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22)화 (22/120)

# 21화

그에 할 말은 많았지만 일단 엘르시어는 불붙은 긴 종이를 흔들어서 불을 끄고자 하였다. 검은 부스러기가 툭툭 떨어졌다. 타다 남은 종잇조각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위즈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그 손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흠칫 손을 빼려 하였다. 제가 무슨 행동을 하였는지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엘르시어는 그 손을 빼지 못하도록 가볍게 쥐었다. 위즈가 잠잠해졌다.

그는 이제 눈길을 내려 그녀의 손을 살폈다. 손등, 손톱은 이상이 없다. 손을 뒤집었다. 그 순간 위즈는 손을 주먹 쥐었다. 그리고 그를 털어내듯 거칠게 손을 뺐다. 그 거친 거부와는 별개로 그녀는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엘르시어는 순순히 손을 내리며 물었다.

“화상 입은 곳은 없는 건가요?”

“없습니다.”

“불장난은 안 됩니다. 무엇보다, 여긴 불붙기 쉬운 종이들이 많은 곳입니다. 화재가 한번 시작되면 크게 번질 확률이 높아요.”

천천히 하나하나 말했다. 음성은 차분하였지만 내심은 퍽 절실한 상태였다.

온통 희귀한 서적들로 채워진 이 서점을 자물쇠 하나 채워 놓고 다닌다는 것이 꽤 불안하던 참이었는데, 이제 ‘밤중에 서점에 불이 났습니다.’하는 보고가 들어올까 하는 걱정까지 해야 하나.

이미 뭐 하나는 태운 것 같지만. 엘르시어의 눈이 힐끗 바닥을 보고는 올라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듣고 있던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에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처음 뵙는 분께 실례했습니다.”

“…….”

엘르시어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미소했다. 설명하기 귀찮았다. 그 와중에도 위즈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책은 팔지 않아요.”

“예, 압니다. 아까 두 번째 사망 사건의 용의 아티팩트로 추려 주었던 반지, 기억합니까?”

“오……. 오……. 여, 여우 새끼! 거기 기사 나리시군요!”

“…….”

차라리 대놓고 욕한다는 얼굴, 드러내 놓고 놀린다는 어조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한순간도 기분 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라도 기억을 해 주고 있다는 게 기적 같아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엘르시어는 얼마 전까지의 저를 문득 돌아보고는 자문했다. 정말이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그는 결코 이렇게나 너그러운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대체로 부드러운 미소로 사람을 대하고는 있으나, 속내까지 함께 상냥하였던 건, 정말이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는 알쏭달쏭하게 미묘해진 기분으로 옅은 한숨을 쉬었다.

“예. 은여우단의 단장입니다.”

“그래요, 그래요. 조각. 그런데 무슨 조각이더라……?”

잃는 기억에 맥락이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당신은 아티팩트를 제작한 마법사의 본명은 말해 주지 않았었고, 이명은 금괴대머리라고만 하였습니다. 반지의 보석에서 금을 녹인 물이 흘러나오는 아티팩트라고 하였고.”

“아. 알겠습니다. 그거였구나. 금괴대머리.”

기억을 금방 되살린 그녀는 책장 사이로 떠났다.

엘르시어는 그녀의 뒤를 느린 걸음으로 따랐다. 위즈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가장 안쪽, 왼편 벽에 붙어 있는 책장 앞에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밑단이 해진 치맛자락이 신발 앞코 위로 조금 올라왔다. 그의 눈이 우연히 그 모습을 담았다.

엘르시어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저리 될 정도로 여기저기 부지런하게 돌아다녔으리라.

그러나 ‘저토록 열심히 일하였구나.’가 아니라 ‘저토록 열심히 사람들의 정신을 부수고 다녔구나.’다.

감상은 철저하고 냉정했다.

책등을 잡고 소리 없이 끙끙거리던 위즈가 중얼거렸다.

“이거. 안 빠지네요. 잠시만.”

뭘 하려고.

두 손을 들고 손목을 돌리는 걸 보니 불안해졌다. 간단하게 준비운동을 마친 그녀는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워진 책과 윗 선반 사이의 작은 공간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거기에 과연 손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문일 정도로 너비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그녀는 성공적으로 손목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큰일 났어요. 손이 안 빠집니다.”

“…….”

앞으로는 위즈와 관련된 일에서는 불안한 예감을 흘려보내지 말자.

그는 허리를 굽혔다.

위즈가 빼내려 하였던 것 옆의 책을 가볍게 앞으로 기울여 보았다. 조금도 기울여지지 않았다. 꽤 뻑뻑했다.

그는 일단 손을 뗐다. 그 사이에 위즈는 옆에 있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 그런데 누구시더라……?”

“이럴 때마저 이름과 얼굴로 문제 만들지 말지요.”

담담하게 대답한 그는 그녀의 옆에 완전히 왼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직전에 건드렸던 책을 이번에야말로 신중하게 잡고 천천히 앞으로 기울였다. 책등이라도 찢어지면 낭패다. 이게 귀한 고서만 아니었다면 좀 더 과감하게 뺄 수 있었으리라.

시간을 들이자 책은 확실히 빠졌다. 옆에 공간이 생겼다.

이제 꽉 낀 위즈의 손과 그 아래 책을 분리해 낼 차례였다. 그는 한숨을 삼키고 그 책을 덜거덕덜거덕 움직여 보았다. 옆에 공간이 생겼으니 비스듬하게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참 야무지게도 끼었다.

어쩔 수 없다.

“실례하겠습니다.”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오른손으로는 그 아래의 책을 잡고, 비틀었다. 멀거니 있던 위즈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니,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빼면 됩니다.”

“……힘줘서 말이죠?”

“예. 힘줘서 팍.”

“책 찢어질 것 감수하면서.”

“감수하면서.”

“…….”

그럴까 봐 지금 이러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비틀었다. 기울어진 책은 옆 책에 기대듯 쓰러졌다. 엘르시어는 그녀에게서 양손을 거두었다.

마침내 손이 자유로워진 위즈가 뒤로 주저앉았다.

“와…….”

“괜찮습니까?”

“예. 예.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고개를 휘휘 흔들며 말하는 모양이 영 정신없어 보였다. 엘르시어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을 들고 일어났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는 책이지만 다시 꽂기는 위험했다. 기왕에 집어들은 김에 제목을 확인했다.

온느발레어였다.

요즘에는 쓰지 않는 철자로 적혀 있어 해석하는 데에 약간 애를 먹었다. 악마의……, 땅에 관한……, 고찰.

아마도 논문집이다.

악마의 땅?

“어쨌든, 이겁니다. 가서 읽고 계세요. 다른 책들은 제가 찾아서 가져가겠습니다.”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위즈가 그를 향해 다른 책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엘르시어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제가 가진 책과 위즈가 건네는 책을 교환하였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그녀는 세우고 있던 두 무릎을 툭 떨어뜨려 길을 확보하고는, 책을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그가 손 내밀기 전에 일어났다.

위즈는 그에게 더 말 걸지 않았다. 옆 책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엘르시어는 카운터로 향했다.

* * *

한편, 탑주는 위즈에게서 도착한 열일곱 쪽 분량의 편지를 심각하게 내려다보았다.

해독하지 않으면 자존심 상한다. 그렇다고 해독하자니, 오늘은 키위가 먹고 싶다는 쓸데없는 내용이면 혈압 오른다.

평소 같으면 이를 박박 갈면서 당장에 해독을 시작하겠으나, 오늘따라 이토록 고민에 잠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너무 길어.

“…….”

노인은 깍지 낀 손에 신중하게 이마를 기댔다. 그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뒷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고 신나게 엿을 보냈건만, 막상 그 ‘미래의 나’가 되니 과거가 후회된다.

왜 그딴 짓을 저지른 거냐, 과거의 나.

복수 당할 거라는 건 알지 않았는가. 하지만 정도가 있다. 정도가 있다고. 열일곱 쪽에 달하는 글자들을 일일이 분석해서 해독 글자표를 만들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초콜릿 우유? 딸기 쿠키? 젤리? 사탕? 키위? 사과? 뭘 먹었다는 내용일까.

그리고 참 타이밍 좋게도, 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불안감이 있었다.

……설마 이번에 또 탑 팔아먹었다는 내용은 아니겠지.

아니겠…….

“…….”

탑주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적이 너무 화려해서 해독할 수밖에 없다…….

“그 인간……. 콘셉트를 정말…….”

그는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위즈 입장에서는 콘셉트를 잘 잡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위즈를 보면 예전의 그녀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니까.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중앙탑에는 소속되어 있되 학자들에게 얼굴은 알리지 않았던 그때의 그녀가 그리웠다.

그때의 그녀였으면 이런 쓸데없이 세심하게 복수심 빛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고통받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그래도 마지막으로 고심했다. 무슨 내용일까. 해독하기 전에 미리 어느 정도 짐작해 낼 방법은 없나. 그래서 해독하지 않아도 되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적어도, 며칠 전에 보낸 쪽지에 대한 답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해독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을 빤히 짐작할 텐데, 그 쪽지에 답해야 했다면 굳이 이렇게 길게 답할 이유가 없다.

지금은 자리에서 물러나 전국을 유리 중인 사람이 탑주에게 비밀리에 급히 맡긴 그 쪽지는, 겨우 한 번 접힌 채로 위즈에게 배달되었다. 그 정도로 급한 용건이었다.

그 쪽지 내용을 알고 있는 탑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검지로 눈물을 거두었다.

참 철저한 외면이다.

라파엘 에흐베 대공은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이 사망한 후 기사 서임을 무르고 물러나 유랑 중인 전 공작의 수하를 기어이 찾아내었다. 그리고 전 공작에 대해 물었다고 하였다.

대공은 진심으로 찾고 있다.

죽은 사람을 죽었다고 믿지 않고 그렇게 찾고 있다.

도대체 전 공작과 대공 사이에 정확히 어떤 종류의 유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깊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도 소식을 듣고 들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위즈가 지독했다.

좀 흔들려 주면 좋겠는데.

콘셉트가! 좀! 흔들려 주면! 좋겠는데!

탑주는 열일곱 장의 종이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로부터 삼 주에 걸쳐 해독한 그 서신은 한 문장으로 압축되었다. ‘끼북이를 발동해 보고 싶어서 보내 봅니다. 하하.’

마지막에 붙인 웃음이 압권이었다. 이거 분명 무표정으로 썼을 거다. 지금의 그처럼. 하, 하.

한참 문장을 내려다보던 탑주는 서신을 불태웠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 * *

셋째 날에도 위즈는 은여우단에서 그녀에게 공개한 자료들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집중하기 시작하자,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눈에 띄게 싫어하기 시작했다.

방실방실 웃으면서도 약간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이 만만하여 미니는 꽤 놀랐다. 위즈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하였던 ‘무언가에 푹 빠진 연구자’의 모습이었다.

평소 모습이 대단한 탓에 그 괴리 역시 대단하였다.

인상 깊었던 탓에 미니는 위즈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다 십여 분 전, 상황이 어떤지 한번 보고자 들렀던 다니엘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서 넋을 놓은 중이었다. 위즈는 그가 온 이후로도 한 번을 서류에서 눈 떼지 않았다. 그가 문득 말했다.

“……세상에 입을 다물면 멋져 보이는 사람이 정말 있긴 있었던 모양이지. 아, 슬픈 일이야.”

“슬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경도 입을 다물면 다르게 보이는 사람에 속하거든.”

“…….”

미니가 가차 없이 칼 같은 태클을 날렸고, 그것은 다니엘의 가슴에 푹 꽂혔다. 다니엘은 손을 들어 가슴을 짚었다. 너무하네, 진짜.

그러나 동료가 상처를 받든 말든 미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도 꽤 바빴다. 위즈가 일하는 사이 미니가 놀 수 있는 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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