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25)화 (25/120)

# 24화

뮌제 로헤올 공작이 영지에 내려가는 길에 강도에게 살해당한 후, 나이 어릴 때부터 역대 로헤올 공작 세 사람을 내리 모셔 온 기사 하나가 기사 서임을 무른 일이 있었다.

가문의 주인이 바뀌고 기사가 떠나는 일은 많지 않다.

게다가 그 기사는 당시 노년에 가까워지는 중년의 나이였다. 근 40년을 종자로서, 기사로서 로헤올에 충성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새로 로헤올 공작에 오른 윌리엄을 모시지 않고 기사는 로헤올을 떠났다.

충분히 소문 될 만한 일이었다.

로헤올에 인생을 바친 충성스러운 기사가 인정치 않는 새 공작.

호사가들은 겉으로 떠들고 비웃었으며 양식 있는 이들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런 스캔들이 있다 하더라도 로헤올과 로헤올의 주인은 결코 드러내 놓고 비웃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라파엘은 뮌제를 찾는 동시에 그 남자도 찾았다.

그 기사는 뮌제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현재 살아 있음을 알리기에는 충분할 만큼 신뢰하였던 기사라는 뜻이다.

윌리엄이 성에 차지 않아 떠난 게 사실일지도 모르나, 그게 아니라면.

혹시 뮌제에게 어떤 명령을 받고 물러난 것이라면.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 기사는 어찌나 빠르게 세계를 떠도는지, 그를 비밀리에 찾고 있는 라파엘의 수하들은 매번 한발 늦곤 하였다. 그렇게 허탕만 치다 2년하고도 반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잡을 수 있었다.

라파엘의 수하는 잡은 기사에게 뮌제에 대해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그 보고를 받고 라파엘은 짧게 고심했다.

직접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그 기사는 전 로헤올 공작의 최측근으로 능히 활동했던 사람이다. 필요에 의하지 않고서는, 에흐베 대공의 ‘일개’ 수하에게 무얼 쉬이 털어놓을 사람이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라파엘은 선뜻 움직였다.

제 주변에 온느발레 황제의 첩자가 있음은 알고 있었다. 황제는 아직 대공을 살피고 있었고, 그는 일부러 그대로 내버려 두는 중이었다. 황제의 눈을 가릴 수단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으므로.

첩자의 존재를 앎에도 그가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그에게 여러 아티팩트가 있는 덕분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인 라파엘이 소유한 아티팩트는 많았다. 사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아티팩트가 다방면으로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가 아티팩트 사용을 지양했던 한때가 있었다.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만은 그 사실을 숨겨 왔던 때가 있었다.

뮌제가 마법과 마법사, 아티팩트, 호문클루스라 하면 안색이 변할 만큼 질색했기 때문에.

그가 아는 뮌제라면, 자신을 찾기 위해 라파엘이 아티팩트를 사용한다는 걸 알게 되면 몹시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뮌제가 지금 그의 옆에 없었다. 라파엘은 뮌제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방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어떤 모양의 걸음이 되더라도 좋다. 아주 더러운 걸음이라도 좋다. 뮌제와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 마침내 찾아내기를 원했다.

대공은 마법으로 첩자를 피해 공국의 수도를 빠져나왔다.

겨우 삼 분도 되지 않아 라파엘은 그의 수하와 옛 기사가 만난 지역에 도착하였다. 아리오의 동쪽 국경, 온느발레 서쪽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알레론은 그에게 경례하고 보고하였다.

“명령하신 대로, 한 차례 접촉한 이후에는 멀리서 살피기만 하였습니다. 하여 이 지역을 떠나는 것을 제재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디로 갔나.”

그 기사의 행방을 알자마자 수하 셋을 추가로 보냈다. 인력 낭비라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는 정처 없이 유리하던 사람이고, 잡아 두지 않으면 또 떠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라파엘은 차분하게 물었다. 젊은 수하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였다.

“중앙탑의 땅입니다.”

“거기에서 그를 살피고 있는 자는.”

“있습니다.”

라파엘은 이게 좋은 조짐인지 나쁜 조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중앙탑은 본디 온느발레의 땅에 설립되었다가 그 땅과 함께 독립해 나온 시설이다. 말이 탑이지 여느 왕궁만큼 웅장한 건물이며, 건물을 둘러싼 꽤 넓은 땅이 중앙탑 소유의 세계 중립 지역이었다.

중앙탑이 독립할 때만 하더라도, 혹 중앙탑에서 온느발레에 반기를 들고 나올 시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당시 온느발레의 황제에게 수 대에 걸쳐 지극한 충성심을 보인 로헤올 공작에게 황제가 그 바로 옆의 영지를 추가로 하사한 바 있었다.

수 세대를 지나 이제 와서는 그게 로헤올의 유일한 영지이자 현재의 본령이었다. 오랜 시간 로헤올의 본령이었던 땅은 뮌제가 로헤올 공작이 되자마자 황실에 반납했으므로.

라파엘은 잠시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로헤올 공작에 대해 묻자마자 향한 곳이, 로헤올령을 이웃으로 둔 중앙탑의 땅.

그 기사는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그곳에, 그녀가 있을까.

“…….”

대공은 손을 들어 제 눈가를 잠시 매만졌다. 그는 가느다란 떨림을 삼켰다.

이 자리에서 보고받은 희망이 그를 어지럽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걸 가라앉힐 방법이라고는 그 기사를 만나는 것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만, 그는 그 모든 실망과 절망을 지난 시간 잘 견뎌 왔다. 이 기대 그대로, 이 희망 그대로 기사를 만나러 갈 것이다.

속내와 다르게 덤덤한 얼굴에는 마땅한 이성이 스쳐 지나갔다.

라파엘은 알레론과 함께 중앙탑이 있는 땅으로 향했다.

얼굴 창백해진 주군을 만나게 된 캠벨의 눈에 염려가 덮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냉철하게 보고할 수 있었다.

“중앙탑 권역에 들어온 이후 그가 특별히 접촉한 사람은 없습니다. 들른 곳은 노천 찻집, 대장간, 서점, 과일 파는 상점, 머무르는 객점입니다.”

“…….”

특별하게 만난 사람이 없다고 해도, 남에게 보이지 않게 누군가와 신호나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를 수하들도 아니었다. 어련히 알아서 살폈겠거니 하면서도 라파엘은 마지막으로 확인하였다.

“접선으로 보이는 일은.”

“찻집 직원, 대장장이, 서점 직원, 과일 상점 주인, 객점 주인과 직원들. 그 어떠한 대화라도 기밀 접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

예상했던 답이다. 라파엘은 명치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짧게 흘렸다.

그는 차림을 정돈한 후에 지금 그 기사가 앉아있는 찻집으로 향했다. 길가에 벌여 놓은 테이블 중 하나. 날이 좋다. 그 때문인지 바깥에 나와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표정이 나른하고 밝았다.

그러나 적어도,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 듯 보이는 그 기사는 가라앉아 있었다.

라파엘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단정한 움직임에 느린 바람이 불었다. 다가오던 기척이 지나치지 않은 데다가 가까운 곳에서 바람이 끼쳐 오자, 기사는 비로소 눈을 떴다.

기사는 그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잠시간 침묵하던 베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그 얼굴에는 당황의 편린조차 없었다.

라파엘의 사람이라 알린 이가 뮌제 로헤올에 대해 물어 왔었으니, 이미 기사의 머리는 라파엘을 어느 정도 박아 두고 있었을 터. 하여 제 앞에 나타난 에흐베 대공을 뜬금없게 여기지 않았다.

올해 예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제될 대로 정제된 그 눈을 들여다보며, 라파엘은 나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인사에 이리도 예를 갖추자 베렐은 그제야 조금 동요한 듯 보였다. 공국의 주인이 일개 기사에게, 그것도 로헤올을 버린 전 기사에게 갖추기에는 지나친 예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뮌제가 로헤올 공작일 때 라파엘은 항상 이러했었다.

눈썹을 멈칫 찌푸렸다가 편 기사는 느릿느릿 회답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파엘은 그 인사를 받기 전부터 받은 후까지 물끄러미 베렐을 살폈다. 때로는 시선만으로도 압박이 된다. 그러나 베렐은 태연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서 그 시선을 버텨 냈다.

에흐베의 군주는 기사가 흔들리지 않음을 보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 사람들에게 경이 답한 것은 보고받았습니다.”

“…….”

“난 경에게 그것들도 재차 물을 겸, 다른 것도 물을 겸 하여 왔습니다.”

음성은 부드럽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어조 역시 그러했으며, 라파엘의 표정 역시 그러했다.

라파엘의 내심이 현재 상당히 싸늘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꽤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그는 경청하겠다는 느낌으로 침묵하는 베렐이 몹시 거슬렸다.

저 태도가 만일 뮌제를 위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거라면 뮌제를 위하여는 좋은 기사다.

그러나 만일 실로 그렇다면, 그의 입장에서는 지독하게 쓸모없어 죽여 버리고 싶은 자가 되기도 하였다.

잔잔한 숨을 고른 라파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은 경 평생 로헤올을 섬겨 온 기사입니다. 그 사실을 존중하며 묻겠습니다. 뮌제 그 사람이 사망한 후 로헤올을 떠남은 어찌 된 일입니까?”

“…….”

베렐은 말이 없었다.

대답을 고르는 기색도 아니었다. 기사의 노련한 눈길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들 주위는 밝고 따사로운데, 그들 두 남자는 서로에게 날 세운 것 같은 침묵 중에 있었다. 어느 쪽도 잠시도 호흡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내리는 햇빛 줄기가 조금 더 느슨해졌다.

여전히 밝은 낮. 그림자가 폭삭 내려앉는 느낌이다. 베렐은 그 변화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짧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들었다.

기사는 뮌제 로헤올의 것과 지나치게 비슷한 연회색 눈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전하.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의 답으로 돌아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의 핵심을 관통한 무언가이기도 하였다. 라파엘의 입이 약간 열리고, 그 사이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베렐은 그걸 일종의 대답으로 여겼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조금 더 빠르게 나이 들게 된 얼굴에 쓴웃음이 깃들었다.

기사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도 그렇다면 좋겠습니다. 살아 계시면 좋겠습니다.”

“…….”

“전하.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하는데 기사는 참으로 슬프도록 담담하였다. 그분은 돌아가셨고, 살아 돌아올 일 없으실 것이다.

대공이 그 말을 듣고도 말없이 있자 베렐은 그제야 마침내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감히 말씀 올립니다. 돌아가신 분을 붙잡고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그 자리에서의 마지막 말이었다.

베렐은 앉은 채로 앞섶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하였다. 뮌제 로헤올과 라파엘 에흐베의 각별한 우정에 대해서 기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디 이만 놓으시라…….

그 진심을 담아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기사가 떠나고도 라파엘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있었다. 베렐이 보지 못하도록 수하들에게 신호한 손은 자연스럽게 다시 늘어졌다. 그는 반쯤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반쯤은 살의를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전 기사의 그 말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뮌제 로헤올은 죽었다.’ ‘로헤올 전 공작은 죽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뮌제의 충성스럽던 기사가 하는 말마저.

라파엘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웃었다.

아니다. 뮌제는 죽지 않았다.

미쳐 가는 것처럼 보여도 좋다. 실제로 미쳐 가는 것이라도 좋아. 그녀는 죽지 않았다.

너는 죽지 않았어, 뮈즈.

네가 죽었을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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