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7)화 (17/120)

# 16화

“큰 행보 없이 생존해 있다는 한 달 전 보고가 여전히 마지막입니다. 예정대로라면 하루 이틀 내로 새 정보가 도착할 것입니다.”

“그래…….”

라파엘은 적당하게 반응했다. 부디 그새 미련한 짓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올라오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그 왕자는,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것이다.

왕자를 살려서 귀국시키기 위해 라파엘은 많이 인내했고 많이 움직였다.

아리오에서도 뮌제의 사망을 조사하기 시작했을까. 미련한 자. 라파엘은 천방지축으로 헤집고 다니는 그 왕자를 경멸했다.

제국의 황제와 제국의 새 공작이 손잡고 벌인 일이다. 왕국의 일개 왕자가 대담하게 제기하는 의문은 쓸모 있을 수가 없었다. 대책도 없이 괜히 들쑤시기만 하여 라파엘만 짜증스러워졌을 뿐.

옥타브는 재차 경례하고 퇴실하였다.

라파엘은 펜을 내려놓고 그 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입가와 턱을 진득하게 쓸어내리며 내려온 손도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었다. 의자 등받이가 휘어지는 소리를 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묻었다.

두 팔도 자연스럽게 책상에서 떨어져 양 팔걸이에 내려왔다.

허공을 보던 그는 팔걸이 끝에 축 늘어져 있던 오른손을 오므리자 느껴지는 것에 고개를 내렸다.

약지에 낀 반지였다.

그는 그 딱딱하고 찬 반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2년 6개월.

뮌제가 홀로 사라진 지 벌써 2년 6개월. 뮌제를 보지 못한 지 벌써 2년 6개월.

찾지 못하는 것일 뿐 그녀는 살아 있다. 죽었을 리가 없어. 믿음이 흔들린 적 없었다. 그러나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워서, 숨이 질 것 같았다.

그에게 그녀는 목숨이다. 숨이고, 세상이다.

라파엘의 연한 회색 눈동자가 스르르 내려온 눈꺼풀에 조금 가렸다. 그는 등받이에서 뗀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조금 전 들은 왕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를 위해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라파엘에게, 오래 전 제이는 찾아와 욕과 저주를 퍼부은 바 있었다. 체면과 신분, 입장에 맞게 정제된 욕설이었다. ‘그토록 뮌제를 아끼지 않았던가. 어찌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있나. 어떻게 이토록 뮌제를 한순간에 버릴 수가 있나.’

[새 로헤올 공작은 그 사람의 마지막 편지와 다름없는 걸 구겨서 버리고, 당신은 뮌제가 죽어도 멀쩡해. 아무것도 안 해. 뮌제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무슨 일이 있어도 윌리엄 로헤올을 사랑한대. 무슨 일이 있어도.]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었다.

거의 울 것처럼 라파엘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린 왕자는 그 이후로 사교 활동 때마다 뮌제의 사망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고, 그것은 새 로헤올 공작과 황제는 물론이요, 라파엘에게도 몹시 거슬렸다.

라파엘은 이미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괜히 황제와 윌리엄을 예민하게 만들 필요가 결코 없었기에, 왕자의 행보는 뮌제를 찾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

그 천방지축으로 절박하게 굴던 왕자가 간과했던 게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우습게 간과했던 건 라파엘에 대한 부분이었다.

라파엘은 아리오에서 온 왕자를 죽여 온느발레와 아리오 간의 문제를 거리낌 없이 선뜻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왕자는 짚어 내지 못했다.

라파엘은 제이를 죽일 것을 진심으로 고려했다.

그럼에도 끝끝내 죽이지 않았다. 못했다.

억지로 떠맡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생명과 명예를 걸고 책임졌던 왕자였고, 뮌제는 왕자를 꽤 살갑게 대우했다. 그런 사실마저 라파엘에게 의미가 있었다. 뮌제의 무언가가 남은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는 일은 끝의 끝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뮌제가 보호했던 왕자를 윌리엄이 모욕한다면 그건 뮌제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로헤올 안에 있는 왕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뮌제가 꽤 살뜰하게 보살폈던 왕자가 죽는다면 그건 뮌제의 뜻이 죽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왕자가 온느발레에 의해 살해당하지 않도록 살폈다.

때가 잘 맞물려, 아리오의 왕실에서 왕자가 이제 그만 귀국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요청이 왔다. 권력 싸움의 과정이었다. 뮌제가 죽어 황제에게 왕자는 더는 필요가 없었으므로, 왕자는 아리오로 귀국하게 되었다.

돌아가는 그 길, 아무도 모르게 라파엘의 기사들이 따르며 왕자를 지켰다.

라파엘은 그 모든 보호를 위해 많이 인내했다.

[그 사람이 대공 당신을 얼마나 특별히 여겼는데. 내 눈에 보일 정도로 그러했는데.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뮌제가 아니었다면 죽였을 왕자의 흐느낌은 조금도 가치가 없었다.

뮌제의 너그러운 우정은 보이는데, 라파엘 그의 감정은 그 눈에 보이지 않던가.

뮌제가 있어 숨쉬고 있던 그가 보이지 않던가.

라파엘은 왕자가 저를 질시했음을 알고 있었다. 뮌제가 가장 아꼈던 두 사람이 그녀를 외면한다는 것이 왕자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의미가 될 정도로 질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반지 위에 올렸다.

라파엘은 그 반지를 들여다보며 환청과 환상에 잠겼다.

[고마워, 라파엘. 넌 이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거야.]

이 반지를 끼고 속삭이던 친구가 들렸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뮌제는 그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얼굴을 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그의 기억 속에서 사랑스러워서, 이 순간 그의 눈빛은 따뜻하게 녹았다. 타인 앞에서는 그리도 냉철한 사람이 오로지 그의 앞에서만 휴식하였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그에게만 풀렸고 그도 그녀에게만 녹았다.

라파엘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내심 속삭였다.

뮈즈.

오로지 그에게만 허락되었던 그 이름.

뮈즈.

농담을 하며 맑게 웃는 그 청수한 얼굴, 그 서늘한 평온,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던 저희 두 사람의 관계.

기억 전부가 밧줄이 되어 그의 심장을 감아 조였다.

“…….”

라파엘은 반지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의 기억 속 뮌제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검을 들고 앞을 보는 그 옅은 잿빛 눈동자가 그를 떠났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하들이 그의 정신이 흐려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상식적인 판단이다. 라파엘은 피로 물들었던 그 현장을 직접 보기까지 했었으니.

산길에서 살해당해 조각조각 터진 시신.

신상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조각난 옷이나 조각난 손가락 마디로 보았을 때 뮌제 로헤올임에 틀림이 없는 시신.

거기까지 생각한 라파엘은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웃기지 말라.

포기할 일 없다.

그는 그녀를 혼자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수색이 곤란하거든 내 앞에 와서 말해. 널 찾을 거야. 내게서 숨지 마. 내가 네 근처까지 닿았거든, 제발 숨결 한 조각이라도 좋으니 내게 너를 보내 줘.

진하게 피 냄새를 달고 있는 한 손이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누르고 지나갔다. 잿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의자 뒤의 창을 통해 바깥, 먼 노을 하늘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손을 뻗었다.

희미하게 창에 비친 제 얼굴, 눈 있는 곳을 더듬었다.

그녀에게서 물든 자신의 눈동자가 비치는 곳.

손끝이 아리도록 차가워졌다. 그는 이내 초점을 멀리 두었다. 다시 하늘. 뮌제를 찾던 그의 눈은 어느 순간 시퍼렇게 날이 섰다. 생각에 잠긴 그 살기가 싸늘하였다.

그의 살의는 온느발레의 황제와 윌리엄 로헤올을 향한 것이었다.

윌리엄을 향한 살뜰한 애정에 눈 가려 있던 뮌제 대신, 저라도 눈치를 챘어야 했다. 누이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공작위에 올라서 뮌제의 미심쩍은 사망을 묻어 버린 윌리엄. 그리고.

황제.

그 존귀한 여자를 떠올린 라파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아침부터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벌써 사흘째 이 서점에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기록 갱신 중이었다. 나흘 전에 잡동사니의 길 거주자들과 땅따먹기를 하다가 실수를 한 게 이유일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위즈가 휘두른 손날에 정수리를 맞은 한 공예가가 고통 속에 땅을 뒹굴었지 뭔가. 그 공예가를 안고 누군가가 울부짖기까지 했었다.

[새로운 용사 24번이여! 네 희생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울부짖은 사람은 어쩌다 보니 희생된 새로운 용사 25번이 되었다.

이어진 땅따먹기 중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을 허우적대다가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버린 탓이다. 어쩌다 보니.

덕분에 사흘간 한가롭게 카운터에 머리를 박고 있던 위즈는 고개를 번쩍 들고 시계를 보았다.

점심시간이다.

때마침 배에서 천둥이 쳤다. 꼬르르륵. 그녀는 숨죽였다. 눈을 깜박이던 위즈는 결정했다. 밥 먹으러 가자.

결정한 순간부터 일어나 자리를 정돈했다. 위즈는 작은 주머니를 목에 건 순간부터 흥 많은 것처럼 몸을 쫑긋쫑긋 움직이며 신나게 박자를 탔다. 작은 콧노래도 곁들였다. 서점의 문을 꼼꼼하게 잠그고 몸을 돌렸다.

먹을 거. 먹을 거.

팔랑팔랑 뛰어가 옆옆 집의 문을 열었다. 화가의 안락한 집, 물감 냄새가 나는 공기. 그녀는 기분 좋게 킁킁거리다 식탁에 앉았다. 반대편에 놓여 있던 식기 한 벌을 갈취하여 제 앞에 놓고 나니, 큰 접시를 든 남자가 부엌에서 나왔다.

위즈는 헤벌쭉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의 메인 요리군요!”

“…….”

남자는 일단 접시를 식탁 가운데에 내려놓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 자식 또 왔어.

거기에 대고 위즈는 해맑게 물었다.

“안 앉으세요?”

“……왜 네가 나보다 먼저 앉아 있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 또 언제 들어왔어?!”

피트는 소리소문없이 나타나 먼저 식탁에 앉아있던 위즈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서점의 옆옆집에 사는 피트의 사연은 기구했다.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무단 침입한 위즈가 어느새 식탁에 앉아 있어……! 기적 같은 개코를 가졌으면 좀 유용하게 쓰면 좋겠는데 쓸데없이 옆옆집이 요리하고 있는지 아닌지나 구별해 내고 있고!

옆집도 아니고 옆옆집인데!

위즈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마추어 같으시긴.”

그 순간 피트는 반쯤 숨넘어가는 위기를 거쳤다. 꼬르륵 넘어가던 숨을 애써 되돌린 그가 외쳤다.

“그럼 너는 프로 도둑놈이냐!”

“전 훔쳐 가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식사! 내 식사! 네 위장이 훔쳐 가는 내 식사! 네가 거덜 내는 내 식량!”

그러자 그녀가 냉큼 인정했다.

“그렇군요. 옳습니다. 전 프로 도둑놈입니당.”

“그딴 말투는 집어치워!”

상큼한 척 말해 보았지만 피트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피트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 이 자식을 가져다 어디 땅바닥에 심고 싶다. 물론 거꾸로.

그는 더 무어라 하지 않고 여벌의 식기를 가져왔다. 그가 제 자리에 앉아 앞 접시에 요리를 덜어와 입에 넣고 나서야 위즈는 그녀의 식기를 들었다.

얌전히 식사하는 그녀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고기 조각을 입안에 집어넣던 그는 폭 한숨을 쉬었고, 잠시 후 다시 푹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항상 의문이었다.

이 골목에 사는 수많은 화가 중에서 왜 하필 내가 찍혔는가.

왜 하필 내가 골라졌는가.

나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역시 인지하지 못하는 새 그가 위즈에게 무슨 무례를 저질러서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

아니, 그러고 보면 남의 집에 멋대로 문 따고 들어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예의고 예절이고 모든 게 글러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는 미간을 좁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