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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21)화 (21/120)

# 20화

위즈는 성공적으로 일어섰다. 당당하게 턱을 든 그녀가 카운터 한구석에 내려 두었던 겉옷을 들었다.

“이제 갑시다.”

“…….”

민망함을 숨기려는 당당함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 전 일에 대해 더 짚지 않기로 했다.

엘르시어는 허리를 굽혀,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버려 둔 책 두 권을 주웠다. 카운터에 그것을 내려놓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위즈는 그의 뒤를 따라왔다.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걷느라 조금 느렸다. 밖으로 나와서는 큼지막한 자물쇠를 문에 채웠다.

옆에 물러나서 문단속을 기다리고 있던 엘르시어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물통이 번쩍번쩍하여 새것 같았다. 최근에 바꿨나.

이후 은여우단의 탑으로 돌아가는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갔다.

도착하기 전까지 위즈는 겉옷 주머니에 간간이 손을 넣어 끼북이와 쪽지를 매만졌다. 두 책 사이에 끼어 있던 쪽지였다.

* * *

일을 시작한 날부터 위즈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첫날, 여섯 중 한 사건의 증거품들과 시신의 상태 등이 적힌 보고서를 모두 살핀 후 사망 원인이 될 수 있는 아티팩트 후보를 몇 개로 추려 주었다. 다섯 시간이 걸린 작업이었다. 위즈는 두 번째 사건을 잠시 살피다가 돌아갔다.

퇴근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얼숍에서 사건 조사 중인 모든 기사가 그걸 듣고 굉장히 부러워했다.

위즈를 전담하게 된 미니는 다음날에도 그녀를 데려왔다. 위즈는 착실하게 준비를 마치고 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즈를 밀착 감시한 적이 있어 놀랍게도 그녀가 규칙적으로 생활한다는 걸 아는 기사는 놀라지 않고 안내하였다.

엘르시어는 위즈가 출근하였을 때 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발롬브로사와 대담해야 하는 주제 중 중요치 않은 게 여태 하나라도 있었느냐마는, 이번 주제는 특히 중요하였다. 지난번에 제이가 귀국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온느발레로부터 사신이 온다니 아니 중요할 수가 없었다.

하여 꽤 길게 한 시간 정도를 왕과 만나다 왔고, 출근한 위즈를 본 건 최우선으로 들어야 하는 보고를 들은 후였다.

제 집무실에서 나온 엘르시어는 위즈가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그녀는 마련된 큰 책상 앞에 앉아 사건 기록을 읽고 있었다. 묵묵히 집중하고 있다. 눈동자의 움직임이 몹시 빠른 것이 문 앞에서도 보였다.

“…….”

엘르시어는 미니에게 다시 업무로 돌아가라 이른 뒤, 위즈의 옆으로 다가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내려서일까. 그녀는 집중한 적 없던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깜박깜박 그를 올려다보던 위즈가 물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저와 기사 나리가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여기가 기사단 건물이라는 건 잊지 않아 줘서 다행입니다.”

“아휴……, 별말씀을요.”

“…….”

칭찬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즈가 정말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사람 민망하게 할 필요가 있나. 애초에 엘르시어가 부러 그녀에게 말을 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어제 독을 주입 당하였던 동그란 이마를 빠르게 살폈다.

깨끗했다.

완전히 안도한 그는 옅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일은 잘되어 가고 있나요?”

“그럭저럭……. 음…….”

“…….”

“그런데 누구라 하셨었더라……?”

“…….”

그래……. 그 맥락의 질문을 반복하지 않으면 당신이 당신이 아니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흐린 눈을 하고 인자하게 대답하였다.

“엘르시어입니다. 은여우단의 단장.”

위즈를 만난 횟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엘르시어보다 많았던 다니엘이 수 개월 전 생각한 바 있었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족 보행하는 금붕어라고. 그리고 그날도 매우 너그럽게 그녀를 용납했었다.

경험이 쌓이고 쌓이니 엘르시어도 몹시 너그러워졌다.

위즈를 위해 그런 자비심과 이해심을 갖추게 된 그들은, 그게 포기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아, 맞아요. 엘라스틴 씨.”

“…….”

그 자비심과 이해심을 순식간에 박살 내는 사람이 또 위즈라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녀는 멀뚱멀뚱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오늘 오는 길에 기사 나리들 몇 분을 만났는데, 죽어 가고 계셨어요. 놀라운 일입니다.”

“…….”

“되게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솔직히 제가 보고 있는 이것들도 시간만 좀 투자하면……. 한 일 년 정도 투자하면 기사 나리들도 어느 정도 이것저것 알아내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일 년이라는 기간이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나.

그러나 엘르시어는 위즈가 묻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지금 당신이 도와주고 있는 사건들 외에, 갑자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이 많습니다. 아마 마법이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은 사건들입니다.”

“오…….”

위즈는 애매한 소리를 흘렸다.

엘르시어는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다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대충 아무 소리나 주워섬긴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는 일단 의아함을 빠르게 삼키고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많이 바빠져서 당신을 고용했지요.”

“아하. 하여간, 그래서, 갑자기 동시다발적이란 말이죠? 뭔가 공통점 같은 게 있어요?”

“글쎄요. 조사 중입니다.”

설령 공통점이 있더라도 위즈에게 쉽게 알릴 사항은 아니었다.

미소하며 대답하자 그녀는 수긍한 듯 고개를 야무지게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눈동자는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화하면서도 기록을 읽어 내리는 중이다. 오른손의 검지가 올라와 중간 문단의 몇 문장을 훑었다. 손톱 끝이 잠시 멈추었다.

엘르시어는 위즈가 멈춘 부분으로 시선을 내렸다.

죽은 희생자의 친척 이름 목록이었다. 무언가 거리끼는 게 있을까. 그도 유심히 보기 시작했고, 잠시 후 위즈가 입을 열었다.

“큰일 났다.”

“예?”

“피트에게 한동안 제 식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안 했습니다. 걱정할 텐데.”

엘르시어의 눈길이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향해 올라갔다. 무얼 또 어떻게 연상해서 그 이름이 나왔을까. 위즈는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피트라면…….

“옆옆집 화가입니다. 식사.”

미니가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입을 뻐끔거려 알려 주었다. 엘르시어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위즈를 밀착 감시하던 당시 보고받으며 들은 이름이었다.

감시하며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 바가 있는 미니의 표정이 굉장히 미묘해졌다.

그다지 걱정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위즈 몫의 식사를 준비해 놓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준비했으면 ‘이 자식 또 왔어!’ 같은 절규가 매끼 터져 나오는 일도 없었을 터다.

점잖은 편인 수하의 그 표정을 목격한 엘르시어의 미소도 어정쩡해졌다. 그 사이 위즈는 서류 위에서 손가락을 떼고 다음 장으로 착 넘겼다. 팔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 여상스러운 소리에 그는 위즈를 보았다.

한두 줄 더 읽어 내려가는가 싶던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아까 읽은 증언 기록 좀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위즈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미니가 즉시 조치했다. 웃는 얼굴로 잠잠히 위즈를 내려다보는 엘르시어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두껍게 엮은 종이 무더기가 위즈의 앞에 다시 놓였다. 위즈는 그 기록을 넘기다가 힐끗 엘르시어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설마 또 이름을 물어볼까 하여 약간 아연해 지려던 찰나, 그녀는 고개를 도로 내렸다.

턱을 괴고 팔락 종이를 넘기는 걸 잠시 보았다. 그러나 재차 집중을 깨고 싶진 않았다. 엘르시어는 물러나서 미니 쪽을 보았다. 그의 수하는 이미 늠름하게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위즈 씨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웬만하면 들어주세요. 경 생각으로 경 소관이 아닌 것까지 원한다면 내게 오고.”

“예.”

위즈가 사탕 수준을 넘어선 것을 바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당부는 해 두는 편이 좋으리라. 그는 조금 더 덧붙였다.

“사신단 일로 얼마간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니, 일이 끝날 때까지 위즈 씨를 잘 부탁합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편히 보살피겠습니다.”

어린아이를 맡기고 가는 이와 맡은 이의 대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쩐지 서로 께름칙하다. 두 사람은 잠깐 침묵했다. 위즈의 보호자라니 생각만으로도 골치 아프지 않은가. 너그러움, 이해심, 자비심과 이 두통은 별개의 문제였다.

엘르시어는 마지막으로 위즈를 돌아보고는 회의실을 나갔고, 미니는 상사를 배웅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증언록을 읽어 내려가던 위즈의 눈동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춘 것도, 그 눈에 힘이 들어갔다가 꺼진 것도 보지 못하였다.

작은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꽃. 흰 꽃.

그러나 미니가 제 자리에 앉으며 위즈를 보았을 때, 위즈는 멀쩡한 얼굴로 다음 장을 넘겼다.

* * *

위즈는 이틀째 일을 마치고 귀가한 뒤, 불 없이 캄캄한 서점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

한참. 아주 오래도록. 어둠에 잠겨 흠뻑 젖었다.

이 웬 궁상이냐 할 정도로 분위기는 칙칙하였으나 얼굴만은 담담했다.

그러다 그녀는 어느 순간 숨을 들이켜며 턱을 들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처럼 숨결은 느릿느릿 움직였다.

작은 쪽지를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한 번 접혔던 쪽지가 구겨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손을 폈다. 구겨진 것을 보다가 그녀는 눈을 감고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흔들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럴 줄은 몰랐다.

죽은 사람을 이리 붙잡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전 공작을 찾고 있는 대공이 얼마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인지를 위즈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성적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죽은 사람을 왜. 죽은 지 벌써 2년하고도 거의 반년이 더 지났다.

정신이 흐려진 건가. 충격이 커서 미쳐 버린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럼 죽은 전 공작은 그 대공에게 그토록 크게 의미가 있었나.

그 자문이 문을 여는 열쇠라도 된 듯 숨이 진득진득하게 조여들었다. 감정적인 그 반응은 아주 서서히 풀렸다. 도중에 덜컥 멈추었다가 호흡은 새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답했다. 죽은 자에게는 고통스러운 답이었다.

아, 있었지.

있었지…….

하지만 전 공작은 미련, 없이 죽었는데.

위즈는 손을 오므렸다.

전 공작은 목적을 위해 미, 련없, 이 죽었는데.

“…….”

숨 막히는 그 말을 오래도록 되뇌었다. 미련 없다.

잠시 후 눈꺼풀이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담담했던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감정마저 온데간데없었다.

위즈는 온전히 태연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시계를 향하였다. 벌써 아홉 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위즈가 향한 곳은 부엌이었다. 불을 피워 물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거기에서 불씨를 얻어 카운터로 돌아가 촛불 다섯 개에 불을 붙였다.

그중 하나의 불꽃을 쪽지에 옮긴 뒤,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내려다보는 눈길은 새까맣게 어두웠다. 쪽지의 대부분이 까매졌을 때 위즈는 바닥에 쪽지를 버렸다.

곧 종이에는 흰 부분이 남지 않았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녀가 외면해도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한 번 밟으면 전부 바스라질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는, 어떤 차분한 손길에 무얼 빼앗겼다.

눈을 든 위즈는 앞에 선 사람을 보고 뒤늦게 외쳤다.

“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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