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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6)화 (16/120)

# 15화

제이를 지켜보기 위해 보냈던 은여우단의 기사가 한 차례 그녀에게 발각되었던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전 공작은 기사를 조용히 돌려보냈었다.

그대로 기사를 죽이고 입을 다물어도 아리오에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한다. 국가들이 서로서로 간자를 침투시키고 있음은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일이지만, 증거를 잡고 공식적으로 수면 위에 올리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여 전 공작은 아리오의 기사가 침입했다는 보고를 올려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일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잡고, 조용히 돌려보낸 뒤,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너희를 색출해 낼 수 있으니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에는 좌시하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하는 전언마저 감사했다. 발롬브로사도 이 사람, 물건이라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의 생일.

기일도 아니고 생일.

깊은 고마움으로 인하여 그에게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긴 하였으나 생일을 기억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제이가 이런 감정일 줄은 몰랐다.

엘르시어는 제이가 로헤올 전 공작을 친구로 엮을 정도로 친근하게 여기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2년 4개월쯤 전 로헤올 전 공작이 죽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로헤올 전 공작은 어디까지나 인질의 책임자였다. 볼모 되었던 아리오의 왕자로서는 원수처럼 여기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후작은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올렸다. 무언가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어렴풋이 이해가 되려는 부분이 있었다.

제이의 갑작스러운 귀국. 군주인 발롬브로사조차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사전에 막지 못했던. 늦추지도 못했던 귀국.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그에게 제이가 웃으며 물었다.

“부왕께 또 보고할 겁니까?”

“…….”

갑작스러운 비아냥거림이었다.

엘르시어가 그를 보자 제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그냥 여쭤보았습니다. 나 귀국한 이후로 계속 따라다니길래. 저기, 은여우단 기사 아니에요? 맞지요? 매일 나를 따라다니던데.”

제이의 엄지가 가리킨 곳은 제이의 등 뒤였다.

맞다. 어딘가에는 엘르시어의 부하가 있을 것이다. 아티팩트로 몸을 가린. 그러나 등 뒤로 장소를 특정하는 것은 엘르시어라도 불가했다. 그는 마법을 느낄 수 없는 비마법사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한, 제이도 그랬다.

엘르시어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경, 어디 있나.”

“…….”

명령을 닮은 질문에 그의 부하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의 뒤편이었다. 경례한 부하는 곧바로 모습을 지웠다. 엘르시어가 제이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로헤올 전 공작처럼 기감 예민한 사람하고 지내다 보니 어느 정도 느껴지더이다. 그녀 말로는 몸속 혈이 열렸을 거라 하던데. 후작도 알다시피, 그 공작이 좀 강합니까? 모든 마법사가 그 사람 앞에서는 벌벌 떨 정도였는데.”

“로드. 저것은 마법입니다. 기감의 예민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 마법사냐는 질문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제이는 픽 웃었다.

“후작, 로헤올 전 공작에게 세간의 지식을 강요하지 마세요. 그녀는 정말 강했습니다. 괜히 강하다는 소문이 나는 게 아닙니다. 괜히, 마법사들의 천적이라 하는 게 아니에요.”

“…….”

“그래서 이해를 못 했지. 한낱 강도들이 가진 아티팩트에게 당해? 그 사람이요?”

이제 엘르시어의 짐작은 더는 어렴풋하지 않았다. 훨씬 선연한 형체를 갖추었다.

“나는 진상을 원합니다. 내 은인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없는 힘으로라도 어떻게든 파 보려 했더니 상황이 하 수상하게 돌아가서 나는 아리오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급해졌다. 엘르시어의 손이 올라가 왕자의 팔뚝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의 눈에 낮은 힘이 들어갔다. 그는 실로 급했다.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말씀을 부디 조심하십시오.”

저기 서 있을 부하에게는 들리지 않을 음성이었다. 그러나 제이는 웃으며 그의 손을 털어냈다. 엘르시어는 쉽게 떨어져 드렸다. 대신, 더는 말씀하지 말라고 제이를 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제이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 왕자는 여전히 의뭉스럽게 웃고 있었다.

“부왕께 말씀 올리길 바라며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로드.”

“때가 되면 내 직접 말씀 올리긴 할 겁니다. 그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거지요. 이런 기회가 많이 올 것 같지도 않으니 잡아야지요. 꼭 보고하세요, 후작.”

“로드.”

“나는요.”

제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새 공작과 에흐베 대공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새 공작은 제 누이를 외면했고, 그 대공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녀가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 그 꼴이야. 그럼 나라도 움직여야 할 게 아닙니까.”

“온느발레의 일입니다.”

“아니요. 내 일입니다. 전 공작에게 받은 게 너무 많은 나라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부왕께 꼭 말씀 올려 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나라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로드.”

왕자가 거절하였으니 다시 팔을 잡는 것은 불경죄였다. 엘르시어는 주먹을 쥐었다. 발롬브로사가 바라는 제이는 이런 제이가 아니었다.

“왕좌도 필요 없습니다. 진상만 바랍니다. 로헤올 전 공작의, 뮌제의 죽음에 대한 진상만 바랍니다. 그걸 밝히고 말 것이고, 그러다 죽어도 나는 괜찮습니다.”

“로드!”

정말, 아니다.

이 모든 발언을 반드시 보고해야 하는 엘르시어는, 현 왕이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길로 이미 가고 있었던 제이를 깨닫고 끔찍하게 곤란했다. 이런 제이는 발롬브로사의 계획에 없을 터. 바라지도 않을 터.

* * *

다음 날 아침, 엘르시어는 제이를 보고했다. 예상했던 대로 발롬브로사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놈이 미쳤구나!”

제이의 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을 분노였다. 타국 공작, 그것도 다른 나라도 아닌 온느발레의 공작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제국인 온느발레는 주변 왕국들을 향해 부리는 횡포의 역사로 인해, 이미 충분히 반감을 쌓은 채였다.

제국의 방패로 이름 높았던 뮌제 전 로헤올 공작의 미심쩍은 죽음은 여러 나라에 분명 충격을 준 바 있었다. 강도? 강도에 의한 살해? 강도가 가진 아티팩트에 의해 폭사?

힘 있는 제후를 내치기 위해 수를 썼다는 생각을 과연 제이만 했을 것 같나. 아니다. 머리 돌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했다.

입 밖에 내지를 못할 뿐.

개 같은 제국의 공작의 억울한 죽음 같은 것을 구태여 파고들 이유가,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게 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제이가 특별하게 미친 것이다. 이 정신 나간 자식 놈이 손댈 것이 따로 있지! 발롬브로사는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에 책상을 내리쳤다. 그리고 명령했다.

“그놈 행보를 주시하게. 이상한 짓을 하려 한다 하면 막아. 선 조치 후 보고 원칙으로. 윤허하겠네.”

“받듭니다. 그리고 전하. 한 가지 더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뭔가.”

“왕자께서 마법을 느낄 수 있으십니다.”

왕은 말을 잃었다. 분노 위에 찬물이 부어진 듯 순식간에 노여움이 식었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건 또 웬.”

“로헤올 전 공작은 몸속의 혈이 열린 덕분이라 하였답니다.”

“혈?”

처음 듣는 단어, 처음 듣는 개념이다.

“그런 게 있어?”

“죄송합니다. 저도 처음 듣습니다.”

발롬브로사는 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마법과 관계가 없던 사람이 후천적으로 마법을 느낄 방법이 존재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게 가능하면 후천적 마법사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달려들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차고 넘쳤다.

로헤올 전 공작이 제이를 무시하며 건넨 농을 설마 믿고 있는 건 아닐 테고. 그럼 그가 모르는 사이 온느발레에서 기적적으로 멍청해져서 돌아왔나. 그러나 엘르시어의 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티팩트를 지닌 은여우단의 기사를 왕자께서 정확히 짚어 내셨습니다. 존재도, 서 있는 지점도.”

“우연이겠지.”

“…….”

“……절대 우연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나?”

“죄송합니다.”

우연이었다면 애초에 보고도 하지 않았으리라. 그를 알면서도 지나치려 했으나,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무시하고 싶었으나, 역시 그럴 수 없는 모양이다.

왕의 잇새에서 앓는 소리가 재차 흘러나왔다.

죽은 로헤올 전 공작이 별 이상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법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편이 세상 살기 편하다.

군주로서 유능하면 좋겠으나, 마법은 몰라도 된다.

로헤올 전 공작이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검과 아티팩트를 무지막지하게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죽일 놈의 마법사들의 천적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이 이렇게나 그를 열 받게 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친하게 지냈기에 목숨을 걸고 그 여자의 죽음을 캐내겠다고 하나. 도대체 얼마나 친했기에 이따위 마법에 관한 것을 가르쳐.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간 추측이 하나 있었다.

발롬브로사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잠깐.

“……그놈 설마 온느발레에서도 그 공작 죽음을 캐고 다닌 건 아니겠지……?”

“…….”

“그러다 귀국 당한 건 아니겠지?”

“…….”

엘르시어는 말이 없었다.

충성스러운 후작의 반응에 왕은 미간을 짚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멍청한 아들놈 같으니. 얌전히 온느발레에 조금만 더 머물러 주었으면 좀 좋아? 내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온느발레에 보냈는데. 아, 미친 탑주 노인네를 만나면서 혈압을 높인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이제는 아들놈이 혈압을 높이네.

뒷목 잡고 드러눕고 싶다. 발롬브로사는 흐느끼지 않도록 조심하며 애써 말했다.

“알았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조치하지.”

“예, 전하.”

엘르시어는 정중히 예를 갖춘 후 퇴실하였다.

* * *

햇빛 짙은 날이다. 그 오후. 슬슬 노을이 지려 하는 하늘에 붉은 기가 섞이기 시작한 시간.

답답하리만큼 진한 느낌의 햇빛이 남자의 등 뒤에서 쏟아져 내렸다. 에흐베 대공은 책상에 내린 제 그림자를 신경 쓰지 않고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여백에 메모하는 필치는 날카로울 정도로 정갈하였다.

꽤 집중하고 있었으나, 그는 어느 순간 멈칫했다. 숨이 조금 흔들렸다.

그로부터 겨우 수 초 후 문이 두드려졌다.

“전하. 옥타브입니다.”

라파엘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던 자의 음성이다. 그는 잠잠히 호흡을 고르고 입실을 허락했다. 펜을 쥐고 멈춘 손이 긴장으로 마비되는 듯하였다.

보좌가 책상 앞에 서는 것을 잠잠히 지켜보았다. 옥타브가 경례하자, 라파엘은 나직하게 물었다.

“어떻지?”

그렇게 들은 보고는 실망스러웠다.

“수확이 없었다 합니다. 새로 정착하기를 희망한 이나 새로 정착을 완료한 이도 찾아보았습니다만, 그분이 아니셨답니다.”

“…….”

라파엘은 눈을 내렸다. 펜을 잡지 않고 책상에 올라가 있던 손이 입가를 감쌌다. 그 밑에서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모국인 온느발레뿐만 아니라, 아리오를 비롯한 왕국들, 중앙탑까지 찾고 있다. 수색이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패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웠다. 숨이 막힌다.

그는 눈을 감으며 침을 넘기고, 다시 눈을 떴다.

“수고했다고 전해.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서 수색을 계속해.”

“예.”

“그 왕자는.”

지난 2년 6개월, 라파엘의 집무실 안에서 주로 논의된 왕자는 한 명뿐이었다.

뮌제의 뒤를 이은 윌리엄이 왕자를 잘 책임지고 있는지 비밀리에 살피느라.

왕자가 아리오에 멀쩡하게 도착하는지 살피느라.

아리오에 돌아간 왕자가 헛짓하지 않는지 살피느라.

과연 옥타브는 제 군주의 의중을 꿰뚫고 즉각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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