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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4)화 (14/120)

# 13화

막 만찬을 마치고 돌아온 제이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아, 미치겠네.

입맛 떨어지게 하는 인간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면 남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체기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함께 만찬을 가졌던 형제들 모두 속이 더부룩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도 체하고 너희도 체하자. 다 체해라.

그는 제국에서 미리 한 줌 챙겨 왔던 소화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모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싶었다면 저는 빼면 어디가 덧나는가. 일단 부친인 왕은 제이를 불러 놓고도 막상 만나자 표가 나게 얼굴을 구겼다. 온느발레에서 살아 주겠다는 걸 무엇하러 불러들여서 서로 비위를 상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왜 하필 오늘.

“아, 미치겠네.”

왜 하필, 그의 친구의 생일인 오늘.

이런 참담하고 슬픈 날에 이 짜증스러운 기분이 가당키나 한가. 부왕의 그런 반응을 보면 친구가 더 선연히 떠올라서 마음이 어쩔 줄을 몰랐다.

[어쩌면 당신을 가장 귀애하시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뭐?]

[자식이 둘 이상이면 그중에는 반드시 특히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입니다.]

부왕에 대해 한탄했더니 그의 친구는 그렇게 짐작했었다.

퍽이나 그러겠다고 앞에서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지만, 그 간단한 짐작이 제이의 마음을 얼마나 어루만져 주었는지 친구는, 뮌제는, 그 늠름하고 명철한 공작은 몰랐을 것이다.

은잔에 물을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목이 탔다.

“푸흐.”

부끄럽지만 그는 로헤올 공작에게 보호받았다. 보호라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을 그리 평온하게 해주는 단어인 줄을 그녀의 날개 아래에서 알았다.

다 큰 성인 남성이 그런 안도감을 갖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후에야 공작이 시원하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내가 보호해야 하는 로헤올령 영주민들 중에는 당신보다 나이 많은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성인 남성들이 내게 보호받고 있지요. 그들이 그걸 부끄럽게 여길 것 같습니까? 당신은 무엇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왕자라서.

원래대로라면 나도 당신처럼 누구를 보호해야 하는 신분이라서. 그럴 입장이라서.

나는 타국의 왕족이라서.

인질일 뿐인 나를 이토록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해 당신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감수하고 있다는 걸 들어서.

[온느발레에서 당신은 그저 소국에서 보내 온 인질일 뿐입니다. 당신이 여기서 가진 가치 있는 것은 당신의 목숨과, 왕자라는 말뿐인 신분밖에 없고. 나는 내게 하달된 임무를 힘을 다해 지키는 것뿐이니 당신은 상관 말고 안전하게 생명을 이어 가면 됩니다.]

참, 말, 예쁘게 못 했지.

그 간단한 모진 말을 뮌제는 덤덤하게 했다. 그럼에도 제이는 그 말에서 위로를 찾았다.

“죽긴 왜 죽어서…….”

철과도 같은 방패의 뒤에서 포근하게 보호받으며 지냈다.

친구라 하기 미안할 정도로 일방적인 의지. 그녀는 기둥처럼 단단히 서 있었고, 그는 그녀를 잡고 지탱했다.

그렇게 그 구름 같은 환상에 몸 맡기고 지내다 보니 뮌제는 고인이 되었다. 강도로 추정되는 무뢰배들에게 살해당한 것 같다며. 강도들과 함께 죽었다며.

또래의 사람인데 한 명은 어른이고 한 명은 아이가 되어, 그 감사한 빚 갚을 시간도 없이 어른은 세상을 떠났다. 뮌제 로헤올 공작 밑에서 그는 항상 유약했다.

의지처가 타국의 공작이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로헤올 공작이 내려 주는 햇볕 속에 누워 빛을 받아 왔다. ‘처음’이라는 평온은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지도 못할 정도로 그에게 컸다. 다른 이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그는 뮌제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뮌제를 사랑해 마지않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은 그녀의 죽음을 덮고 그녀의 자리에 올랐다. 새 공작에게 뮌제의 죽음이 조금도 수상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의 답이 황당했다.

‘수상하지 않다. 아리오의 왕자 따위가 감히 전 공작의 별세에 섣부른 의혹을 남기지 말라.’

새 공작은 뮌제의 밑에서 숨죽이던 호랑이 새끼였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맞지, 그거. 그 새끼…….”

제이는 허리띠에 걸고 다니는 작은 열쇠 꾸러미를 들어, 책상 첫째 서랍을 열었다.

잘그락.

허리가 무거워졌다. 조심스럽게 든 종이에는 구겨진 자국이 아직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해.

거기서 끝났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는 눈을 찌푸리고 끝까지 읽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해. 윌리엄. 모든 게 미안해. 내가 죽더라도 꼭 되돌릴게.

윌리엄. 뮌제의 뒤를 이어 오른 새 로헤올 공작의 이름이다.

이걸 찾은 건 뮌제가 죽은 후였다. 어떤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이 서신이 무어냐 하며 먼저 뜯어 보았지만, 봉투에 들어 있던 건 이 작은 쪽지 하나였다. 간단한 줄글. 읽어 보니 수신인은 그가 아니라 새 공작이었다.

수신자에게 응당 전해 주어야 했기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제이는 그것을 도서실 구석에 마련된 휴지통에서 집어 들었다. 구겨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참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해. 윌리엄.

제이는 이 작은 서신을 붙잡고 그날 숨죽여 울었다.

이 후레자식은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은 유일하게 이 새끼에게만 사랑한다고 해.

죽은 사람으로부터의 고백은 그의 마음을 철저하게 쥐었다. 그의 첫 평온. 첫 평화. 첫 보호.

내가 비로소 알 수 있었던 따뜻한 세계에서 어미 새와도 같던 당신. 내가 억울하게 죽었을지도 모르는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는 그때의 그 울음, 그 절망적인 기분을 떠올리며 입을 열어 지금 속삭였다. 떨렸다.

“로헤올 공작.”

당신.

“뮌제.”

차라리 내 누이였으면 좋겠던 당신.

“그렇게 가면 안 됐어. 알아?”

왕좌에 대한 욕심은 지금도 없는데, 이곳은 여전히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걸러지지 않은 적의를 다시 받기 시작하니 뮌제가 더 간절해졌다. 못난 의지였다.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아직도 짐을 지게 하려고 하는 멍청한 그리움 같은.

그러나 그 적의가 아니더라도 뮌제는 매일같이 그리운 사람이었다.

“내가 한 번이라도 당신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그에게 항상 해 주었던 것처럼, 그가 그녀에게 한 번이라도 위로를 해 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당신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2년이야.

사랑에 미친 황제와 권력에 미친 동생에게 살해당한 지 이미 2년.

* * *

서점에 들어온 그를 본 위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클라크의 앞섶에 매듭을 짓고 있었다. 외출을 하려던 건가.

“손님이세요? 그런데 책 안 팝니다…….”

엘르시어는 또 저를 잊어버리고 삭제해 버린 것에 대해서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지난 세 달간 올 때마다 겪었다. 엘르시어는 위즈처럼 매일 머리를 비우는 습관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접니다. 엘르시어. 은여우단 단장. 편지.”

“아, 예…….”

웅얼웅얼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 모이만큼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되살리려고 해도 서로 머리가 복잡해질 뿐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 반복되자 이제 슬슬 기분이 묘해지기까지 했다.

그는 이만 포기하고 용건을 입에 담았다.

“책을 읽고 싶은데. 외출하는 길이었다면 다음에 오겠습니다.”

“아, 그러실 것까지야. 독서는 좋은 일입니다. 의자는 거기에 있고, 책은 저기서 아무거나 들고 오세요. 장갑은 끼셔도 되고 안 끼셔도 되고. 차 마시고 싶으시면 부엌은 저쪽. 술 마시고 싶으시면 이거 드시고. 잔은 부엌에서. 화장실은 저쪽입니다.”

단숨에 안내를 끝낸 위즈는 카운터 아래로 사라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간식거리를 챙기는 모양인지라 그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들을 향했다.

책을 골라 온 그는 카운터 바깥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흰색의 윈저체어를 카운터 앞까지 끌어왔다.

앉는 부분이 높아서 카운터를 책상 삼아 편한 독서가 가능했다. 현장 독서를 원하시는 손님을 위하여 주문 제작한 의자라고. 카운터도 마찬가지로, 앉을 때 다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아랫부분이 평범한 책상처럼 쑥 들어가 있었다.

이래서야 서점이라기보다는 도서관이나 다름없다.

그는 새삼스럽게 서점 내부를 훑어보고 의자에 앉았다.

클라크 천이 몸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탕 같은 것을 감싼 포장지가 바스락바스락 구겨지는 소리도. 그는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를 들으며, 제목만 소문으로 듣고 여태 실제로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던 책을 폈다.

본문이 시작되는 내지는 색이 바래 있었다. 툭 떨어져서 번진 물자국이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다.

……눈물인가. 이것과 비슷한 자국을 몇 달 전에 보았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카운터 밑에서 간식을 고르고 있을 위즈에게 갔다가 책으로 돌아왔다.

몇 장을 읽었을 때 그녀는 일어났다.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를 꽉 닫는 그녀에게 그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예?”

생생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방금 읽은 문장을 다시 읽어 이해한 뒤에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서야 대답했다.

“술.”

“아.”

들어왔을 때부터 맡은 술 냄새는 역할 정도였다. 카운터 위의 술병은 여덟 병. 병수도 상당하지만, 술 자체도 도수가 높아서 웬만한 이들은 시도도 못 하는 술이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주당도 취해서 정신을 놓았을 정도. 위즈가 홀로 마셨다면 이미 기절해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크게 취한 것 같지도, 졸린 것 같지도 않았다. 보이는 건 오로지 피로.

아주 지독한.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그를 응시하던 위즈는 문득 웃었다.

“미안해서요. 아주 미안해서.”

목소리가 울컥 솟아 나왔다. 잔잔했다. 떨리지도 흐리지도 않고 또렷한데, 어떤 파동을 보는 것처럼 고요하게 퍼졌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시야 대부분에 그가 차 있을 위즈는 계속 말했다.

“죽은 사람에게도 미안하고, 죽지 않은 사람에게도 미안하고, 죽었다고도 못하고 살았다고도 못할 사람에게도 미안하고.”

“…….”

“또, 그립고…….”

숨소리가 잠시 흘렀다. 그의 손이 넘기는 책장 소리도 팔락, 새었다.

잠시 후 위즈는 도드라지게 갈라진 웃음을 흐느꼈다.

“삼 년 전의 오늘은 다 같이 모여 그럭저럭 즐거웠거든요.”

“…….”

“삼 년 전의 내 생일에.”

엘르시어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 호흡이다.

술 냄새와 책 냄새에 무뎌졌던 머리가 찬물 맞은 것처럼 깨어날 수 있었다. 위즈는 그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낮게 웃었다. 차라리 흐느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아닌 척해도 취한 걸까. 여태 그녀는 제 일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기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었다.

그는 벽에 걸린 작은 시계를 확인했다.

생일이라 하는 오늘은, 날이 끝나기까지 겨우 오 분여가 남았을 뿐이다.

홀로 맞이하고 홀로 끝낼 작정이었나.

“챙길 가치도 없는 탄생인데도요.”

그의 눈살이 멈칫 움직였다. 기묘하게도 이제야 의문이 들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모든 말들은 과연 주정이 맞나. 음성이 현실적으로 또렷하고, 말에 조리가 있었다.

말없이 숨 쉬는 소리가 길어졌다. 다시 찾아온 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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