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마법사들요? 전 그냥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한 겁니다. 연구하면서 알게 된 점들도 있고 체감한 것도 있고 해서.”
무어라 부정하려 했던 다니엘의 입은 미니에게 틀어 막혔다.
지금 무얼 하러 가는지도 묻지 않은 채로 사탕을 핥고 있는 위즈는 도무지 학자로 보이지 않았지만, 중앙탑은 원체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 많았다. 적어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널리 알려진 편견이었다.
미니는 입에 문 딸기 사탕을 깨물어 넘기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연구는 안 합니까?”
위즈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반문했다.
“연구요?”
“예.”
“탑주님이 제발 눈앞에서 꺼져 주기만 한다면 연구 안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막 우시던데요.”
“……예?”
전부 듣고 이해했다. 그러나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어설픈 반문만 하고 말았는데, 위즈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농담입니다. 연구 관련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지금 논문 집필 중입니다.”
“무언가 연구를 하려면 책이라든지, 물건이라든지, 답사라든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하지요. 아, 가게에 종이 같은 게 없어서요? 그래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음. 예. 실례되지 않는다면.”
“따로 연구실이 있습니다. 서점 지하에요.”
“오. 지하에…….”
아니, 아니다. 미니에게 시선을 받고 대화를 듣고 있던 다니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게 아니다. 그의 동료는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의 입이 달싹거리며 망설였다. 물어도, 되려나. 어쩌면 누구 한 명의 체면이 끝장날 것 같다는 직감이 드는데. 그러나 그의 호기심이 양심을 이겼다.
입이 결국 열렸다.
“저기, 연구 관련해서‘는’?”
“예? 아아. 탑주님이요? 제발 사라져 달라고 울긴 우셨습니다. 제 인증서에 눈물 자국도 남아 있어요.”
직감이 옳았다. 위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근엄한 탑주의 체면을 끝장냈다. 질문자는 이마를 짚었고, 미니는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 탄성을 흘렸다. 저런.
위즈가 몇 번 꺼내 들어야 했던 액자 속 내용물의 종이에는 약간 누런 기가 있었다. 그 누런 종이에 하얗게 번져 있는 물방울 자국 같은 것. 몹시 중요한 내용을 품고 있는 데다 액자에 보관 중이기까지 한 종이에 웬 물자국이냐며 약간 거슬렸던 바가 분명 있었다.
그런데 그게 탑주의 눈물 자국이었나…….
탑주가 측은해졌다.
* * *
다시 신문실에 들어간 위즈는 얌전하게 젤리를 먹었다.
오는 길에 사탕 두 개를 먹었음에도, 자리에 앉자마자 목에 걸고 있는 작은 주머니에서 더 작은 젤리 주머니를 꺼냈다. 정육면체의 작은 젤리는 곱게 물들어 상당히 좋은 때깔을 자랑했다.
오물오물 야무지게도 군것질을 하는 그녀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편의를 위해 신문실에는 앉혔으나 이번에는 엄연히 이쪽이 그녀에게 부탁하려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은여우단은 위즈가 호의를 베풀어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엘르시어가 부탁을 하는 사람의 예의를 위해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위즈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니엘이 신문실에 함께 들어와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다니엘은 멋지게 포장된 사탕 바구니를 두 손에 들고 있었다.
위즈가 입안의 젤리를 다 먹고 나자 엘르시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서신을 하나 써서 보내 주었으면 합니다.”
통성명도 없고, 사과도 없고, 인사도 없었다. 바뀐 것이라곤 존대 정도. 곧바로 나온 용건에 위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편지요?”
“중앙탑. 탑주에게.”
“아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멀뚱멀뚱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 방 안에서 다니엘의 존재 의의는 ‘서 있는 자체로 발하는 마음의 안정’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해서 그는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눈살을 멈칫 움직였다.
어라.
문득 든 의아함이었다.
위즈는 그를 봐도 봐도 알아보지를 못한다. 얼굴은 물론이요, 이름, 있었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한, 않는, 못, 않, 못……, 않는다.
잡동사니 골목의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라서, 며칠 전 그녀를 쓰러트렸던 용사가 다니엘의 감시 중 찾아왔을 때도 위즈는 용사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꽃다발로 뒤통수를 날린 일을 사과하자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어서 용사의 속을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탑주는 기억을 한다고?
책의 내용도 기억하고, 사탕 가게 위치도 기억하고, 사탕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기억하긴 한다만 그런 정보야 사람에 대한 게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 치고.
……어떻게? 왜?
매일 같이 머리를 비워도 중요한 것을 기억한다는 그녀의 발언이 떠올랐다. 탑주가 중요해서 기억하는 건가? 그러나 그런 것치고 위즈는 며칠 새 아무렇지도 않게 탑주를 수차례 엿 먹이고 깔아뭉갰는데.
그는 물끄러미 위즈를 관찰했다.
그러고 보면 단순히 ‘기억력 나쁘지만 순수한 바보’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기억 못 하는 것들에 맥락이 없다. 얼굴과 이름을 연결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있었던 일도 기억 못하고. 그런가 하면 이름 한 번 무진장 이상한 《리리리리 마법사 뾰로롱》의 발간일은 기억하고 있고. 이건 기억력에 맥락이 없는 건가, 그녀가 매기는 중요도에 맥락이 없는 건가…….
한숨을 삼켰다.
이 모든 비현실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위화감이 없는 건, 아무래도 그녀의 인상이 주는 분위기 탓이 큰 것 같다. 이목구비가 참 부드럽고 순진하게 났다. 전반적으로 위즈는 또랑또랑한 아이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쓸데없는 것 같이 쓸 데 있는 상념에 빠진 그를 깨운 건 위즈의 탄성이었다.
“아하.”
음? 정신 놓고 있는 사이에 어디까지 진행된 거지?
눈을 빠르게 깜박인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제 상관과 위즈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그 긴 시간,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다는 걸 위즈가 이어 가르쳐 주었다.
“아하.”
뭐야?
“……그런데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요?”
“…….”
설마 일 초 만에 주제를 잊어서 여태 아는 척 탄성을…….
다니엘은 목이 메는 걸 느꼈다. 아무리 간 큰 기사라도 엘르시어에게 저렇게 맹한 짓은 못한다. 아무리 엘르시어가 상냥하고 유한 성격으로 알려졌어도 저건 아니다. 괜히 특수 기사단 단장이 아닌데.
관찰실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살 떨려 하고 있을 구경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천천히 설명했다.
“중앙탑 탑주에게. 당신 친필로 써서. 편지를. 보내 줄 수 있겠습니까?”
“…….”
다니엘은 왈칵 웃음을, 아니, 그러니까, 눈물을, 눈물을 쏟을 뻔했다.
저건 그냥 꼬마를 대하는 느낌이잖아. 지금쯤 벽에 이마를 박고 폭소하고 있을 관찰실의 기사들이 부러워졌다. 다니엘은 웃음 참는 법을 따로 공부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눈물 참는 법. 저건 슬픈 장면이다. 웃긴 장면이 아니야. 슬픈 거야.
위즈의 체면 비슷한 것을 위하여 애써 포장하고 최면을 걸었다. 굉장히 쓸모없는 친절이었다.
엘르시어의 나름 친절한 설명에 힘입은 위즈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대로 갸웃했다.
“그러니까 뭘 하라고 하셨더라……?”
“다니엘 경. 바구니.”
“…….”
결국 바구니가 투입되었다.
책상에 바구니를 올리며, 다니엘은 경외감을 느꼈다. 저 엘르시어도 위즈에게는 못 당해 낸다는 사실에. 위즈,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책상에 바구니가 올려지자마자 위즈가 심각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소생 불가능한 화분을 앞에 둔 식물학살자처럼 심각하고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찬찬히 저었다.
“아무리 저라 해도 이런 것으로 꾀려 한다면 슬픕니다. 꾀어지거든요. 환영합니다, 손님. 편지를 탑주님에게 쓰라고 하셨죠? 종이랑 펜 가져다 주세요. 신속하게 해치웁시다.”
물러난 다니엘은 뒤돌아서 이마를 짚었다. 한계다. 그의 꽉 다문 입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눈이 촉촉했다. 나는 웃는 게 아니다. 우는 거다. 어느 쪽이든 위즈의 기분이 상할 것 같다는 느낌이 이제야 들었지만, 웃는 것보다는 우는 게 나을 것 같……은……, 데헤흑.
부하의 상태를 짐작한 엘르시어가 침착하게 명령했다.
“경, 퇴실하세요.”
“네흐흑.”
다니엘은 흐느끼며 줄행랑을 쳤다.
문이 달칵 닫히자, 엘르시어는 미리 가져왔던 봉투에서 고급 종이와 펜, 그녀가 따라 써야 할 서신을 꺼내 그녀의 앞에 준비해 주었다. 그동안 위즈는 책상 한편에 놓인 사탕 바구니를 보며 실실 웃었다.
그러나 준비가 끝나니 착실하게 펜을 들었다.
“이걸 따라 쓰면 되는 겁니까?”
“…….”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즈가 망설이지 않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거꾸로 보고 있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글씨가 가지런한 편은 아닌 듯했다. 아니, 가지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서신이 진행될수록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지켜보던 엘르시어가 설마 하며 물었다.
“암호문 씁니까?”
“네.”
“…….”
진짜 암호문이었나. 그는 잠시 옆을 보았다가 시선을 되돌렸다.
엘르시어가 물으려 입을 연 찰나, 위즈는 예상외로 먼저 상황을 설명했다.
“이제는 제가 평범하게 써서 보내면 너 누구냐고 하셔서. 장난 좀 적당히 할 걸 그랬습니다. 매번 귀찮아요. 그런데 이걸 해독 못 하면 학자의 혼과 천재의 혼이 울지 않겠습니까? 탑주님은 천재라고 추앙받아 온 분인걸요. 부탑주님한테 들었는데 지지난번에 보낸 쪽지는 해석하기까지 사흘 걸렸답니다. 그냥 오늘 먹은 딸기 쿠키 맛있었다고 한 줄 써서 보낸 건데.”
뒷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는 가만히 물었다.
“암호 규칙이 매번 다른 건가요.”
“대체로 그렇지요. 같을 때도 있고요.”
그녀의 숙인 이마와 내리깐 속눈썹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쓰고 있는 암호는.”
“당연히 처음 쓰는 암호입니다.”
위즈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엘르시어의 눈가가 멈칫 움직였다.
아니,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 여자는 어떤 방면에서는 천재다.
암호문을 쓰는 손길에는 잠시의 지체도 없었다. 암호 없이 따라 써도 확인 차 몇 번 주춤하는 게 보통이질 않은가. 저 암호가 전에 만든 암호라서 능숙하게 기억하고 있더라도 그랬다. 엘르시어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겨우 수 분 만에 암호문을 완성했다.
‘내가 사탕을 대가로 탑을 아리오에 팔아넘겼습니다. 도와주십시오.’하는 서신 내용을 이해는 했나. 따라 쓰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고 내용에 대한 항의도 없었다.
사각거리며 펜이 종이 긁는 소리가 끝나자, 위즈는 그제야 제가 쓴 서신을 훑어보고 고개를 들었다.
“음. 그럼 지금 제가 직접 보내면 됩니까?”
“직접? 지금? 무슨 말입니까?”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서간을 가져와 확인하려 하던 엘르시어가 그녀를 보았다. 위즈는 아까 젤리 주머니를 꺼냈던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보였다. 가느다란 실반지였다.
“탑 외부에서 사는 연구자들 대부분이 전령을 쓸 형편은 아니잖습니까. 책 보내 달라는 말 한마디 하려고 탑까지 가는 건 귀찮고. 솔직히 책 보내 달라고 탑에 갔다가는 책을 보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들고 와야 하고. 무거움. 귀찮음. 차라리 연구 안 할 거야. 그래서 이번 탑주님께서 외부 연구자들에게 나눠 주셨지요.”
“…….”
“이름하여 토끼와 거북이. 줄여서 끼북이.”
“…….”
“탑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거북이처럼 꾸준히 기어서 느리더라도 너희가 직접 와라. 이걸 사용해서 보내는 쪽지는 토끼처럼 빠르게 오는 척하다가 제발 딴 길로 새라.”
그렇게 경건하게 말할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저주인 것 같은데. 그러나 엘르시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