도 알았고 위즈도 알았다.
위즈는 의자에 앉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테이블을 잡고 버텼다. 쓸모없는 시도였다. 청년은 새파란 눈을 빛내며 위즈의 입에 남은 파스타를 욱여넣었다. 용서는 없다.
위즈는 배를 부여잡고 울먹이며 돌아갔다. 그에 반해, 피트는 근래 들어 가장 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행복한 저녁식사였다. 피트에게만.
* * *
그날 밤.
엘르시어는 서점 앞에 멈추어 섰다.
사방은 이미 컴컴하다.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 한 줄기쯤은 능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어둠이었다. 그는 잠잠히 옅은 숨을 쉬고 문을 밀었다. 열려 있었다. 그에 주춤하였던 힘이 손끝에 완전히 모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서점은 어둡고, 조용했다.
초 하나 켜져 있지 않다. 그가 이 서점에 들렀을 때 위즈가 없던 적은 첫 만남을 제외하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때도 서점의 문은 잘 잠겨 있었다.
열린 문에 손을 댄 채로 내부를 살피던 엘르시어는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으…….”
인기척은 그제야 들렸다.
그 심상치 않은 소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이후에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서점이 몹시 어두웠던 탓에 엘르시어는 문을 열어 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책장 몇 개를 지난 곳. 위즈는 어느 책장 앞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달빛도 닿지 않는 곳에 누워있는 사람이라니 현실감이 없다. 그 사람이 위즈라서, 이곳이 위즈의 서점이라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많은 시신을 보아 왔으나, 위즈와 죽음은 어울리지 않아서.
일순 머릿속이 엉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늘어져 있던 제 손을, 공기를 잡아채듯 주먹 쥐었다. 장갑 바깥의 손끝이 손바닥에 닿자 정신이 명료해졌다. 차게 잠긴 얼굴로 그는 걸음을 옮겼다.
위즈는 그가 옆에 앉아도 움직이지 않았다.
엘르시어는 잠잠히 그녀의 호흡을 확인하고, 장갑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 맨손으로 호흡과 맥박을 제대로 확인하고 만졌다.
그는 그제야 이 어쩐지 꿈처럼 현실감 없는 현실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쉰 그가 입을 열었다.
“위즈 씨?”
“나중에에…….”
“…….”
위즈는 앓으며 중얼거리더니 몸을 웅크렸다.
그 와중에도 품에 안고 있던 책은 고쳐 안았다. 모로 누워 있으니 어깨가 아플 법도 한데. 그는 다시금 옅은 한숨을 흘리고 주변을 살폈다. 책 두 권……, 아니다, 세 권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책장에 기대어 앉아서 책을 읽다가 옆으로 쓰러져 잠든 모양이었다.
상황이 파악되니 더 살필 것도 없다. 엘르시어는 미동도 없이 자는 그녀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위즈에게 가 보겠다며, 그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른다며 증거품을 가지고 뛰쳐나갔던 다니엘은 위즈와 함께 돌아왔다. 미니를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아티팩트에 대해 알아보던 기사들 거의 모두가 미니에 대해서는 실은 포기하고 있었다. 아티팩트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 어찌 돌아올 수 있겠나 하여.
그리고 그 포기에 위즈는 쐐기를 박아 주었다.
다니엘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지나간 일에 붙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찌해야 할 것을 냉정하게 말해 주었다.
그 순간 위즈는, 위즈였던가.
“…….”
엘르시어의 눈동자가 약간 움직였다.
[흰 꽃이 내게 닿았잖아요. 흰 꽃이면 흰 꽃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새벽, 위즈가 보인 언행은 모든 게 특별했다.
그리고 자고 일어난 아침부터 어제와 확연하게 다른 태도로 근무한 것이다. 반나절 위즈를 지켜본 애쉬포드가 골치 아파하는 기색으로 보고했던 바.
그래서 피로한 와중에도 엘르시어는 이 밤 이곳에 왔다. 이번으로 단절될 관계도 아니질 않은가. 위즈와 은여우단의 관계는 그 정도에는 이르렀다.
그는 조금 더 위즈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위즈 씨.”
“끄어어엉.”
“…….”
그래도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지 괴로워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곧 일어날 것 같았다. 엘르시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섣부른 생각이었다.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웅크리기까지 하였는데, 위즈는 이마를 바닥에 박은 상태로 또 움직이지 않았다.
“…….”
그는 실은 이리 못 일어나는 사람을 처음 보는 중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광경을 볼 일이 없었다.
지금은 형제가 없는 데다 신분도 신분이었던 탓이다. 엘르시어의 앞에서 이럴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보일 것 같은 사람으로는 제이가 있기야 하였으나, 제이의 아침잠을 엘르시어가 깨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엘르시어는 조금은 신기해하며, 조금은 기막혀하며 위즈를 내려다보았다.
알아서 깰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언제 일어날 줄 알고.
곤란해 하다가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위즈 씨.”
“으흐허허헝.”
이제 울기 시작했다.
엘르시어는 무심코 짧게 웃고 말았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라는 걱정보다는 기가 막힌 우스움이 더 컸다. 허리를 굽혔다. 동그랗게 솟은 등을 몇 번 서툴게 두드리니, 위즈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이만 손을 거두고 몸을 세웠다.
미니 일도 있고, 오래도록 철야와 야근, 숙직을 반복하여 지친 기사들을 오늘 하루만 일찍 퇴근시켰다. 눈물을 머금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장인 그와 간부들까지 일찍 퇴근할 수는 없어서, 부단장과 함께 최대한 일을 정리하고 나서 이제야 귀가하는 길이었다.
피로에 잠겨 있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라서 피로가 곧 일상이었으나 그런 평소를 감안하더라도 지금은 조금 피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