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내용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음.”
위즈의 눈동자에 드디어 그가 맺혔다.
그녀의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웠던지라 의미를 채 깨닫지 못한 엘르시어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위즈가 다시 책을 흔들었다.
“이런 쓰레기가 왕실 서고에 있다는 게 우스워서.”
어조는 조금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발한 것은 악의였다.
엘르시어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그는 악의를 이토록 평온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정치인인 몇몇 가주와 군주인 발롬브로사도 불편한 심기를 표현할 때는 이 정도로 평온하지 않았다.
위즈는 어깨를 떨어뜨리고 책장의 빈 자리에 책을 밀어 넣었다.
엘르시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일레인은 상당한 강자로 알고 있습니다.”
아티팩트로 나쁜 장난을 치지 않는 온건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일레인은 짓궂은 아티팩트를 설치하고 다니는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사를 제지하는 마법사에 가까웠다.
또한, 중앙탑 소속 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탑을 통해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그것은 독을 연구하는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마법과 마법사를 공부해야 하는 사람들도 읽었고, 엘르시어 그도 당연하게 읽었었다.
그런 활동도 약 2년 전부터 끊겨서, 지금은 생사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마법사가 그러하니 특별하게 수상히 여길 일은 아니었다.
엘르시어의 말에 위즈는 해맑게 동의했다.
“예. 그렇지요.”
“유용한 논문을 많이 냈고, 당신이 들고 있는 그것도 상당히 깊게 연구한 논문의 원본입니다.”
“예, 그렇지요.”
같은 대답이 나왔다.
엘르시어의 입가에 어정쩡한 미소가 걸렸다.
위즈는 그새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도, 위즈도.
그녀는 그를 그저 바라보는 것 같지 않았다. 샅샅이 살핀다는 느낌이었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이 순간 실로 강렬했다. 신분 차가 있어 본디 이래서는 아니 되지만, 엘르시어는 웃는 얼굴로 묵묵히 허락했다.
묘한 정적 속, 두 남녀는 석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한참 후 위즈의 눈이 울음을 머금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녀의 고개가 떨어졌다. 입술을 조금 비죽거리던 그녀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 은발만 떠올려도 화가 납니다.”
엘르시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전의 침묵이 몹시도 기묘했기 때문이다. 침묵 속의 위즈가 몹시, 기이했기 때문이다.
몇 박자를 놓치고 나서 그는 위즈가 일레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 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녀와 만난 적이 있다는 건가요?”
“예. 그 여자, 제가 읽고 싶었던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 앞에서 그걸 불태우고 도망쳤거든요. 온건은 개뿔이. 제가 여태 살면서 그만큼 누군가에게 당해 본 건 몇 번 없습니다.”
“…….”
위즈가 남에게 당하지 않는 대신, 남이 위즈에게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나.
아까 본 탑주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자연스러운 연상이었다.
“하지만 정말, 제 사감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 논문은 최악입니다.”
“그 이유는.”
부탑주였던 학자의 말이다. 화자가 위즈라 하더라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위즈는 고개를 움찔움찔 움직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이걸 완성하기까지 사람 몇을 죽였거든요.”
죽음. 자연사도 아닌 살해를 말함에 있어 위즈는 여전히 담담했다.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는 눈길만이 조금 다르다.
오랜 기간 온건한 마법사로 알려져 있던 자를 고발하는데도 두려움 한 조각 느껴지지 않았다.
고발은 이어졌다.
“그 여자가 아리오 출신이라고 다른 국가 사람을 죽였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아리오 출신만 골라 죽였습니다.”
“…….”
“그리 악독하게 이룩한 성과인지라 그 마법사 관련해서는 마음을 못 놓습니다.”
“…….”
“어쨌든, 이건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다가 버린 책인데 아리오 왕실에 흘러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티팩트이니 여기에 두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예?”
그런 말을 몹시도 태연하게 했기 때문에, 엘르시어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아티팩트?
경악한 시선을 받은 위즈는 길게 늘어져 있는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 휘감기다 만 보석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격식에 맞게 차려입은 입성의 화려함이 이제야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내내 보고 있던 화려함인데도 미시감이 든다.
비로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위즈는 눈을 찡긋거릴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어색하게 눈웃음을 보이고는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전 이제 가 보겠습니다. 제게 필요한 책은 없는 것 같군요.”
“아니, 잠시만. 위즈 씨. 이게 아티팩트라고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위즈는 확신에 찬 얼굴로 빙긋 웃었다.
“예. 제가 직접 당했었거든요. 독침이 나오니 조심하세요.”
“…….”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이걸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걸 일레인 옆에 버리고 왔었거든요.”
* * *
서점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은 위즈는 곧바로 손님을 맞이했다.
용사였다.
위즈는 한동안 쇼리를 응시했는데, 그 시선을 받는 쇼리는 그녀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님이신가요? 책 안 파는데.”
“……이제 좀 외워라! 어떻게 된 자식이 사람을 수백 번을 봐도 못 외워?!”
그 울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품한 위즈는 눈가를 검지로 쓱 닦았다.
흐리게 번지던 시선이 똑바로 돌아왔다 싶을 때쯤 쇼리는 다시 차근차근히 설명했다.
“내 이름은 쇼리.”
“아하, 쇼케이스 씨.”
“쇼리.”
“네, 쇼핑 씨.”
“……아비게일에게 고백하고 싶어 하는 쇼리.”
“아아, 앞날 깜깜한데도 굳이 시도하고 싶어 하시는 그 쇼핑 씨?”
“…….”
죽이고 싶다.
깐죽거리는 위즈에게 날릴 물건이 손에 없었다. 아, 제발 저 자식의 뒤통수를 한 대만 날리고 싶어. 딱 한 대만이라도 좋다. 손님만 없었다면 어서 달려가서, 저 뒤통수에다 꽂아 넣을 꽃이라도 사 왔을 텐데.
위즈의 깐족거림에 날아가 버릴 뻔했던 정신을 잡아 챙겼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으, 후으으. 그동안 위즈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길게 한숨 쉰 뒤 입을 열었다.
“너희 서점을 찾으시는 분이 계셔서 모셔 왔어.”
“손님?”
“접니다.”
쇼리 뒤로 나타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위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응이 평범하지는 않았다. 쇼리는 드물게도 그녀를 걱정하게 되어 상냥하게 물었다.
“있어 줄까?”
“예? 아니, 아는 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인사받을 일은 아니야. 그럼 간다.”
“살펴 가세요. 앞날 깜깜한데도 굳이 시도하고 싶어 하시는 그 쇼핑 씨.”
“…….”
죽일까.
쇼리는 파들파들 떨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다 이를 악물었다. 화내 봤자 지치고 피폐해지는 건 이쪽이다. 그는 결국 말없이 서점을 나갔다.
그런 쇼리를 딱하게 여긴 사람은 당연히 위즈가 아니라 탑주였다. 할 말을 잃고 서점의 문을 돌아보던 노인이 물었다.
“……이러고 사십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온느발레어로 대꾸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온느발레어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노인은 쇼리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았다.
“앉으시지요.”
위즈는 카운터 옆에 있는 의자를 권하고 일단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탑주는 이 말도 안 되는 서점을 훑어보느라 의자에 앉을 정신이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차마 허락받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카운터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게 전부지만. 그래도 가늠이 되었다.
위즈가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희귀 서적.
이 서점에 있는 책은 그가 파악하고 있는 책들의 권수보다 적다.
훨씬.
무진장 훨씬.
그리고 그가 아는 이 여성은 필요 없는 책은 버리거나 태우는 식으로 처분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서적의 희귀성이나 역사성이 아니었다. 노인은 간소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위즈에게 파들파들 떨며 물었다.
“책들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왜 이것밖에 없습니까?”
“아, 어…….”
불안하게 왜 머뭇거려!
“태웠습니까? 버렸습니까? 어디 물 말아 먹었습니까? 팔아 버렸어?”
“음. 알아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처분한 책은 한 권도 없는 거지요?”
“탑주님이 알고 계시는 책 중에서요?”
질문 한 줄에 순식간에 상상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탑주는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모르고 있는 책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전부 잘 있습니다. 아마도요. 이거, 여기요, 오신 김에.”
얼결에 종이봉투를 받긴 받았는데, 중간에 이상한 말이 들어갔다.
아마도?
아마도오오오?
학문적 가치가 엄청난 그 책들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인 게 분명했다.
그는 마땅히 기겁했다.
“아마도라니요!”
“지금 당장 눈 닿는 곳에는 없는데 잘 있을 겁, 잘 있습니다. 제 책이니까 제가 알아서 관리할게요.”
“야, 이런 이기적인 인간아!”
잠시 정신이 자리를 비운 탓에 그의 만용이 올라왔다. 바람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사라진 만용이었다. 노인은 정신을 차렸다. 겁을 먹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시군요.”
순식간에 말이 괴상해졌다. 위즈가 그를 보며 식은 눈을 했기 때문에 몹시 민망해졌다.
탑주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내려 종이봉투를 열었다. 두툼한 종이 뭉치는 검은 실로 엮여 있었는데 맨 앞표지에는 근사한 필치로 제목이 적혀 있었다. 논문은 여전히 온느발레어.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신하건대 내용도 아주 근사하리라.
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 못 참고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연구하는 분야가 달랐다.
그 얼굴을 보던 위즈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바로 안 돌아가시고?”
“세상 돌아가는 깐은, 좀 듣고 계시나 해서, 왔습니다.”
봉투를 다시 갈무리하며 무심히 용건을 말했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 올려서 돌돌 말던 위즈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명언을 모르시나 보군요, 탑주님.”
“예?”
“그런 거 없어도 살기 편하면 장땡입니다.”
“…….”
탑주는 그녀를 노려보다시피 하며 응시했다.
돈만 충분히 쓴다면 얼마든지 세상사를 들을 수 있을 터. 정말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상하면 저 여유는 ‘이미 파악하고 있는 덕분에’ 나오는 여유일 수도 있었다.
위즈는 그가 만나 온 사람 중에서도 손꼽히도록 냉철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냉철했다. 아무리 이 꼴로 살고 있어도 그 이성이 아예 어디 갔으랴.
묶은 머리에서 손을 내리며 위즈가 물었다.
“그런데 왜요. 온느발레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온느발레라기보다는 누구의 신변과 관련이 있지요. 볼모로 잡혀 있던 아리오의 왕자가 귀국했지 않습니까.”
“예. 얼마 전에 축제도 있었고.”
“그가 어쩌다 귀국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아리오 왕실이 힘을 쓴 것도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어느 전 공작의 죽음을 캐려고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군요. 오, 멋져라. 높은 분들은 참 재미있는 일을 하시는구나.”
입을 벌리고 양손으로 뺨을 감싼 그녀는, 표정만은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다. 탑주에게는 몹시 가증스러워 보이는 게 문제였다.
순식간에 탑주의 표정이 더러워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용건이 남아 있었다. 빨리 끝내고 빨리 꺼지자. 일신의 평안을 지키는 길이었다. 노인은 밭은 헛기침을 몇 번 하여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음성은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왕자뿐만이 아닙니다.”
“오.”
“그분.”
위즈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감싼 뺨을 손끝으로 더듬는 장난에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기다리다가 탑주는 다시 말했다.
“전 공작의 오랜 친구분은 전 공작을 찾고 있습니다.”
“…….”
“정확히는, 살아 있는 전 공작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