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검은 하늘, 비치는 달빛, 여상스러운 밤 아래, 서점 앞에 서 있는 다니엘은 힐끔 옆을 보았다.
함께 서 있는 그의 상관 엘르시어는 무표정이었다.
대체로 미소를 얹고 다니는 그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면 어쩐지 긴장하게 된다. 당사자야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뿐일 수도 있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게다가 상하 관계에서 ‘하’를 맡고 있는 다니엘은 더더욱 심장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은 건조한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입을 열었다.
“많이 늦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맞장구는 부드럽게 나왔다. 평소와 같다.
그런데도 무서웠다.
일개 서점 주인을 한 시간 정도 기다리는 이 상황. 무심코 이곳을 입에 담았다가 상관에게 안내까지 하게 된 다니엘 자신이 죄인이었다. 위즈의 서점이 생각났다고 해도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는 여기 서 있는 내내 후회했다.
‘이렇게 장시간 기다리게 된 것도 문제지만, 그, 위즈가……. 위즈가아…….’
“…….”
만날 때마다 당했던 위즈의 행각을 오늘 밤 서른한 번째 떠올린 다니엘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고 망설인 것도 한 시간째였다.
그도 그럴 게, 뒤늦게 경고하기가 애매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단장님. 실은 여기 주인이 사람 눈물 뽑아내는 데에는 전문가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아니다.
‘단장님. 실은 여기 주인이 일반인이 아닙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아니다. 일반인이 아니면 뭔데. 위즈는 일반인이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일반인이 아니다. 분명 일반인인데도.
‘단장님.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아니, 그보다 왜 말끝마다 마음의 준비를 추천할 수밖에 없는 건지 모르겠다. 본능인가. 그런 건가.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기사는 정적을 뚫고 들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골목 끝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오는 저 사람.
다니엘은 눈을 부릅떴다. 위즈인가? 가까워질수록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위즈다. 달빛이 아주 밝지만은 않은 데다가 아직 위즈가 벽 그늘, 벽 그림자 사이를 걷고 있어서 제대로 얼굴을 식별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서점 앞에서 기다린 지 한 시간 십 분 만의 희망이었다.
심장이 떨리는 이 느낌. 사랑이다.
다니엘은 거기까지 흘러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사랑할 사람이 따로 있지, 위즈는 아니다.
위즈인 것 같은 사람은 밝은 곳으로 나오기 직전에 갑자기 멈춰 섰다.
“어…….”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 비슷한 것을 흘리고 말았다. 사람이 멈춰 선 곳이 어느 집 앞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멈춘 사람은 현관 옆에 세워져 있던 이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쪼그려 앉기까지 하였다.
다니엘은 목을 앞으로 빼고 눈을 가늘게 떴다.
“…….”
그 사람은 이젤 위의 그림을 뚫어져라 올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달빛을 빌려 온 모양이다.
곧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잘 그렸네. 미쳤나 봐.”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하.
다니엘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소름이 돋았다. 출현 하나만으로 그를 이토록 감동에 젖게 하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사이에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는가 싶었다. 바닥을 향했던 손이 회수되고, 위즈는 또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아서 그림을 보는 것 말고 추가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다니엘은 그 작은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지만, 체감상 수 분이 지나가자 더 지체할 수가 없어 몇 걸음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위즈 씨.”
“…….”
그러자 어깨가 움찔. 경련하듯 고개가 바르르르 떨렸다.
위즈의 서점 앞에 서 있던 다니엘은 숨을 죽였다. 위즈를 놀라게 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리 분명한 반응을 보이면 깨달을 수밖에 없다. 맹수의 울음소리를 들은 토끼처럼 얼어 버렸던 여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와 그의 동행인을 살피더니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로 어두워서 얼굴을 구별 못 했을 텐데도 그녀는 태평하게 말했다.
“놀라서 기절할 뻔했어요.”
“…….”
그다지 놀란 것 같지 않은 목소리로 그리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다. 미안함과 허탈함이 섞였다. 어서 이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다니엘은 부랴부랴 입을 열었다.
“접니다, 다니엘.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어, 아……. 예…….”
반응이 떨떠름했다. 여러 번 당한 일이 있어 그 까닭이 넉넉히 짐작이 갔으므로, 그는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누군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해도 됩니다.”
“엇.”
위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가렸다.
어디 무대에 선 연극배우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서점 주인이 그가 여태 만나 왔던 사람 중 손꼽히는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나도 만나도 잊히다 보면 당연히 알게 된다.
대수롭지 않게 눈웃음을 보인 그는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도움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도움?”
“예. 책에 대해서.”
“손님이시군요!”
그 기쁜 음성에 다니엘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다음 차례가 무엇일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위즈가 순식간에 우울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 서점은 책을 팔지 않는데.”
그렇겠지…….
짧게 한숨을 쉰 다니엘은 함께 온 상관이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을 해 보고는 우울한 웃음을 지었다.
“압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잠시만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
“물론 사례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하자면, 이 모든 절차를 그가 벌써 열 번 이상 겪었다는 걸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만날 때마다 이래.
어쨌든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사탕 바구니였다.
다른 말로 하면 미끼.
다른 말로 하면 떡밥.
물어라.
킁킁 달콤한 냄새를 맡은 위즈가 숨을 들이켰다.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거기에서 여기 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능력자였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예상한 대로 월척이었다. 바보는 파닥파닥 낚였다. 한달음에 쪼르르 달려온 위즈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어, 그러니까, 다……. 다윗 씨.”
“다니엘입니다.”
“네. 다시마 씨.”
“다니엘입니다.”
“네. 다이어리 씨.”
“…….”
불리면 불릴수록 이름에서 근본이 사라지고 있었다.
‘좋아. 내 앞에 서 있는 건 이족 보행하는 금붕어다.’
다니엘은 시원하게 포기했다.
상대가 상당히 청순한 뇌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법이다.
마침내 서점의 문이 열렸다.
책 냄새라 할 수 있는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쌓인 종이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공기. 그리 신선하지는 않은 공기였으나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부엌에서 불을 가져온 위즈는 초 십여 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카운터에 바구니를 올려놓자마자 거기에 머리를 박고 사탕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와. 와. 여러 번 감탄이 반복되었다.
간식을 본 개새, 새끼 개……, 개 같다. 다 큰 성인만 아니었다면 마냥 귀여울 뻔했다.
해탈한 마음으로 온화하게 그 모양을 바라보다 용건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꽃에 마법을 심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우?”
몸을 세워 그를 돌아보는 위즈의 입에는 이미 긴 젤리가 물려 있었다. 축 늘어진 빨간 젤리를 우물우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후루룩 젤리를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티팩트에 관한 건 무궁무진한데, 꽃으로 특정이 된다 해도 너무 막막해요.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꽃에 마법을 심을 수 있었는데. 음, 일기를 봐야 할까.”
“단번에 사람 열 이상을 홀릴 수 있는 환상 마법 쪽으로.”
“열 이상이라면 굉장히 강한 마법사일 텐데. 홀려……. 아, 그, 그, 그, 그……금발.”
쫑쫑 구석으로 걸어간 위즈는 빽빽한 책장에서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녀는 책을 들고 오며 설명했다.
“릴리아가 꽃에 마법을 자주 심었죠.”
“예. 그래서 그 책은?”
“아. 여기요. 왼쪽 지면이었던 것 같은데.”
다니엘은 그녀를 도와 사탕 바구니를 바닥으로 내려놓고,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마른걸레를 가져와 카운터 위를 한 번 닦았다.
위즈는 그에 배시시 웃고는 책을 내려놓았다.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책장이 넘어갔다. 말마따나 왼쪽 장에 눈을 두고 착착 넘어가던 책장이 멈춘 건, 백여 장이 넘어갔을 때였다. 책을 돌려 그가 볼 수 있도록 해 준 그녀가 입술을 물며 다시금 웃었다.
“여기요. 마음껏 보세요. 다른 책도 가져와 볼게요. 떠오른 게 있어서.”
그것은 상당히 다정하고 유용한 신뢰였다.
이 책을 망가뜨리거나 훔쳐 가면 어쩌려고. 시원하게 다시 안쪽 책꽂이로 가 버리는 그녀를 잠시 보다가,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상관은 이미 품에서 장갑을 꺼내 낀 채였다.
위즈는 이 엄청난 가치의 고서적을 맨손으로 다뤘지만, 상식적으로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도 상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고개를 숙이고 심각하게 내용을 살피는 엘르시어를 잠시 보다가 도로 위즈 쪽으로 눈을 돌렸다.
책을 찾고 있는 그녀를 보면 종종 놀라운 카리스마마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사탕을 준다며 아이를 납치하려고 시도했던 남자에게 슬금슬금 접근하여, 아이 대신 자발적으로 납치당할 뻔했던 사람이 바로 저 여자였던 것을.
사탕에 낚여서 납치범을 쫄랑쫄랑 따라가던 위즈를 보며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때 그녀를 구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그랬던 첫 만남을 떠올리면 위즈를 대할 때 태도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는 놀라운 바보다.
그가 시답잖은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양 손바닥에 책을 한 권씩 얹고 돌아온 그녀는 새로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더 필요하시면 왕립 도서관에 가 보세요. 그래 봤자 여기만큼 희귀한 서적들은 없겠지만.”
“그렇군요.”
당당하게 자랑하는 것에 적당히 맞춰 주었다. 그리고 힐끔 상관을 보았다. 오늘의 용건에 대해서라면 그보다는 엘르시어가 훨씬 전문가이므로 괜히 책에 손을 대지 않는 편이 나은 까닭이다.
그러나 위즈가 두 번째로 내밀어 준 서적의 내용을 유심히 읽어 나가던 엘르시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엘르시어는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책을 살 수 있겠나.”
다니엘은 상관의 말에 흠칫했다. 이곳은 책을 팔지 않는 서점이라고 사전에 분명히 말했음에도 결국 시도를 하고야 만다.
위즈는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팔지 않습니다.”
희소가치 높은 희귀한 서적들을 다량 소지하고 있으면서도, 이 서점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던 배경이 분명하게 있었다.
일단 이 서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신분으로 찍어 누르고 책들을 빼앗아 가거나 헐값에 사들이려 눈독 들일 귀족들을 단번에 물리칠 수 있는 이 여자의 소속 신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번에도 위즈는 금테를 두른 화려한 액자를 카운터 밑에서 꺼낸 뒤 양손으로 들고 수줍게 내보였다.
중앙탑 소속이라는 인증서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수줍어하는 목소리로 속닥속닥 말했다.
“설령 귀족 나리가 오셔도 책은 팔지 않습니다. 이 책들을 가져가는 사람은 세상 끝까지 추적해서 몹시 불행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결심했대요.”
“…….”
“아이코. 그러고 보니 그 결심을 한 사람이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