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전하. 송구하지만.”
“응? 뭔가?”
나이 차가 상당한데도 발롬브로사는 엘르시어를 신뢰하는 편이었다. 사실 현 세 기사단의 단장들 모두 그가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는 흔쾌하게 고개를 들었다. 물론 아직 짜증은 가시지 않았다.
엘르시어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탑주는 아마 오늘 중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위즈 양을 그때 함께 출궁시키면 되겠습니까?”
“아, 그렇군. 그 아가씨는 내일까지 지내고 모레 나가는 걸로 알고 있겠군.”
“…….”
“음……. 예정대로 모레 나가게 하게. 빚을 지게 해 두는 것도 좋겠지. 서고를 열면 그 아가씨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더 쉽게 보여 주지 않겠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 종잡을 수 없는 여자가 과연 ‘빚’이라는 지각은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부하들부터 시작해서 그까지 신세를 많이 졌고, 반대할 이유도 그다지 없었다. 엘르시어는 묵묵히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아직 열 받아 있는 군주에게 치하를 받고 퇴실했다.
문 앞에 서서 아주 잠깐 고민했다. 짧은 숙고였다. 결론을 내린 그는 문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위즈의 행선지를 혹 아느냐 물었다.
* * *
시종은 위즈가 서고에 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안내를 위해 다른 시종이 따라갔다고.
서고가 허락된 이후 식사도 거부하며 독서에 몰두하고 있다는 보고는 듣고 있었다. 그때마다 엘르시어는 그저 넘겼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여자가 학구열에 불타는 모습에 대해 큰 감정을 느낄 일이 없으므로.
지금도 그랬다.
그는 별다른 경계 없이 서고로 향했다.
그래서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서고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욤……, 헤 쇼탕바, 라흐 레쇼!”
엘르시어는 잠시간 저 소리가 무엇이냐 하다가, 온느발레의 언어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언성은 그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높았다.
높으나, 조금 전 저 음성이 무어라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듣고 흘렸던 탓이다. 아리오의 왕궁에서 온느발레어로 싸우는 사람을 경계하고 다닐 일이 얼마나 있겠나. 하여 잘잘못 따질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과 오 분여 전까지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탑주의 음성이었다. 음절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은. 한데 저걸 놓쳤다.
그는 이파리 무성한 나무 울타리 길모퉁이를 돌지 않고 멈추어 섰다.
“해서.”
탑주와 저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사람으로 확률이 가장 높은 이는 당연히 위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런데도 엘르시어는 멈칫했다.
위즈의 목소리가 문제였는지, 그녀가 쓰는 언어가 문제였는지, 혹은, 저렇게 대꾸한 위즈의 존재 자체가 문제였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유도 모르고 그는 약간 동요했다.
위즈는 아리오어로 분명하게 목소리를 발했다.
“저도 사랑한다니까요.”
“……므아 피스통!”
말 안 듣고 뭐하는 거냐는 항의.
“그럼요. 알아요. 탑주님도 저를 사랑하시는 거.”
“어흐흐흐.”
이건 단순한 울먹임.
“젠 푸흐 콘셉……, 젠 푸흐.”
콘셉트를 잘못 잡았다니까. 잘못 잡았어.
“감사해라. 저도 탑주님의 행운을 빕니다. 오래오래 사세요.”
“으아아……!”
……대화가 여태 이런 식이었다면 탑주의 언성이 높아질 만도 했다. 대화가 조금도 이어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각설하고, 탑주가 한 말은 짧고 간단했지만 고민해 볼 여지가 있었다.
어제 탑주는 도착하자마자 위즈에게 화를 낼 때 아리오어로 했다. 보고 받은 그 발언은 엘르시어가 이해하기에 훨씬 명료했다. 하여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겹친다는 것은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콘셉트라 하는 그 단어.
“그래서, 하여튼, 하여튼요, 탑주님. 치매 위험은 한동안 없을 겁니다. 탑주님을 향한 제 마음이 느껴지셨나요?”
“엿 먹어라, 탑주 이 할아범아. 두 번 먹어, 세 번 먹어, 계속 처먹어. 하는 그 마음 말씀하시는 겁니까?”
탑주는 한결 진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시작된 아리오어였다. 엘르시어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네니오. 탑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 말입니다.”
“거 진심이 튀어나와서 참 유감입니다 그래.”
“제 속에 잠재되어 있던 두 번째 인격이 갑자기 한 말일 뿐. 악마 새끼가 깨어나려 하는 것 같아요. 봉인이 깨지려 하나 봅니다. 피하십시오.”
“아흐…….”
탑주의 묘하게 떨리는 신음이 들렸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끼익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엘르시어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서고 앞에 서 있는 왕궁 수비대 소속 병사가 보였다. 사람을 물리지도 않고 앞에서 떠들었나.
그는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탑주다.
어깨가 축 늘어진 게 보였다.
엘르시어는 공감 능력이 약간 떨어지긴 하나 그렇다고 하여 극도로 낮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저 명석한 노인의 현재 상태를 이해했다. 이해했을뿐더러 일정 부분 공감하기까지 했다. 그의 입에서 툭 떨어지는 숨이 흘러나왔다.
은여우단의 단장은 탑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서고로 다가가자 병사가 경례 후 문을 열려고 했다. 엘르시어는 그를 만류하고 직접 열었다. 기름이 부족한지 손바닥으로 미는 문은 확실히 무거운 감이 있었다.
들어간 엘르시어는 눈에 보이는 곳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위즈 씨?”
“네?”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책장 사이에서 위즈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낮게 묶인 갈색 머리채가 떨어졌다.
그를 본 위즈는 눈을 깜박이더니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그녀의 손에는 서책이 들려 있었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말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엘르시어는 묵묵히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곧 그녀가 빙긋 웃었다.
“서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위즈는 능청스럽게 인사하고 다시 책장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엘르시어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새 책을 펴서 읽고 있는 위즈를 잠시 쳐다보다가, 그는 옅게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당신이 내일모레 궁을 떠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한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위즈는 심각하게 인상을 썼다.
“어……. 절 아십니까?”
“…….”
다니엘이 미니에게 괴로워하며 하소연하던 걸 지나가다 들은 바가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겠지.
수 초 전에 한 말을 잊거나(혹은 잊은 척 하거나), 어제 만난 사람을 잊거나(혹은 잊은 척 하거나), 사탕에 많은 것을 토해 내는 사람임을 애써 떠올리고 그는 기막힘을 삼켰다.
진실이 어떻든지 간에 지금은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해서 신문실에서 위즈를 이해시키려 채택했던 방법을 다시 쓰기로 했다.
“당신이 탑주에게. 서신을 써서 보낼 때. 앞에 있었어요.”
“음.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은여우단의 탑은 기억합니까?”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대답에 대놓고 성의가 없다.
그새 고개를 내린 위즈는 질의 내내 책만 보고 있었다.
읽는 게 더 급하다는 저 태도는 그녀가 부탑주였던 학자임을 감안하면 이해할 만했다.
다른 때 같으면 지적했을 그는 그녀의 무례를 보지 못한 척하기로 했다. 왕도 자비를 베푼 위즈를 배려치 않고 찾아온 사람은 그였다.
엘르시어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왕의 배려를 전달하는 건 끝났으나, 물을 것이,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그 짧은 시간에 책장은 두 번 넘어갔다. 엘르시어는 짧은 호흡을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탑주와 함께 나가려 하지 않는군요.”
“음. 탑주님은 사람들 눈에 최대한 안 띄시는 게 좋을 테니까요. 바로 문을 나가서 돌아가시지 않을까요?”
“그럼 당신은.”
“책과 탑주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저는 책입니다.”
식음도 물리고 서고에 박혀 있으려 하였던 것이 이 발언의 근거가 되었다.
언행으로 보이는 소신이 하나같다. 그는 무심코 헛웃음을 지었다.
부탑주들은 원래 다 이리 완고하게 의뭉스러울까.
탑주가 자부심과 아집에 사로잡힌 학자 혹은 연륜이 뜨문뜨문 쌓인 정치가라고 한다면, 진실로 ‘순수한’ 사람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위즈는 의도를 가지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는 것에 익숙한 가주에 가까웠다.
그 예로 그는 조금 전의 일을 상기했다.
위즈는 온느발레어를 안다.
그가 다니엘의 안내로 처음 위즈의 서점에서 책을 보았던 날, 그녀가 펼쳐 주었던 첫 번째 책이 온느발레어로 된 책이었다. 지금 읽는 책도 온느발레의 책인 것처럼 보였다. 금박으로 새겨진 《덴트 젠비세르》. 짐승의 이빨.
엘르시어는 물끄러미 그녀를 살폈다.
이 여자가 전 부탑주인 것을 안 이상 아리오의 군주는 위즈를 어떤 식으로든 시선 하에 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앞뒤 모두를 뒤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하여 그는 물었다.
“조금 전, 왜 탑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하였습니까.”
“들으셨습니까?”
“오다가 우연히.”
“여긴 아리오잖아요.”
“…….”
이해할 수 없었다.
속히, 아주 가벼이 나온 대답인데도.
책장이 넘어갔다. 그 손바닥으로 종이를 쓸어 잔잔하게 만든 뒤 다시 눈동자가 움직였다.
위즈는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온느발레 말로 남들 들어도 된다는 것처럼 언성 높일 내용이면 아리오 말로 해도 괜찮을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라면 굳이 외국어를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여기는 아리오 왕궁이니까…….”
“…….”
“아리오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아리오를 사랑하는 분들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온느발레어를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을 앞에 두고 외국어로 떠드는 건 몰상식한 행동입니다.”
아무래도 병사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하게 들었다.
그녀가 소상히 밝히고 있는 속내는 그의 짐작보다 훨씬 사려 깊었다. 단순히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도, 사탕에 탑을 고발한 사람도 아닌 것처럼, 이 순간 위즈는 타인을 자기 방식대로라도 생각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능청맞게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누가 그랬는데, 저는 뒷담을 참 잘한대요.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으면서 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쓰레기로 만든대요.”
“…….”
“그래서인지 제가 지금 탑주님을 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았다 하지만, 에이, 설마요.”
“하하…….”
그는 굉장히 작위적인 작은 웃음을 흘렸다.
목이 막혔다.
정말 이 사람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타고난 수완일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 인지도 못 하고 있는. 그럼에도,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는 그 자신도 의미 모르는 부정을 하며 위즈를 빤히 응시했다.
여태까지 그의 짧은 생에서 이만큼 앞뒤 맞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범인凡人은 이해할 수 없는 천재.
세상의 상식이 부족한 괴짜.
세간의 시선은 생각하지 않고 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개인주의자, 혹은 이기주의자.
일의 경중을 판단하는 기준이 남다른 기인.
다 섞이면 재앙 같을 요소들이다. 하여 정말 재앙이 되어 그의 앞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엘르시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사이에도 종이 넘어가는 소리는 쉼이 없었다.
“음. 흠. 음.”
“…….”
“끝.”
간단한 선언과 함께 책이 덮였다.
왼손에 쥔 책이 유난히 커 보였다. 양장한 검은색의 뒤표지를 받치고 있는 네 손가락 끝에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에 시선이 갔다. 한 손으로 지탱하기에는 무거운 책이 맞다. 그럼에도 피가 몰려 붉어진 손끝을 제외하면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책장 사이로 몸을 돌리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물끄러미 책 모서리 즈음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책을 든 왼손을 위아래로 파도 타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약간 찌푸린 눈은 책을 떠나지 않아서, 그는 평온하게 지켜보았다. 흠, 하고 위즈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미련 남은 반응이다.
엘르시어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책에 문제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