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23)화 (23/120)

# 22화

필요한 논문을 읽으며 기사는 동료에게 권유했다.

“그만 놀고 가 보는 게 어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기 보고 있을 테니까 경이 가라.”

미니는 마침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며칠 만에 눈 아래가 거뭇해진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꼴로 다니엘은 빙긋 웃었다.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얼숍에 남아 있는 은여우단의 모든 기사가 몹시 피폐해진 상태였다. 차라리 출장을 갔다면 오히려 조금 쉴 수 있지 않았을까.

퇴근하고 싶다. 야근만 며칠 째냐. 심지어 철야하고 아침에 비틀비틀 땅에 쓰러져 자다가 일어나면 또 조사였다.

마법사들만 관련되면 뭐 잘 되는 게 없었다. 지난번에 바닷가에서 팔십 대 노인 마법사랑 나 잡아보라며 꺄르르 뛰어다닌 일 이래 최고로 혈압 오르는 일이 닥쳤다.

하여 오늘, 조금 전, 누군가는 결국 미쳐서 ‘으하핫! 이 죽일 놈들 죽이러 갑시다!’ 하고 선봉장을 자처했고, 직후 부단장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뻗었다.

다니엘은 진지하게 말했다.

“맞고 뻗은 사람이 나야.”

“…….”

“뻗은 채로 조용히 기어서 탈출했지.”

자랑이다.

미니는 식은 한숨을 쉬고 다시 책으로 고개를 내렸다.

알아서 포박당해 끌려갈 것이다.

은여우단은 동료의 배신과 도주를 웃으며 봐줄 때가 있는가 하면, 쌍욕을 퍼부으며 처단을 위해 눈에 불을 켤 때가 있다.

지금은 후자에 해당했다. 일이 넘쳐 날 때.

미니가 읽던 부분을 이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문장을 채 읽기도 전, 어디선가 떨리는 호흡이 들려왔다.

미니와 다니엘이 눈을 들었다.

위즈가 손으로 입을 막고 떨고 있었다. 아직 서류에 시선이 꽂혀 있는데도. 미니는 놀라서 자리에서 주춤 일어났다. 다니엘도 벽에서 등을 뗐다.

“위즈 씨. 무슨 일이십니까.”

“끕. 흡. 자고 일어나자마자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을 줄은…….”

“예?”

아니, 잠깐. ‘들어’?

아니, 잠깐. 진짜 잠깐. ‘자고 일어나자마자’?

이상함을 깨닫고 멈칫하는데, 위즈가 그들을 보았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해볼게요. 지금 늠름하게 일어날 테니, 절 뻗게 해 주세요.”

“…….”

요는, 탈출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여태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잤어? 잔 거야? 눈 뜨고 잤어? 분명 도중에 종이도 넘기고 했는데? 다니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여태 잔 겁니까?!”

“예, 피곤하네요……. 역시 누워서 자야 했는데.”

“아니, 저기, 종이도 넘기고 했잖습니까.”

“에이, 별것 아닌걸요.”

충분히 별것이다.

칭찬을 들은 것처럼 머쓱한 표정으로 위즈는 수줍게 설명했다.

“그런 건 중앙탑의 학자들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졸려 죽겠는데 남이 보고 있어서 체면상 연구하는 척은 해야 할 때. 반 정도만 잠드는 거지요.”

“…….”

“탑주님이야말로 이 분야에서는 최고이십니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역시 이런 쪽에서 연륜과 경력은 쫓아가지 못하나 봅니다.”

“…….”

위즈를 만난 이후 중앙탑 박사들에 대한 환상이 산산조각 박살이 나고 있었다.

급격하게 피곤해진 다니엘은 두 손을 들어 두 눈을 비볐다. 비비고, 누르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숨은 흐느낌처럼 나왔다. 손을 떨어뜨린 다니엘은 이만 여기서 나가기로 했다. 사무실로 돌아가자. 차라리 지옥으로 돌아가자.

“나 간다…….”

“아니. 경이 여기 있어. 내가 경 대신 서고에 갈게.”

그리고 그 생각은 미니도 동일했기 때문에, 미니는 다니엘의 팔을 잡았다. 다니엘이 미니를 돌아보았다. 두 기사의 시선이 얽혔다.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 광경을 보며 위즈는 또다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라서.

“멋져……! 생존을 향한 갈망으로 서로를 없애려 하는 동료!”

“…….”

그 갈망을 일으킨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졸지에 서로를 없애려 한 사람들이 된 두 기사는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조금 전 저 말로 둘의 마음이 통했다.

같이 탈출하자.

“위즈 씨. 식사 때가 되었으니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미니는 정중하게 위즈에게 말했고, 위즈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니엘과 함께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위즈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현재 오후 세 시. 세 시간 전에 먹은 게 점심이었을 텐데 무슨 식사. 하지만 이렇게 빨리 유도당해 주면 저야 고맙다. 그녀는 ‘자면서 넘긴’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한 장 앞으로 돌아갔다.

시신 주위에 흰 꽃들이 흩어져 있던 사건.

그리고 그 전에는 흰 꽃 그림에 의해 죽은 시신.

흰 꽃.

흰 꽃.

위즈는 물끄러미 그 단어를 눈에 담다가 고개를 들었다. 세상의 그 수많은 꽃 중 그녀가 싫어하는 꽃이라 하면 흰색 꽃잎을 가진 모든 꽃이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흘렸다. 하. 제발.

* * *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난 위즈는 한가하게 코를 훌쩍였다. 미니가 데리러 오기까지 앞으로 세 시간 정도 남은 캄캄한 새벽.

읽고 있던 책에 표시를 해 두고 덮었다. 옆에 놓아 두었던 다른 책을 가져와 펴서 파라라락 중간 정도를 폈다. 마찬가지로 한가한 손길이었다. 찰락, 종이가 종이에 달라붙는 소리마저 한가로웠다.

서늘한 어둠이 그림자처럼 서린 서점 안. 붉게 흔들리는 촛불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두 발이 꾸물꾸물 움직이다가, 발치에 내려놓았던 바구니를 툭 건드렸다. 과자 봉지가 바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위즈는 다시 한번 코를 훌쩍였다.

서점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조용한 새벽이 흔들렸다.

“야!”

문 열리는 순간부터 피트는 거칠었다. 번쩍 고개를 든 위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카운터를 턱 하고 손바닥으로 둔탁하게 내리쳤다. 흠칫 놀란 위즈가 상체를 뒤로 뺐다.

“네, 네?”

“너 왜 식사하러 안 와.”

“예?”

“벌써 사흘을 내리 안 왔어. 알아?”

하루 정도 안 오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런데 사흘은 아니지.

따지듯 물으면서도 피트는 이미 스스로 비참했다. 빼앗겨 먹는 것도 버릇이 되어 버렸다. 매끼 혈압 오르는 일에 맞닥뜨리는 것도 버릇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제기랄.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어. 도둑놈한테 왜 훔치러 안 오냐고 모시러 온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위즈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이가 드러나고, 그녀는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그는 벌써 불안해졌다. 그리고 즉각 후회했다.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살아갈 것을.

그녀가 좋은 것을 깨달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늘부터는 꼬박꼬박 매끼, 절대 놓치지 않고 가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로 부탁합니다.”

벌써 대놓고 식단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잘못했다. 오지 마. 못 들은 것으로 해. 오지 마.”

주는 대로 먹을 때도 구제 불능이었는데, 음식 투정까지 하기 시작하면 앞이 깜깜하다. 열 받아서 그가 요절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짜 잘못 생각했다. 위즈가 안 오는 게 행복한 일이었다.

“샐러드는 아주 싱싱한 양상추와 치즈와 토마토로,”

“오지 마. 진짜 오지 마. 난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자고 있는 거야. 몽유병이 있어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니까 오지 마. 오면 너 이상한 취급 당한다.”

“해 주시고…….”

츱.

침이 그녀의 입꼬리로 조금 흘러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벌써 식욕 가득했다. 그는 물감 묻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위즈 생각으로 작업을 계속 방해받아서, 그래서 악몽을 꾸다가 새벽부터 이불을 박차고 온 건데, 내가 미쳤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좌절하고 있는 그에게 위즈는 상냥하게 물었다.

“몽유병이면 지금 깨워 드릴까요?”

“……뭘. 어떻게. 뭘 어떻게 하려고.”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알면서도 묻고, 사서 멘탈에 상처 내는 악순환이다.

아니나 다를까 위즈가 진지하게 반문했다.

“뒤통수 한 대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

“아니면 명치? 아니면 뒷목?”

깨우기는커녕 그냥 그대로 평생 잠들게 하겠다는 생각이 가득한데, 이 자식……?

피트는 말없이 뒤돌았다. 이곳에 온 건 그의 잘못이고, 그냥 처음부터 다 잘못되었다. 일단 가서 자기 전에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자. 영감이 아직 가시지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그가 너무 거칠게 젖혔는지 여전히 열려 있던 문의 손잡이를 잡고 나가는데, 왜인지 뒤에서 위즈가 날아왔다.

“내 스테이크!”

“꺽!”

몽유병이라면 지금 깨워서 전부 기억한 채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각오였을까. ‘스테이크가 먹고 싶으니 부디 기억해 주세요!’ 같은.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몸을 던져 보겠다는 느낌으로 얼굴은 애절했다. 그런데 절대 피트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뒤 상황을 어찌 해석해도 절대 피트를 위해서가 아니야.

소리친 단어가 ‘내 스테이크’면 더더욱 피트와는 상관이 없었다!

날아온 것치고 무겁게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위즈는 주먹을 날렸다. 어떻게든 깨우리라는 집념이 담긴 것도 같았다. 절묘하게 뒷목을 맞았고, 피트는 안타깝게도 기절하였다. 앞으로 쓰러지는 건장한 청년을 받아 낸 다니엘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 뭐야? 뭐지?

오자마자 뭔가 앞으로 쓰러지기에 받아 내긴 하였는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상태였다.

좋아. 먼저 이게 현실인지부터 파악하는 게 좋겠다. 기사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정해지니 현실부터가 그를 도왔다.

다니엘을 보고 어쩐지 안도한 것처럼 보이는 위즈가 중얼거린 것이다.

“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것 같은데…….”

“…….”

현실이다.

저런 위즈가 꿈에서도 나오면 안 되지. 고로 현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는 저 정도로만 인식해 주어도 고마웠다. 다니엘은 일단 이 묵직한 청년부터 잘 내려놓기로 하였다.

이 날벼락도 기가 막히지만, 지금 그는 절박하도록 급한 용건으로 온 참이었다. 영문 모를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물을 여유도 없다. 바닥에 청년을 내려놓으며 빠르게 말했다.

“새벽부터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무작정 왔는데, 깨어 계셨군요.”

“그건 상관없지만 책은 팔지 않습니다.”

“압니다. 위즈 씨, 혹시 아티팩트를 보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급합니다. 꽃입니다. 이만한.”

만개한 모란 꽃송이 정도 크기다. 양손을 움직여 대충 크기를 표현해 보였다. 아티팩트 반출이 가능하였다면 가져왔을 것이다. 희게 질린 청년의 입술이 떨렸다.

“아니면, 무엇인지 지금 알 수 있겠습니까? 두 시간 전 우리 기사 한 명을 삼켰습니다. 토해 내게 할 방법이 조금도 없겠습니까? 미니 경, 못 살리겠습니까?”

위즈의 겁에 질린 눈길은 그가 꽃 크기를 설명할 때부터 다니엘의 손에 박혀 있었다. 그 손에는 팔 한 짝만 잘리고 나머지 신체는 전부 삼켜진 미니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티팩트의 시동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다. 건강한 상태에서도 그러한데 피로에 찌들어 있는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증거물로 보관 중이었던 화병과 화병에 꽂힌 꽃다발 중 한 송이는 갑자기 몸을 키웠고, 다른 증거품을 보고 있던 미니를 그대로 먹었다.

다섯 번째 사건의 증거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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