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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5)화 (15/120)

# 14화

엘르시어는 의식적으로 피했던 그녀의 얼굴로 눈을 들었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를 보고 있는 위즈는 웃고 있었지만, 아주 조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엘르시어는 반사적으로 미소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귀족 대부분이 그렇듯 교육의 산물은 그의 언행에 자연스럽게 박혔다. 하여 그가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위즈의 말에는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보여야 할 반응에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의 일생,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이라곤 귀족들이나 부하들, 피해자 혹은 피의자뿐.

그들이 외적으로 보이는 건 단편적이다. 그가 받은 교육도 그러한 단편적인 반응에 대한 반응에 한정했다. 위즈처럼 수상하고 의뭉스러운 사람, 깊은 사연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또한,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섣부른 말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어떤 불쾌감에 가벼이 사로잡혔다.

그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가, 그녀의 다른 고백이든 웃음이든, 하다못해 바보 같은 농담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럼에도 위즈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약간 당황했다.

“책을 다 읽으시면 알아서 정리하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어, 음. 급히 읽으실 필요는 없고요. 저는 외출하던 길이라.”

“……어딜.”

그새 목이 잠겨 있었다. 그는 제 음성의 상태에 당혹했으나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했다. 한 번 당황하니 끝이 없었다. 엄습한 당황의 시작점이 어떤 일이 아니라 감정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호흡은 인지 못 하는 새 멈춰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날숨을 풀어 갔다.

위즈는 대답했다.

“산책이요.”

“이렇게 늦게 말인가요?”

“네에. 보통은 지금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출발하긴 하지요. 원래 그런 날이 있습니다. 밤 산책을 다녀오지 않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 매일은 아니더라도.”

그는 카운터를 돌아 나온 위즈의 팔을 가볍게 잡아 제지했다.

어두운 촛불 서너 개가 흔들렸다. 두 사람의 눈이 위아래에서 마주쳤다. 그림자 진 그녀의 얼굴에서 눈동자가 특히 정연했다.

잠시의 침묵 후 위즈가 미소했다.

“손님?”

그가 위즈를 처음 만난 날도 이런 늦은 밤, 잡동사니의 길 위, 서점 바깥이었다. 수도의 치안을 아무리 신경 쓴다 하더라도 웬만하면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자제하는 편이 나았다.

이제 이 정도 경고는 해 줄 정도로 얼굴을 익혔다. 그는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

그를 내려다보는 위즈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옅게 미소지은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촛불 하나가 훅 꺼져 서점 내부가 갑자기 반쯤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점점 잠겨 들어갔다.

그는 그대로였다. 확 깨어난 사람은 위즈.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입을 비죽인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리고 위즈는 그의 손을 정중하게 털어내고 나섰다. 그들 사이는 밤길을 경고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엘르시어는 그녀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 * *

“어? 혹시 후작?”

엘르시어는 목소리가 들려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음성의 주인은 더 다가왔다.

“후작 맞네. 여기서 뭐하시오?”

엘르시어는 이 목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전연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위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달빛은 밝으나 밤의 어둠이 더 강했다. 도서관 바깥에 내건 램프들은 정문 부근에나 달려 있지, 그들이 서 있는 뒤편에는 달려 있지 않았다. 그는 금세 사라져 버린 그녀를 굳이 잡지 않았다.

그는 독서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그녀를 보았고, 잠시 멈춰 선 중이었을 뿐이다. 위즈는 그가 동행하는 것을 눈에 띄게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굳이 아는 척할 필요도 없기에 잠시 후 지나치려던 참이었다.

위즈는 왕립 중앙 도서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엘르시어가 그녀를 보고 멈춘 이후로도 오래도록.

“후작?”

엘르시어는 그녀가 보고 있던 건물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웅장하여, 아득하다.

그리하고 나서야 그는 육 년 전 인질로 보내지기 전부터 친밀하게 교류했던 셋째 왕자에게로 고개를 비로소 돌렸다.

“로드.”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제이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나 돌아온 이후에 겨우 두 번 만났었지. 잘 지내셨습니까?”

“예.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로드께서는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뭐……. 내가 왜 이 오밤중에 왕궁 바깥을 쏘다니겠습니까.”

제이의 말에 뼈가 있었다.

발롬브로사의 명이 있었던 바, 그에 따라 모르는 척하고 있으나 엘르시어는 제이에게 향하는 수많은 경계, 나아가 살의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 상황은, 실은, 며칠 안으로도 정리가 될 수 있다. 정리를 시작하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손을 놓고 있을 뿐. 어릴 적부터 그와 함께 자라 온 이 왕자는 그런 것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었다.

엘르시어의 입은 다물린 채로 열리지 않았다. 그것을 본 제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굳이 짚어 서로 입맛을 쓰게 하지는 않았다.

왕자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저기, 누가 서 있는 것 같았는데? 일행이었어요?”

엘르시어는 짧은 순간 계산했다. 위즈의 가치. 제이는 누군가를 아는 것 자체가 흠이 될 수도 있는 신분이다. 저와는 입장이 상당 부분 달랐다. 하여 계산해 내야 했다. 위즈는 제이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직후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음? 멈춰 서서 보고 있었잖아?”

“…….”

“아, 혹시 나 때문에 거짓말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단호하게 잘랐지만, 제이의 눈빛이 영 수상해졌다.

왕자는 잠시 입매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 이해한다는 자비로운 감성을 가득 담아 물었다.

“밀회 중이셨어요?”

“아닙니다.”

이는 원하는 답을 얻어 내기 위해 조성하는 미끼다.

엘르시어는 제이를 알아 오는 중 이를 여러 번 당하고 여러 번 물리쳐 냈지만, 개중에 이만큼 짓궂은 미끼는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 주기 위하여 제이는 은근하게 미소했다.

“밀회였네.”

“아닙니다.”

“어느 가문 아가씨이신데?”

“아닙니다.”

“아하, 그럼 어느 가문 도련님?”

“…….”

……성별 전환한 위즈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육 년간 다른 이는 몰라도 너는 변하지 않았으리라’는 심중을 내보이는 것처럼 제이는 엘르시어를 전과 같이 대했다. 어디서 비롯된 믿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 믿음이 황송했다. 현 군주의 신뢰만큼 황송하고, 감읍하다.

그러나 육 년하고도 사 개월만의 이 장난이 아주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 것과, 오히려 전만큼 당황스럽지 않은 것에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더 강력한 사람을 겪다 보니 여유가 생긴 것일 터. 제이는 짓궂기는 하지만 위즈처럼 기가 막힐 만큼 상식인과 비상식인을 넘나들지는 않는다.

단지 이 순간 분명한 바가 하나 있다면, 이 일을 잘 매듭짓지 않으면 앞으로 여러 번 언급이 되리라는 점이다. 엘르시어에게 심한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제이는 뒤끝이 있었다. 재미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엘르시어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만 인정하자.

“지인입니다.”

“아는 사람은 맞았네! 음. 음.”

“어느 가문의 분도 아닙니다.”

“아, 그럼,”

“가주도 아닙니다. 서점을 운영 중인 평민입니다.”

“다 좋습니다. 다 좋은데, 그래서, 여자입니까?”

“……예. 여성입니다.”

그러자 몹시 흡족해하며 상황을 음미하는 표정으로 제이는 짝, 짝, 짝, 박수를 쳤다. 박수마저 음미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놀릴 수 있다는 기회를 잡은 것에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축복을 위한 박수는 분명 아니었다. 엘르시어에게 경종이 울렸다.

설명을 해도 안 해도 꼬리를 잡혔을 주제였음은, 설명을 모두 마친 후에야 깨달았다.

평상시 엘르시어는 섣부른 사람이 아니지만 누구 두 사람 앞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닮았다. 이 두 사람. 무슨 스승과 제자처럼. 엘르시어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폈다. 그것을 본 제이가 실실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요. 그런데 밀회는 아니란 말이지. 이 밤중에 지나다 멈춰 있었어도. 저 여성은 다른 사람이 와서 도망친 게 아니고.”

“로드.”

“알았다니까요. 후작도 아시겠지만, 후작의 애정사는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정확히 짚고 가서 나쁠 건 없잖아. 후작께서 알아서 하겠지마는, 조심하기만 하세요. 지인이 애꿎게 말려들 염려가 있으니. 물론, 후작께서도 아시겠지만.”

“……염려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짚어 주시는 수고에 염려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확실히, 그와 위즈와의 관계는 애정사와는 거리가 매우 멂에도 왈가왈부할 여지는 타 귀족들이 만족할 만큼 넘친다.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엘르시어는 눈꺼풀을 내리며 고개를 내렸다 올렸다.

왕과 가장 닮은 이 왕자는 비단 생김새가 닮은 것만이 아니라, 언행, 처신 같은 것이 상당 부분 닮았다. 가까운 곳에서 두 분 모두 보필하는 엘르시어로서는 똑똑히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 이런 살가운 칼날을 참 능숙하게 다루는 것도 그러했다.

어깨를 움직이며 눈에 띄게 한숨을 쉰 그는 왕실을 모시는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밤. 왕자의 주변에는 호위조차 없었다.

“만찬은 어찌하시고 암행을 나오셨습니까.”

“암행이라니. 평범한 외출입니다, 외출.”

“…….”

말을 돌리려는 시도는, 이번에는 씨알도 들어 먹히지 않았다. 제이는 엘르시어의 재미없는 반응에 혀를 체 하고 차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찬은 끝났지. 끝냈다고 해야 하나. 내가 상을 엎었거든.”

“예?”

“그러고도 체하고 말았지 뭡니까. 우리 귀하신 형제자매들, 새어머니께서도 다들 같이 체하길 바라며 새삼 신께 기도도 드렸습니다.”

상을 엎어? 진심으로? 정말 실행했다는 말인가?

그토록 난폭한 행동을 하는 제이를 여태 본 적이 없다. 엘르시어는 진심으로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그러나 현 왕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셋째 왕자는 컴컴하게 웃었다.

“오늘은 날이 아니었습니다.”

“로드.”

“오늘은 정말 아니었어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문득 걱정이 들었다. 아리오로 돌아온 제이의 행적은 대체로 파악하고 있으나, 오늘 오후 여섯 시 이후부터의 일은 내일 아침에 보고받게 될 것이었다. 그는 만찬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여 물었다.

제이는 제 입장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 고로, 호위 없이 외출하는 무모한 행동은 쉬이 하지 않는다. 은여우단 소속의 기사가 은밀하게 따르고 있으니 여차할 시에는 왕자를 지키겠으나 일정 수 이상의 다수는 홀로 상대키 어렵다.

영리한 와중에 신중한 왕자가 그런 점을 간과할 리 없었다.

하여 항상 몸을 조심하는 그가 이런 막무가내 외출을 했다면, 제이의 감정이 참기 힘들 정도로 격동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걱정스러워하는 엘르시어를 한참 보던 제이는 잠시 후 빙긋 웃었다.

“생일이거든.”

짧은 대답이었다. 이해하지 못했다. 왕자는 덧붙였다.

“온느발레에서 사귄 친구의.”

“온느발레에서…….”

“그래요. 후작도 알 텐데. 로헤올 전 공작.”

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으로 올라가는 여행 도중 산길에서 강도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하는 로헤올 전 공작. 강도가 가진 아티팩트로 인해 강도들과 함께 폭사한 사람이다.

그가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마법과 아티팩트를 상대할 때의 그녀의 능수능란함은 온 세계에 명성이 자자했다. 하여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발롬브로사는 물론이요, 엘르시어를 비롯한 이 나라 세 기사단의 단장들마저도 귀를 의심했었다.

특히 엘르시어는 로헤올 전 공작에게 개인적인 고마움을 가지고 있어 더 놀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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