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10)화 (10/120)

# 9화

“그 인증서와 증언의 신빙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안 보네. 그러니 보호 인증서가 귀하다고 하지. 인증서를 가진 자의 말이 곧 탑주의 말과 같다고 여겨지거든. 그런 인식이 있는 걸 자네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아주, 아아아주 오래전부터 있는 인식이니까 말일세.”

보호 인증서를 가지고 있는 위즈가 증언했을 때부터 중앙탑은 이 협박 혹은 외교에서 철저하게 약자였다. 철저하게? 아니, 그 말도 틀리다. 절대적인 약자다.

왕은 웃었다. 자세가 직전보다 늘어졌다. 탑주의 콧살이 움찔 움직였으나 외교적 결례를 지적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야지. 그러나 아직 남았다. 쐐기는 중요하다. 발롬브로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 그림이 온느발레에서 그려졌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마법사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거든. 그 아가씨 말로는.”

“…….”

“그래서 온느발레에 항의해 볼까? 그러면서, 중앙탑이 온느발레를 저격했다고 말 좀 흘려 주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중앙탑이 곤란해질 것이다. 작금의 상황에 비할 수도 없이 곤란해질 것이다.

온느발레는 불쾌감을 표하며 중앙탑에 항의할 테고, 무언가, 예를 들면 지식이나 지식인의 망명 같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온느발레의 현 황제는 상당한 강성인지라 더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지도 몰랐다.

그 고귀한 여성의 정치적 행보는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없었다. 그 젊은 황제는 자신만만하고 영리하나 결코 상식적이지 않았다. 선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온느발레의 방패로 불린 젊은 공작을 그런 식으로 건드리는 일도 하지 않았을 터.

탑주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숨을 꿀꺽 삼켰다.

위즈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느발레를 입에 담았는지 모르겠다. 잘못해서 온느발레와 정말 엮이게 되면 가장 난처해지는 건 중앙탑이 결코 아닌데. 아, 이 미친 인간아.

끙끙 앓던 노인은 결국 입을 열었다.

“무얼 원하십니까.”

왕이 원한 물음이 아주 쉽게 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나 막상 겪으니 재미있었다.

발롬브로사는 웃었다.

* * *

협상이라는 이름의 협박은 이틀에 걸쳐 잘 마무리되었다.

어제 탑주가 도착. 오늘 협상이 최종 마무리. 전에 없는 빠르기로 나온 성과 덕분에 발롬브로사는 몹시 행복했다.

의견을 조정하고 잠시의 휴식을 가진 뒤에 조율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했다.

문서를 작성하러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탑주가 요청한 것이 하나 있었다.

위즈를 불러 달라는 요청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발롬브로사는 의아해하면서도 윤허했다. 그의 시종이 왕실 서고로 향했다.

이것저것 교정한 초안을 옆에 놓고 먼저 발롬브로사가 사본을 작성했다. 베껴 쓰고 검토하는 데 이십 분 정도 걸렸다. 만족스럽게 미소하고 펜을 내려놓은 그는 초안을 탑주에게 건넸다. 탑주는 한 차례 옅은 호흡 소리를 내더니 펜을 들었다.

턱을 괴고 지켜보고 있자니 느릿느릿 진행해 나가던 서명이 끝났다.

“다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본을 교환하여 각자 내용을 살폈다. 오류가 없었기에 상대가 수사한 사본에 서명했다. 그리고 두 사본을 나란히 늘어놓고 2차 확인을 한 뒤, 자신이 수사한 사본에 서명했다. 이제 양 사본에는 두 사람의 서명이 모두 들어 있었다. 왕과 탑주는 다시 사본을 주고받았다.

왕이 베껴 쓴 사본은 탑주에게, 탑주가 베껴 쓴 사본은 왕에게.

발롬브로사는 정말 마지막 절차로 자신이 들고 있는 문서를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르시어에게 건넸다.

중앙탑과의 협상 내용에는 향후 은여우단에게도 굉장히 유용하게 쓰일 만한 조항들이 있어서 문건을 작성하는 자리에는 엘르시어도 들어 있었다.

중앙탑과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과 그에 따른 협상을 왕이 몰래 처리했다는 것을 대귀족들이 알면 난리를 칠 터.

그렇지 않아도 권리가 많은 은여우단에게 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대할 것을 왕은 확신하고 있었다.

왕실로부터 월급을 지급받는 공무원 집단은 은여우단을 위시하여 근위대, 왕궁 수비대, 수도 수비대, 왕실 소속의 도시 수비대 등 군사 집단과, 첩보 기관인 은늑대관, 의료 기관인 백독수리관 뿐이고, 그중 기사단은 은여우단과 근위대와 은늑대관 뿐이었다.

이 기사단들의 경우 그들의 수장으로 임명된 이들이 워낙 가문 튼튼한 가주이거나 가주 후계자인지라 경계를 샀다. 은여우단과 은늑대관의 수장은 심지어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청년들이기까지 하니 더더욱.

“…….”

한동안 가만히 문서를 읽던 엘르시어가 고개를 들었다.

왕이 종이를 돌려받으며 만족하느냐는 물음의 의미로 눈썹을 치켜뜨자, 엘르시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만족했다는 뜻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작성을 시작하기 전 위즈를 불러 대기시키도록 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오른 건 그때였다. 기밀 협정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노인은 위즈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였다.

결국 발롬브로사가 먼저 기억을 일깨워 주기로 했다.

“이보게.”

“예.”

“그 아가씨. 아까 부르지 않았나.”

“그랬지요.”

“기다린 지 한참 되었네. 다리 부러지겠다.”

탑주는 대꾸 없이 문서를 두 번 접어 봉투에 넣었다. 부러지기는커녕 음흉하게 웃으며 기꺼이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아마도.

노인은 몹시 우울했다. 그나마 왕에게 한 방 먹일 예정이라 이 정도의 우울함이다. 그 기대도 없었다면 그는 정말이지 미친 척하고 위즈를 아예 탑에서 제명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면 위즈에게 분명히 지독한 타격이 간다. 그러나 중앙탑에도 타격이 온다.

위즈는 그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의 연구 분야에 있어서는 유명했고, 그녀의 논문들도 하나같이 놀라웠다. 단언컨대 공부에는 영 관심 없는 삼척동자라도 한 번쯤은 그녀의 학자명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앙탑의 목록에는 있으나 중앙탑이 소유치 못하고 있는 서적, 목록에도 없는 희귀한 서적들을 상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고로…….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예전에 제명했으리라.

약점을 잡힌 자는 이리도 약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괜찮다면 여기로 입실토록 해도 되겠습니까?”

“뭘 하려고?”

“간단한……, 대화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말이 아니라 주먹이 날아갈 것 같은 상황이다. 중앙탑 입장에서는 위즈가 배신자, 멍청이 정도일 테니.

그러나 탑주의 표정이 진중했던 탓에 발롬브로사는 떨떠름하게 허락했다.

구석에 서 있던 시종장에게 눈짓하자 그가 문을 열고 나가 위즈를 데리고 들어왔다.

얌전히 입실한 위즈는 회의실을 둘러보더니 맹하게 미소했다. 발롬브로사가 왕인 것이야 당연하게 모르겠지만, 서고를 안내할 때 보았던 그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엘르시어도 못 알아보는 것 같다. 그녀가 알아보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탑주였다.

발롬브로사는 참으로 흥미로운 기억력이 아닌가 하며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을 모를 위즈는 천연덕스럽게 탑주에게 물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주십시오.”

무얼 주라는 말이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위즈는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오며 클라크 안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탑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한 줄의 선언을 위해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설토가 있어도 그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실은. 위즈는 탑이 아예 상황을 헤쳐 나오지도 못하도록 못 박아 고발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중앙탑의 많은 기밀을 알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앙탑이 십 년 안에 와해되게 만들 능력도 머리도 가지고 있었다. 연구자가 탑에 소속되어 학자가 되는 순간 탑 소속 마법사가 학자에게 마법을 거는 까닭이 무엇일 것 같나.

그 마법이 이상하게도 위즈에게만은 통하지 않음이 유감이다.

진심으로. 유감이다.

그의 내민 손바닥에 위즈가 브로치를 내려놓았다. 붉은 보석이 박힌 그것은 이 세계에서 세 사람만이 가지는 상징이었다.

늙은 손이 오므라들어 브로치를 말아 쥐었다.

탑주는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부탑주에서 직위 해제하겠습니다. 부탑주로서 받던 모든 예우와 특권이 거둬지며, 의무도 함께 해제됩니다. 이의 있습니까?”

위즈가 싱글벙글 웃었다.

“없습니다.”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계획을 세웠을까.

위즈가 원하지 않는 지위를 그녀에게 억지로 떠넘겼을 때부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일은 중앙탑이 자초한 일이었다. 다시는 그녀를 압박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도록 일부러 일을 벌인 것일 테니.

“어……. 잠깐만.”

그때 왕이 어설프게 두 학자 사이의 분위기를 끊었다.

탑주는 그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왕에게 성공적으로 엿을 먹였음을 깨달았다.

꼬시다.

브로치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노인은 왼손으로 수염을 쓸었다. 어제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행복 비슷한 걸 느꼈다.

발롬브로사의 눈길이 멍하게 위즈를 향했다.

“저기, 아가씨가 뭐라고? 부……탑주? 부탑주? 그 부탑주? 중앙탑 부탑주?”

“전前 부탑주이지요.”

꽃송이가 환하게 피어나는 것처럼 위즈가 확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밝혀진 이 사실에는 엘르시어도 말을 잃었다. 두 아리오인의 반응을 본 탑주가 결국 끄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약 오르는 대소에 정신을 차린 발롬브로사는 탑주를 노려보았다. 이 약은 노친네가……!

그러자 탑주는 나이를 잊고 히죽 웃었다.

노인의 두 눈썹이 발랄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표정이다. 그것을 본 왕의 속은 제대로 뒤집혔다.

증언을 한 사람이 보호 인증서를 가진 부탑주라는 걸 사전에 알았다면, 협상에서 더, 더, 더 많이 얻어낼 수 있었다!

협상을 가장한 협박 내내 거의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탑주는 필시 위즈가 부탑주인 걸 알고 진행하는 협상보다야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뺏길 것이라면 최대한 덜 뺏기자는 속셈으로……, 아, 저 노친네가 진짜!

발롬브로사는 탑주와 위즈가 회의실에서 나가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마지막에 당한 놀림이 기억에 잘 남는 법이다. 아깝다. 정말이지 더럽게 아까웠다. 미리 알았으면 더 벗겨 먹을 수 있었는데.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중앙탑과의 협상에서 이번만큼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다시 오랴. 그는 훌륭한 왕이었고, 훌륭한 정치가였다. 그래서 종종 아쉬움과 깊은 후회에 잠길 때가 있었다. 작금의 순간도 그러했다.

부족한 정보로 인해 놓쳐 버린 이번 기회는 아마 그가 죽을 때까지 아쉬워할 일. 그 정도 무게의 일이었다.

열이 오른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그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경.”

“예. 전하.”

그리고 지금까지 중요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빼고 말하였던 위즈. 그 순진한 얼굴. 순진한 언행.

“저 아가씨, 부탑주나 되는 사람이, 사람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 하는 게 말이 돼? 나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네.”

정말이다. 내일모레면 환갑이 되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 나 여기 있다고 손수건을 흔들어서라도 시선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왕은 짜증스러운 심정을 더 털어놓았다.

“그리고 경이나 나 둘 중 한 명은 왕일 거라고 눈치채는 게 보통 아닌가? 여기 중앙궁이거든? 이번에 탑주랑 협상할 사람은 왕밖에 없었거든?”

“…….”

“그리고 말일세. 전부 말한 것처럼 굴더니 제공한 정보와 비슷한 급으로 중요한 부분은 말 안 한 것 보게. 세상에는 정말 믿을 사람이 없구먼.”

그 얼굴로 그 언행을 하니 잠시 만난 것뿐인데도 깜박 긴장을 풀어 버릴 정도였다. 발롬브로사는 이마를 짚었던 손의 손가락으로 슬슬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잠시 왕을 보던 엘르시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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