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실로 자연스러운 도주가 아닌가. 다니엘은 감탄했다.
그리고 직후 쏜살같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간 그녀에 당황했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며 망연하게 있던 그는 상황을 이해하자마자 몸을 돌려 위즈를 쫓아갔다.
체력 차, 속도 차는 여실했다.
그는 서점 바로 앞에서 그녀를 수월히 낚아챌 수 있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파드득 떠는 위즈의 팔을 일단 놓았다. 그의 호흡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깨를 움츠리는 위즈를 위해 그는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위즈 씨. 실례했습니다.”
위즈는 헉헉거리면서 허리를 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뚫어지라 다니엘을 보다가, 외마디 소리를 한 번.
“어?”
“왜 그러십니까?”
“후우으. 언젠가 이런 일이 또 있었던 것도 같은데. 뭔가 익숙한 듯 아닌 듯 알쏭달쏭하네요. 후아. 흡.”
또, 그새, 또, 잊었구나. 하마터면 이를 악물 뻔했다. 심호흡은 이쪽이 하고 싶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에 왔었습니다.”
“아하.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어제 오셨던 분이시군요. 그러니까, 음, 성함이.”
“다니엘입니다.”
“아하, 연지곤지 씨.”
다니엘부터 시작한 연산 과정은 분명 차원을 넘나드는 심오한 과정일 것이다. 그는 난데없이 연지곤지가 되었고, 그 직후 사탕 상자를 강탈당했다.
‘어휴, 뭐 이런 걸 다.’라며 말로는 사양하면서 손은 움직였다.
어느새 비어 버린 손을 심각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위즈는 비로소 화창하게 환영했다.
“환영합니다. 손님. 무엇을 찾아 드리면 되겠습니까? 어제는 무슨 마법을 보셨습니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다니엘은 빈손에서 미련을 버리고 고개를 올렸다.
“릴리아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데, 그 여자에 관한 기록은 많이 없어서. 그래서 왔습니다. 꽃을 아티팩트로 만든 것 중 광역 환상 마법에 대해서 조금 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우.”
그새 입안에 가득 채워 넣은 마시멜로 탓에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니엘은 야무지게 쌓아 올린 흰 마시멜로만이 보이는 입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왜 볼수록 이쪽이 죽고 싶어지지.
위즈는 그의 반응을 보지 않고, 책장이 줄지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책장에 가려져 그녀의 모습이 보이다 말다 하였다. 살랑살랑 간혹 보이는 치맛자락. 풀어 내린 머리카락. 참 저리 보면 천생 멀쩡한 사람인데.
다니엘은 입꼬리를 묘하게 올리고 웃음을 참았다.
위즈는 금세 책 여섯 권을 쌓아서 가지고 왔다.
그를 본 다니엘은 얼른 다가가 대신 받아 들었다. 아주 많이 묵직했다. 위즈는 순순히 넘기고 조잘조잘 말했다.
“꽃이라 하면, 음, 켁, 릴리아도 있고. 조……, 조각 미남도 있는데. 릴리아에 비하면 조각 미남 쪽의 기록이 훨씬 많아요.”
“조각 미남?”
처음 듣는 이명이다. 그런데 웃겨. 유치하다. 그러나 다니엘과 달리 위즈는 딱히 웃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세간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법사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마법사들에게나 알음알음 퍼진 이름이에요. 그런데 릴리아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였다고 합니다.”
“릴리아보다 말입니까?”
“네, 네. 릴리아랑 같은 세대였고요. 그 왜, 있잖습니까. 초야에 묻힌 강자들. 은둔 고수. 뭐, 그런.”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수긍하며 카운터에 책을 내려놓았다. 위즈도 맨 위의 책을 들어 제 앞에 놓았다. 그때부터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위즈는 착착 책을 넘기며 덧붙였다.
“조각조각나서 죽었지만.”
……그래서 조각미남이었…….
듣지 않아도 좋았을 부가 설명에 다니엘은 충격받았다. 누군가는 부러워할 만한 이명인데 유래가 엄청 불쌍해!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사이, 서점의 주인은 착실하게 책의 내용을 탐색 중이었다.
“음. 음. 오른쪽 중간? 아래? 그 정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여기 있다!”
기뻐하는 탄성에 다니엘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책으로 내려갔다. 잠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찾아서 내밀어 준 내용은 왼쪽 지면에 있었다.
직전까지 오른쪽 지면을 중얼거리고 있던 사람이 누구더라. 왜인지, 정말 왜인지 다니엘이 민망해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책만 살피는 편을 택했다.
책, 얼른 책을 보고 냉큼 꺼지자.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눈의 초점을 맞추는 찰나였다. 누군가가 타박타박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열린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돌아본 다니엘은 그 사람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아까 위즈를 퇴치했다가 도리어 퇴치당한 용사였다.
정말 용사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 금방 위즈를 마주할 수 있는 걸 보면.
서점 안의 분위기를 잠시 살피는가 싶던 용사는 위즈에게 눈을 고정했다. 그리고 심각하게 소식을 전했다.
“마리오가 죽었대.”
“어?”
“기사들이 와 있어. 은여우단이야. 마법과 관계가 있나 봐.”
“……은여우단이 와 있다고요?”
“예? 아, 예,”
다니엘은 제 소속 기사단이 와 있다는 말에 급히 몸을 돌렸다.
그에 비해 맹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위즈는 빠르게 달려 나가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쇼리에게 물었다.
“마하하가 누군데?”
“…….”
은여우단이 뭔지 물을 줄 알았는데.
쇼리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무거워진 명치를 느끼며 착잡한 한숨을 쉬었다.
* * *
은여우단이 잡동사니의 길에 출동한 경위는 이랬다.
수 달에 걸쳐 이 나라 아리오의 수도인 얼숍과, 수도와 가까운 영지에서 사람 수십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살아서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 증언하기를,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이 피와 흰 꽃이라 하였다.
일련의 일들을 일으킨 게 평범한 인간이라 하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게 만든 증언이었다.
그러나 그 증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특수한 사건이었다.
그간 모인 증거라곤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이 묘연해지기 직전의 행적뿐이었으므로.
그랬던 상황에서 껄끄러운 증언마저 나오자 수사권은 은여우단으로 넘어갔다.
수사권을 차지한 은여우단은 일단 악당 릴리아가 만든 아티팩트를 염두에 두었다.
그 여자야말로 꽃에 악랄하고 흉악한 마법을 심어 아티팩트를 만들었던 마법사로 유명한 탓이었다. 그 여자의 활동은 삼십여 년 전에 종료되었으나, 그 여자가 만든 아티팩트들의 기동가능기한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 여러 번 기동한 것처럼 보이는 아티팩트가 서 있었다.
엘르시어는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설마 꽃 그림일 줄은 몰랐군.”
그림 안의 흰 꽃은 섬뜩할 정도로 검붉었다.
꽃잎이 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져, 조금만 건드려도 검붉은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상태였다. 물감을 두껍게 덧칠한 것 같은 부분도 있었고, 피로 덧칠한 것 같은 부분도 있었다. 필시 사람을 잡아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다.
하여간 기괴하고 흉악한 아티팩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정확히 무엇으로 그렸는지,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돌아가서 긁어 보아야 알겠고……. 왕실 마법사의 자문도 받아야 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이젤 앞, 바닥에 놓인 사탕이 문득 들어왔다.
아, 이것.
엘르시어는 어젯밤 그림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도 사탕을 좋아한다 하였으니 이 물건과의 연관성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의미로 이것이 그림 앞에 놓였나.
어젯밤, 어두운 골목에는 적막만이 놓였고, 침입자는 여자가 만들어 낸 걸음 소리, 움직이는 소리, ‘미쳤구나.’ 하는 소리. 아니, 미쳤구나가 아니라…….
[너무 잘 그렸네. 미쳤나 봐.]
“…….”
엘르시어의 섬세한 눈이 가늘어지자마자, 누군가 그를 불렀다.
“단장님.”
접근 차단 줄을 넘어온 다니엘이었다.
엘르시어는 급히 온 것치고 숨이 평온한 부하를 응시했다. 어젯밤 보았던 자료를 다시 확인하고 오라고 보냈던 사람은 저다. 다니엘이 지금 어디에서 온 건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여자를 단탑으로 데리고 가세요.”
“예?”
영문을 몰라 하는 다니엘을 위해 엘르시어는 사탕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명령했다.
“서점의 그 여자를 단탑으로.”
그제야 어젯밤을 떠올린 다니엘이 움찔 숨을 들이켰다가 경례했다.
* * *
그림 앞에 사탕은 왜 놓았느냐 하니 아무 대답도 없이 시무룩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 입이 도무지 열리지 않기에 벨라는 다시 물었다.
혹 그 그림이 아티팩트인 걸 알고 있었느냐.
그러자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런데요?”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사의 딱딱한 질문에도 위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해야 했습니까?”
“…….”
떳떳한 반문이었다.
관찰실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위즈와 안면이 있기에 신문을 맡지 않았다.
위즈가 이미 신문실을 충분히 편하게 여기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탓이었다.
거기에 지인을 만나게 해서 더 편하게 해 주었다가는 신문실에서 아예 퍼질러 잘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딱히 다니엘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를 보아도 또 ‘넌 누구냐’고 맹하게 물을 텐데도, 엘르시어는 다니엘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이 신문을 맡게 된 동료에게 미리 필살기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다, 그 필살기를 써라……!
그는 내심 애절하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친애하는 동료야, 더는 네 혈압을 사서 올리지 마.
그의 말 없는 걱정을 성공적으로 수신한 것 같은 벨라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성의입니다.”
위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 말없이 사탕을 집어 들고,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입안에 넣은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쪽 볼이 볼록해졌다가 저쪽 볼이 볼록해지기를 여러 번.
“그 그림은 릴리아의 그림이 아닙니다. 어떤 남자가 그린 거지요.”
“…….”
위즈는 신문에 제대로 응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신문하고 있던 벨라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입술을 떨었다. 숨마저 경련했다. 그러나 기사의 혼란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위즈는 행복에 가득 차서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 여기 말고요. 저기 옆 나라. 온느발레인데요. 그 남자가 화가는 아니고, 뭔가 직업이 따로 있었는데. 뭐였더라……. 저도 잘은 모릅니다. 연구 중에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고, 딱히 주의 깊게 본 건 아니라서.”
묻지도 않은 것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말하고 있는 위즈를 두고 잠시 이쪽을 본 벨라의 표정이 일그러졌기 때문에,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관찰을 위한 창이 가로막고 있음을 알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위즈는 신문을 진행하는 자와 지켜보는 자의 괴로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행복해하며 계속 떠들었다.
“근데 거기에 심긴 마법이 사람 잡아먹는 것일 줄은 몰랐습니다.”
“…….”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 그 꽃이 흰색이었던 것 같은데 잘못 읽은 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어쩐지 그 그림 연구하던 박사가 갑자기 사라져서 여태 행방불명됐다고 하더라.”
“…….”
……그 정도 되면 알아차려야 하지 않나. 의심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거! 아닌가!
희대의 멍청이를 보는 기분이다. 벨라는 동료가 남긴 조언이 진지했었음을 신문 오 분 만에 확실하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