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9)화 (9/120)

# 8화

위즈에게 암호문을 그대로 한 부 더 베껴 쓰게 한 그는, 암호문을 보며 해석을 요구했다. 그녀가 하나하나 짚어 가며 암호를 해석해 나간 내용이 원문과 거의 같음을 확인하는 것까지 완료.

마지막으로 이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해독 열쇠를 쓰게 하여 그것을 참고하여 그 자리에서 그가 직접 암호문을 해독했다.

그녀의 이름으로 보내어 탑주를 설득해 낼 수 있는 편지는 암호문뿐인 것 같고, 그렇다면 암호문을 보낼 시에 생길지도 모를 사달은 최대한 차단했다. 은여우단에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암호문을 봉투에 담아 위즈에게 건넸다.

위즈는 반지를 봉투에 닿게 하고 중얼거렸다. 서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게 순조로운 듯 보였다.

문제는 그녀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배웅할 기사를 들여보내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신문실을 나왔을 때, 엘르시어는 관찰실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엄청난 곡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끼북끼북끼북이 발동!”

“나, 으흐흐흑, 배가, 배가, 그만 웃고 싶어……. 으흐흑.”

“끼북이. 턱, 턱이 아파. 으아아아.”

“끼북끼북끼북이 발동이래. 끼북끼북끼북이 바하하할, 으허흐흑, 동이래.”

“……으핫하하하하! 사, 살려줘……!”

“…….”

그는 착잡하게 걸음을 옮겼다.

* * *

탑주는 오늘 아침에 드디어 해독 열쇠를 모두 정리했다.

또 ‘오늘의 초콜릿 우유는 맛있었다.’를 스물아홉 줄의 암호로 늘려 놓았으면 이번에야말로 죽일 거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암호문을 읽어 내렸다.

그러다 해독 열쇠대로라면 딱히 줄 수가 압축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첫 줄의 인사말이 끝나고 둘째 줄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설마설마.

서신 중간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설마는 배반당했다. 여든세 살의 탑주는 편지에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목을 젖혔다.

이것은 위즈의 필체이고 위즈의 암호이며 위즈가 화자이긴 하지만 위즈가 쓴 내용이 아니다.

탑에서 제발 꺼져 주시라 했더니 탑을 팔아먹는구나.

지금의 위즈는 탑주에게든 학자에게든 천재 그 자체다. 하늘이 내린 재앙이야. 그녀 스스로 의도한 재앙이라서 더 소름이 끼쳤다.

위즈가 보낸 긴 편지를 마침내 다 해독한 탑주는 진심으로 울 뻔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암호문으로 보내면 어떡해. 받은 날로부터 벌써 이십팔 일이 지났다. 이십팔 일. 발음이 중요한 이십팔 일.

떨리는 심호흡을 몇 번 하여 최대한 마음을 비운 탑주는 침착하게, 아주 침착하게, 침착한데 이상하게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해독문을 적었다. 어라, 손이 마비된 것 같은데, 그냥 느낌일 뿐일까. 정말 마비된 건 호흡기일까. 숨쉬기가 어려웠다.

혈압 때문이었다.

탑주는 현재 탑에 머무르고 있는 부탑주들에게 해독문을 보이고 일을 상의했다.

이번에야말로 이 천재지변, 아니, 천재를 퇴치하러 가자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용사가 되려 하는 걸 탑주는 아쉬워하며 말렸다.

그리고 세 시간의 회의를 통해, 상황을 이리저리 해결하자고 의견을 정리했다.

회의의 말미에 두 부탑주는 탑주와 악수하며 행운을 빌었다. 탑주는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우선 위즈에게 기별을 보냈다. 그리고 후다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끝냈다.

중앙탑이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의 양은 상당한 편이었다.

학자들, 특히 마법이나 마법사들을 연구하는 학자 중에 마법사들과 좋은 관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있는 덕분이었다.

끼북이도 실은 탑주가 첫사랑이었던 친구 마법사로부터 얻어 낸 아티팩트였으며, 끼북이와 연동되어 탑주가 뿅 하고 나타날 수 있도록 한 텔레포트 목걸이도 그랬다.

탑주는 아리오 왕궁에 나타나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은여우단의 기사들은 직감했다. 위즈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일이 재미없어질 수도 있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위즈를 저희의 몸으로 가렸다. 일시적인 대책일 뿐이었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위즈는 멱을 잡혀 흔들리는 중이었다.

노인은 나이를 잊은 것처럼 활달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위즈는 흔들면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탑주가 달달 외쳤다.

“조심하라고! 조심하라고! 사탕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야, 이 인간아! 내가 말 했냐 안 했냐!”

“아우우우. 우우우아. 아우우우.”

“당신만 보면 내가 나이를 잊는다고! 체통이 뭐냐! 연륜이 뭐야! 내가 말했지! 콘셉트 그따위로 잡지 말라고!”

“우웨에에에.”

“토하는 척하지 마십시오! 으아아아. 으아아아! 제가, 제가……. 누누이……. 우리에게 피해는 주지 말라고…….”

탑주가 목멘 목소리로 떨며 말했다. 노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린 노인을 물끄러미 보던 위즈의 입이 열렸다.

“에에에웨우.”

“…….”

정적이 흘렀다.

……이 인간 그새 라임 맞추고 있었어!

그러나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은 탑주가 비명을 지르듯 위즈의 멱살을 다시 잡았기 때문이다. 주름이 진 손등에 핏줄이 섰다. 이제는 진심으로 말려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눈높이가 같은 위즈를 매섭게 노려보던 탑주는, 조금 전보다 완전히 다르게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당신에게 반성이나 후회는 바랄 수 없습니다만, 왜 애꿎은 중앙탑에 피해를 주냔 말입니다.”

조금 전의 멱살잡이는 보여 주기 위한 분노였다는 것처럼, 기세의 변화는 빨랐다. 위즈도 이제 황망한 소리 같은 건 내지 않았다.

말없이 탑주를 살피던 그녀는 잠시 후 옅은 한숨을 쉬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무얼요.”

“이제 연세가 연세이니, 치매 걸리지 않으시려면 복잡한 일도 좀 하시면서…….”

아, 설마. 아. 아. 야, 진짜, 제발.

불길한 예감이 든 탑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정치나 모험이요. 이제 아리오에게서 탑을 구해 내시면 됩니다. 판은 깔아 드렸어요. 조금 많이 수고했지만 괜찮습니다. 탑주님을 위해서라면. 탑주님의 고생이 제 행복인걸요.”

“…….”

위즈가 당당하게 든 엄지를 부러뜨리고 싶다.

이제 탑주는 다 포기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적어도 이번 일을 마무리 짓기 전까지는 절대 제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콘셉트. 말이 안 통해. 미치고 팔딱 뛰겠네.

그런 속내가 악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끄드득. 이 가는 소리였다.

보고 있던 기사들은 노인을 이해했다. 위즈가 혹시나 그들과 같은 소속이었으면 그들도 탑주처럼 속이 뒤집히는 일이 일상이었을 것을 안다. 같이 일하는 일이 없어서 실로 다행이었다.

진짜.

그들은 가까운 미래에 자신들이 탑주와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 *

아리오의 왕은 아리오를 도와준 참신한 바보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다.

혹시 의도한 것보다 더 큰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과 그의 손에서 흐름이 벗어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하여, 왕은 위즈를 통해 탑주를 불러내도록 명령했다.

어차피 그런 상황이니 탑주를 협박 테이블에, 아차차, 아니, 그러니까, 협상 테이블에 며칠 기분 좋게 앉혀 놓기 위해서는 위즈가 탑주의 곁에 있는 것이 좋다.

해서 그의 셋째 딸의 친구가 된 위즈를 탑주가 온 날부터 궁에 머무르도록 했다.

물론 셋째 딸은 제게 친구가 생긴 것을 모르고 있고, 위즈도 자신이 공주와 친구가 되었다는 걸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평민을 궁에 잠시라도 들이기 위한 명분만 만든 거다. 길어봤자 사흘 후에는 사라질 명분이었으므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왕은 협상이 진행될 동안 지루해할 위즈를 위해 왕실 서고를 자발적으로 개방했다.

그렇지 않아도 볼모로 갔던 아들이 귀국하여 기분이 영 좋지 않았던 참에, 일상에 활기를 준 일종의 은인에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책!”

와악 비명을 지르듯 그녀가 외쳤다. 자리에서 방방 뛰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들뜬 목소리였다.

몸소 위즈를 서고까지 안내한 왕은 흐뭇하게 미소했다. 위즈는 헥헥 숨 쉬며 들떠 하다 말고 왕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진짜 읽어도 됩니까?”

“그래.”

“전하 찬양. 세계 최고.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그러니까,”

“발롬브로사.”

“시발롬 씨. 감사드려요.”

“…….”

어쨌든 왕도 피해갈 수 없었다.

발롬브로사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뭐냐, 이건. 상당히 독특하다고 사전에 듣지 않았다면 화날 뻔했다.

그는 애써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지나가다 만난 지라 그저 지나가던 기사로 소개하고 말았지만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일개 학자와 더 엮일 의향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 발롬브로사는 어깨를 으쓱하고 서고를 나왔다. 중앙탑 탑주를 만나러 가는 길에 옆으로 샌 거라 조금 바삐 걸어야 마땅했다. 이런 기분 좋은 휴식 시간을 또 언제 갖겠냐며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왕의 일정은 항상 치밀하게 짜여 있고, 지금 농땡이를 치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잠이 더 부족해진다. 이왕 샌 김에 완벽하게 새는 상상을 하면서도 그의 걸음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결국 중앙궁의 알현실에 도착했다.

왕의 입실은 알림 없이 조용히 이루어졌다.

앉아 있던 탑주가 일어나 그에게 간소한 예를 갖추었다.

빌어먹을 노친네. 발롬브로사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온후한 척 웃으며 탑주의 인사를 받았다. 저보다 스무 살 정도 더 산 이 노인은 중앙탑을 대표한다는 자존심과 현세대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라는 자부심이 통통 튀었다.

수염을 묶은 리본은 이번에는 파란색 물방울무늬 리본이다.

차라리 마냥 근엄하면 좋겠는데 감수성은 또 얼마나 풍부한지, 정치 공작하기가 쉬운 듯하면서도 미치도록 난이도가 높았다.

툭하면 울려고 하거든.

탑주를 울렸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이 노인네는 필요할 시에는 저 울었다는 걸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문낼 인간이었다.

왕은 상석에 앉자마자 물었다.

“잘 지냈나? 이 년 만이던가. 드디어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저는 건강합니다. 전하께서는 무탈하셨습니까?”

“그렇지, 뭐.”

“유감입니다.”

언제 죽냐, 노친네. 너나 죽어라, 이 발롬브로사 같은 왕 자식아. 두 사람은 사이좋게 돌려 까기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기분은 적당히 더러워졌다.

서로 심호흡할 시간이었다. 잠시 차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작은 미소와 함께 발롬브로사가 물었다.

“그래서, 자, 여기 왜 앉아 있는지 알지?”

“글쎄, 모르겠습니다.”

“그 아가씨 서신에 부리나케 달려왔잖은가? 아, 부리나케는 아닌가. 보낸 지 한 달 정도 되었지. 암호가 그리도 어렵던가?”

“…….”

선공이 왔다.

그러나 탑주는 동요치 않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위즈 박사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천생 학자라서, 무슨 일이 있다 하면 달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와도 같고 저는 박사를 무리하게 내어놓고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아버지 정도 되는 입장이니 말입니다.”

“…….”

……설득력 있다.

위즈는 사탕 한 개로 탑을 고발하고 사탕 바구니로 탑주를 불러낸 사람이었다. 그런 건 어지간히 머리가 순진하지 않은 이상 못 할 일이다.

덧붙여, 체면이 있어 말은 못했지만 약간, 아주 약간 왜인지 충격이었던 시발롬 씨도 떠올랐다.

빌어먹을 노인네의 좋은 반격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위를 점할 쪽은 이쪽이다.

발롬브로사는 열 손가락 끄트머리를 사이사이 얽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렸다. 조금 다독거리며 해 줄까 했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이 노인이 얼씨구나 울기 전에 끝내야 하리라.

그의 입이 열렸다.

“더는 돌려 말하지 않겠네. 탑에서 관리가 어려운 아티팩트를 우리 아리오에 팔아넘겼다더군. 탑의 학자 하나를 잡아먹은 아티팩트를 말이야. 그것 때문에 우리 국민 열여덟 명이 사망했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물증도 없이 한 학자의 말뿐이지요.”

그렇겠지. 왕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오겠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비꼬듯 덧붙였다.

“그 귀하다는 탑주의 보호 인증서를 가지고 있는 학자의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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