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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26)화 (26/120)

# 25화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렐이 가는 곳은 그의 수하들이 쫓고 있을 것이다. 앞섶을 정돈한 라파엘의 시선이 주변을 가만히 훑었다.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피로가 들었다.

저런 평온한 일상 속에 뮌제는 있을까.

너는 웃으며 있을까.

“…….”

라파엘은 오른손을 구부려 장갑 속의 반지를 느꼈다. 웃음 아닌 웃음을 흘리고 눈길을 거두었다.

캠벨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야 했다. 쉴 시간도, 쉴 여유도, 쉴 마음도 없었다. 뮌제가 사라진 이후로 한순간도 없었다. 그의 휴식은 항상 뮌제였고, 그의 마음도 항상 뮌제였으므로.

우정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던 저희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 * *

엘르시어의 배려로 은여우단의 탑 내부 회의실에서 쉴 수 있었던 위즈는 평소의 출근 시간에 일어났다.

시계가 따로 없었다. 단 일 분도 초과근무를 하고 싶지 않다는 단호함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그런데 아무래도 초과근무를 거절한 게 아니라 그냥 일 전부를 거절하고 싶은 듯했다. 일어난 후부터 책임감은 물 말아 먹기 시작한 것을 보면.

기록물을 읽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

너무 빨라졌다.

진짜 너무.

속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아무래도 일 초에 대여섯 장을 후루룩 넘기는 건 너무하잖은가. 최소한 읽는 척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일 초에 한 장만 넘겼어도 저건 속독을 하는 거라고 납득해 줄 마음이 있었다.

파라라라락 하는 소리가 오래도록 들려온 뒤 위즈는 외쳤다.

“권고에 따라 벌써 아흔두 번을 봤지만,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습니다!”

“…….”

그렇겠지. 아흔두 번을 봤겠지. 파라라라락 아흔두 번을 넘겼겠지.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 보라고 권유해도 그녀는 절대 꼼꼼히 읽지 않았다. 무조건 파라라라락이었다.

위즈를 지켜보는 것은 여러모로 단단한 정신이 필요한 중노동이었다. 사망한 미니 대신 들어와 있던 애쉬포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읽는 척이라도 해라, 좀…….

그러나 위즈는 민망함을 조금도 모르는 얼굴로 담백하게 인사를 날렸다.

“퇴근 시간이에요. 그럼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

술 한 잔 해야 할 것 같은 표정이 된 애쉬포드는 결국 미간을 짚었다. 인생은 쓰다. 그런데 그 인생에 위즈가 들어오니 더 써. 퇴근하고 동료와 잔을 부딪치며 논해야 할 것 같은 인생이 되었다. 순식간에. 겨우 반나절 만에.

엘르시어가 필요했다.

온느발레에서 사신단을 보낼 거라는 예고가 온 이후로 해 뜬 동안에는 기사단 건물 내에서 얼굴 보기 힘들게 된 단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미니의 순직에 대해서도 아침 이후 부단장에게 일임하고 다른 기사단 단장들과 회의 중일 테지만, 그가 무언가 조치해 준다면 지금보다는 어디라도 좀 더 나아지지 않으려나.

그러나 지금 엘르시어는 없고, 여기의 책임자는 애쉬포드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위즈를 왕궁 정문까지 데려다 주었다. 위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 모습을 빤히 배웅하고 있던 애쉬포드에게 옅은 그리움이 들었다.

퇴근이라는 존재를 만나본 지 좀 오래된 것 같아서.

그리운 퇴근. 보고 싶다, 내 사랑 퇴근.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직 살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달려오고 있는 다니엘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애쉬포드는 의아함 반 반가움 반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 있어?”

“위즈 씨는?”

“위즈 씨? 방금 갔는데. 어이구, 어이구. 어이구. 안 되지. 어딜 가시려고.”

저를 지나쳐 가려는 다니엘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아직 일할 시간이다. 무단 외출은 아니 될 일이지. 은여우단은 요즘처럼 일이 많을 때 동료애가 빛을 발한다. 나만 죽을 수 없으니 너도 같이 죽자는 동료애였다.

아직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다니엘이 힘없이 말했다.

“좀……. 사과만 하고 올게.”

“내일 해. 아니면 단장님께 허락받고 외출하든지. 규정이다.”

“…….”

“자고로 무단 외출은 빠르고 눈에 띄지 않게. 그 불문율을 깨면 어떡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잖아. 그러게 누가 내 눈에 보이라 하던?”

“이러고 싶다는 기색이 흘러넘치거든.”

“물론, 다른 때 같으면 못 본 척 보내 줄 수도 있었겠지.”

“야, 인마…….”

다니엘을 무시한 애쉬포드는 그를 꽉 잡고 끌고 갔다.

새벽부터 위즈에게 쳐들어가서 피를 보이고 데려오질 않나, 위험한 아티팩트를 위즈에게 보여야 한다고 엘르시어에게 대들지를 않나. 엘르시어에게든 위즈에게든 다니엘이 사과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새벽부터 다니엘은 정신이 없었다. 미니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이후 펑펑 울다가, 또 울다가, 그럼에도 퇴근은 하지 않고 미니가 죽은 밀실 근처를 맴돌다가, 울다가, 멍하게 앉아있었다.

정말이지, 사과하겠다고 달려온 게 기특하게 여겨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동료 기사들은 이해했지만 위즈는 이해해 줄 이유가 없었다.

가서 새벽의 무례를 사과하면 그녀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너그러움으로 다니엘을 용서해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니엘은 아직 완전히 평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애쉬포드는 다니엘을 보내 줄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 가서 또 무슨 무례를 저지를지 알고 보내겠나.

“아, 좀……. 잠깐만…….”

“그래, 그래.”

총총 걸어가던 위즈는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애쉬포드에게 끌려가는 다니엘이 보였다. 다니엘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연회색 눈이 살그머니 비었다. 위즈는 주춤했다. 다리가 흔들렸다. 무너지지 않게 다리에 힘을 준 그녀는 다문 입술에도 힘을 주었다.

도로 앞을 보는 얼굴은 울적하게 젖었다.

위즈는 힘없이 잡동사니의 길로 돌아왔다. 서점에 도착하기까지 몇 명을 마주쳤지만, 그녀를 염려하여 섣불리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무룩한 얼굴을 한 위즈는 공격력이 평소의 배를 넘나든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게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이럴 때는 몸 사릴 줄 알았다.

덕분에 애꿎은 사람들에게 괜히 시비 걸지 않은 위즈는 얌전하게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그고 가지 않았음에도 단단히 잠겨 있는 서점의 문을 열었다.

볕 진득한 오후. 연한 그림자가 길게 서점 안으로 들이쳤다.

서점의 주인은 새벽에 자리를 비울 때까지만 해도 피트가 누워 있던 자리를 잠시 보다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깊게 들어간 들숨으로 흉곽이 부풀었다. 어깨가 올라갔다. 몸을 돌고 나온 불탄 숨과 함께 고개가 조금 내려갔다.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눈, 아무 생각 없는 머리, 아무 생각 없는 표정. 호흡만이 적당히 무거웠다.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기왕에 망친 하루였다. 억지로 머릿속을 채우기보다는 조금 더 쉬겠다는 심산이었다.

결코 실수는 아니었으나 어찌 되었든 기절시킨 일도 그렇고, 피트에게 이래저래 찔리는 구석이 많았다. 일찍 옆옆 집에 찾아가기로 하였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그 방문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집주인인 피트는 제 몸을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위즈였다.

사과의 뜻으로 대접하고 싶으니 부엌 좀 쓰겠다는 말에 비몽사몽 대답하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대답했는데, 위즈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부엌에서 열심히 달각거리고 있는 사람을 중간에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피트는 멍하게 있다가 일단 씻고 왔다. 씻으면서도 어리둥절했다. 내가 언제 집에 왔더라? 오기는 어떻게 왔고? 어라. 그러고 보니 저 자식이 스테이크를 울부짖으면서 날 습격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기막힌 가운데 식탁에 앉은 그의 앞에 큰 대접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파스타였다.

위즈가 조금은 기특했던 피트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주섬주섬 식기를 들고 소스에 듬뿍 적신 면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혓바닥 위에서 폭탄 같은 게 터지는 느낌을 느꼈다.

이거 너무 훅 들어오는 맛인데.

“…….”

빠져나갔던 넋이 복귀했다. 피트는 차분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진지하게 파스타를 내려다보던 그는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의 표정이 마치 목숨을 위협받은 것처럼 심각해졌다. 자, 생각해 보자.

“…….”

각종 무얼 얼마만큼 퍼부으면 이렇게 쓸 수 있나.

덕분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각종 욕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오. 지나가다 길에서 아무 풀뿌리나 주워서 씹어먹어도 이 정도로 쓰진 않을 것이다.

맛있는 것을 요리해서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결심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맛은 있는 요리를 만들어 냈다. 맛이 존재하는 요리. 나무줄기 맛이 존재하는 요리. 세상 쓴맛이란 쓴맛은 모조리 농축해서 창조해낸 것 같은 요리. 인생의 쓴맛일까. 위즈와 만난 인생의 쓴맛일까.

심지어 아까부터 눈앞이 뿌옇다. 눈물이 아니라 연기 때문이다. 약간 타면서 난 연기가 온 집안을 휩쓰는 중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눈물도 날 것 같아. 식재료 아까워 죽겠다……. 제길…….

그는 떨리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부엌에 들어가 있더니 너, 요리 젬병이었냐.”

“아니,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분명 칭찬도 받았었는데요.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다고.”

“……누가 그랬는데.”

“어……. 친구가.”

그 친구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데에서 뭔지 모를 망설임을 느꼈다.

고개를 든 피트는 새 날갯짓하듯 으허허허 떨리는 숨을 쉬고는 물었다.

“그다음에 그 친구가 토하지는 않았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 어요.”

방금 도중에 이상한 침묵이 주춤 들어갔다.

그에 따라 저도 모르게 주춤 숨이 막혔다. 그녀를 애절하게 쳐다보던 피트는 천천히 물었다.

“뭔데.”

“아니……. 진짜 토한 건 아니었는데요. 다 먹고 체한 일은 있었습니다.”

한 몸 바쳐 그런 안타까운 뒷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친구, 사람이 좋다 못해 안쓰러울 정도로 호구인데. 혹시 그 이후에 너도 모르는 새 사이가 멀어졌다든지? 절교했다든지?”

“지금은 절교 같은 걸 한 상태이긴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걔가 그다음에 되게 다정하게 말했었어요. 다음부터는 차라리 자기가 요리하겠다고.”

“……누가 들어도 그게 핵심이잖아!”

“음.”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위즈는 다른 말 없이 소리만 흘렸다. 눈에서도 초점이 사라진 듯 보였다. 연한 회색 눈동자가 가만히 허공을 향하고, 손으로 턱을 매만지기를 십여 초.

그녀는 약간 내려갔던 눈꺼풀을 올리고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합니다. 주방에서 만들면 도통 먹을 만한 게 안 나와요. 야외에서 만들면 꽤 맛있는데.”

“…….”

퍼부을 각종 조미료와 재료가 한정될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피트는 그릇에서 건져 낸 큼지막한 계피 조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얘는 파스타에 왜 들어간 것인가.

그러나 계피는 그나마 양호한 재료였음을 깨달았다. 뒤이어 건진 것이 갈지 않아 단단한 콩 같은 통후추 알갱이면 당연히 알게 된다. 뭐지. 방심하고 먹다가 이 부러지라고 성심성의껏 넣은 건가. 요리가 다 끝난 후에 넣은 건지 조금도 말랑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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