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어서어서 준비해야 해요! 시간이 없다니까요!”
“재촉하지 않아도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여유를 가지라니까 정말. 그래도 젊은 아가씨가 저리 활기차니 보기 좋네.”
그다음 날, 리제아나가 잠시 머무는 황태자비궁은 아침을 맞느라 분주했다.
이안의 부름을 받아 하르힌의 도움으로 순간이동을 통해 리제아나를 찾아온 시엘도 벨리타와 인사를 나누고는 금방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안과 리제아나의 결혼식이자 그녀가 아비드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를 것임을 제국민 앞에 선포하는 날이었다.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 날이었다. 시엘은 이런 편지를 전한 이안에게 스스로 자원해 리제아나를 꾸밀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시엘은 리제아나를 도울 수 있도록 아비드 제국으로 향하기를 원한다고 이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오늘은 반드시 아름다우셔야 합니다!”
시엘이 ‘반드시’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리제아나의 검은 머릿결을 부드러이 빗으로 빗겨주었다.
이에 벨리타도 고개를 끄덕이며 열의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도왔다.
“물론입니다! 거기다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폐하를 얕보는 사람들은 그냥 잡아넣으세요!”
“어떻게 그러니? 하하. 그래도 말이라도 좋구나.”
리제아나가 웃으며 벨리타와 시엘을 마주 보았다. 리제아나를 ‘폐하’라 부르는 벨리타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녀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리제아나는 하르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리제아나의 즉위 소식과 더불어 이안과의 결혼, 그리고 라이핀의 죽음까지. 모든 이야기가 제국민들에게 갑작스럽게 전해진다면 혼란스러워질 것이 뻔하니 미리 정보를 흘려달라고 말이다.
텐젤이 아비드 제국을 무너뜨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제아나는 노크 소리의 주인이 하르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위버와 미세리타는 지금 이안의 치장을 돕느라 바쁠 테니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하르힌뿐이었다.
“늦게 보고드리러 와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늦은 밤에 귀가해서 당연히 주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라이핀이 그동안 저질러온 일을 전해 듣는다면 그에 대한 여론이 바뀔 것이다. 그래서 리제아나는 하르힌에게 그 정보를 흘리도록 부탁한 것이다.
“뭐… 당연한 결과라고 말해야 할까요? 새로운 사실에 꽤나 동요들 하더군요. 이미 소문이 빠르게 돌아 지금 벌써 황궁 앞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대신관님은?”
“곧 도착하실 예정이실 겁니다.”
“수고했어요. 이안에게 가보세요. 아마 그쪽이 치장에 서투니 더 많은 손이 필요할 거예요.”
리제아나의 말에 하르힌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러갔다.
리제아나는 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수척해 보이던 그의 얼굴빛이 한층 밝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르힌을 걱정하던 리제아나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리제아나는 시엘과 벨리타의 손에 바뀌는 제 모습을 거울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뒤늦게 탄식을 내뱉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드레스는….”
여전히 황태자비궁에는 그녀의 물건이 남아 있었다. 과거에 그녀가 입던 드레스 또한 있었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날을 위한 드레스는 없었다.
“어머,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리제아나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시엘은 작게 웃었다. 시엘은 그녀의 머리를 틀어 올려 여러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박힌 왕관을 고정했다.
이윽고 시엘은 손을 탁탁 털더니 그들 뒤의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꺼내 보였다.
“아까 벨리타를 도와 목욕하고 계셨을 때 몰래 숨겨두었답니다. 제가 직접 준비한 웨딩드레스죠! 이래 봬도 혼신이 담긴 드레스라서요. 예쁜가요?”
웨딩드레스를 바라보며 리제아나는 쉬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흰색 새틴으로 제작된 드레스에 풍성한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이안의 적안이 연상되는 새빨간 동백꽃이 장식된 우아한 모양의 드레스였다.
“너무… 너무 예뻐요, 시엘!”
“아가씨… 아가씨는 제게는 아직 여리고 어린 주인님이 처음 데려오신 아가씨셨어요. 이상한 사람일까 노파심에 걱정도 했지만 이내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죠.”
입을 가리며 웃음을 내비치는 리제아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시엘이 조용히 말했다.
“제 여리고 어린 주인님, 이안 저하를…. 이제는 평생 동반자로 잘 돌봐주세요. 상처가 많은 분이니까요. 하지만 리제아나 아가씨라면 이런 걱정은 필요 없겠네요.”
이안을 바라보는 리제아나의 눈에는 언제나 그를 향한 염려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 이안에게 향하는 리제아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엘은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진심으로 고마워요, 시엘. 그리고 벨리타도, 이렇게 끝까지 저를 믿어주어서요.”
숨죽여 눈물을 삼킨 시엘과 달리 벨리타는 리제아나의 말을 듣고서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뒤이어 세 여자의 웃음소리가 평화롭게 울렸다.
어느덧 시리고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거대한 종소리가 황궁에 울려 퍼졌다.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제국민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함성 속에는 야유 또한 섞여 있었다.
결혼식과 서약식은 황궁 안에 위치한 신전에서 열렸다.
“소식 들었나? 내가 어제 그 술집에 있었는데 말이야….”
“아니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믿었던 라이핀 황제 폐하는….”
“어허, 그럴 리가 없잖아!”
“일단 기다려보세. 지금 막 시작하려 하지 않나! 아, 대신관 라울라스 님이다!”
신전 메인홀은 리제아나와 이안의 안전을 위해 몇몇 귀족만으로 채워졌다. 참석한 귀족들은 대부분 이름있는 귀족들이었다.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중 누군가가 단상 위로 나타난 대신관을 가리켰다. 그러자 무거운 침묵이 신전에 내려앉았다.
“크흠….”
대신관 또한 이렇게 국정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올리는 두 황제의 결혼식에 부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두어 번 헛기침하고 식은땀을 닦았다. 그에게 모이는 귀빈들의 시선을 느끼며 대신관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비드 제국의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황, 황제 폐하!”
바뀐 리제아나의 호칭이 낯선지 대신관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겨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라졌던 황태자비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황제’가 되어서 다시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온전히 제 성을 가진 채로 말이다.
이윽고 오른쪽 문에서 웅장한 소리가 열리며 문이 열렸다. 시엘이 만들어준 드레스를 입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로 리제아나가 나타났다.
리제아나는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고 레드카펫 위를 걸었다. 단상 위로 오르기까지 그녀의 고개는 단 한 번도 아래로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까지 치러야 했던 희생을 되새기며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리, 리제아나 황제 폐하라고?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거지?”
“…아니…. 나도 들었네…. 그럼 라이핀 황제 폐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레드카펫 위를 걷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그 시선에 위축되었던 리제아나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가 시선을 조금 옮기자 귀빈들 가장 맨 앞에 미세리타와 위버, 그리고 시엘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리제아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한치의 악의도 없었다. 리제아나와 이안, 두 사람이 함께 행복하길 바라는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텐젤 제국의 이안 렌시 데벤시아 황제 폐하!”
뒤이어 대신관이 부르는 이름에 모두의 고개가 서서히 열리는 왼쪽 문으로 향했다.
‘텐젤’이라는 단어에 모두가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이안이 걸어오기 시작하자 침묵은 더더욱 장내를 짓눌렀다.
마침내 대신관 앞에 선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고마워요.”
리제아나가 소리를 죽인 채로 조용히 이안에게 말했다.
그들이 현재 식을 올리는 곳은 아비드 제국이었다. 분명 텐젤로 가서 더 많은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릴 기회가 있었으나 이안은 이곳을 고집했다.
황제로서 리제아나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아비드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를 결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그녀는 고마웠다.
“우리도 이곳에서 시작했어. 그러니 우리의 가장 행복한 순간도 이곳에서 치러야지. 난 그대가 날 선택해주어서 고마운걸.”
이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라이핀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지만 이안을 처음으로 만난 장소였다.
“내 사랑, 내 리제. 당신을 동경하고 무엇보다 사랑해.”
“저도, 이 세상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리제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허리를 조금 굽혀 그녀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했다.
그 순간 두 사람 위로 환한 햇빛이 쏟아졌다. 모두가 그림 같은 장면에 숨을 잠시 깊게 들이마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 누구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크흠…. 신부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는 리제아나 렌디 데벤시아로 살아가며 언제나 신랑을 존중하며 신뢰하고,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 서약, 전생에서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맞잡은 이안의 손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리제아나는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네.”
리제아나는 이안의 손을 힘있게 맞잡으며 당차게 대답했다.
“신랑 이안 렌디 데벤시아는 어떤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언제나 신부인 리제아나 렌디 데벤시아를 사랑하며 아껴주고 지켜줄 것을 맹세합니까?”
“네.”
이안 잔망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여신의 가호 아래에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치자 앞줄에 앉아있던 벨리타, 시엘과 미세리타, 위버 그리고 하르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 또한 분위기에 이끌려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꽃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리제아나가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전에 이안이 그녀의 턱을 부드러이 잡고는 단숨에 입을 맞추었다.
전보다 더 깊고 진하게, 그들은 서로에게 깊게 빠져든 만큼 입맞춤을 했다.
모든 것이 끝나도 상관없을 만큼 달콤한 키스였지만 마지막으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서 고개를 들고 리제아나는 깊은 심호흡을 한 후, 열렬한 환호를 보이는 제국민들 앞에 섰다.
“축하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여러분께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신전 안을 울리자 정적이 그들 위로 내리 앉았다.
자신을 훑는 수백 개의 눈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굳세게 앞으로 걸어나가야 했다. 장차 이곳, 아비드의 황제가 되기 위해선 리제아나는 이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악녀, 배신자, 나라를 버린 배반자, 여러 가지 이름들이 저를 따라붙고 있겠죠. 하지만 저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 혼자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녀는 과거에 라이핀의 명령에 의해 사람들을 해쳐왔다. 라이핀을 없앴다고 해서 그녀가 해왔던 일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녀가 지은 죄를 회개할 시간이었다.
“저는 아비드를 번성시키기 위해 제 남편과 함께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악녀 황태자비가 아닌 황제가 되어 반드시 약속드리겠습니다.”
군중들을 바라보는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당연했다. 진심이었으니까.
“리제아나 폐하 만세! 이안 폐하 만세!”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벨리타가 제일 먼저 일어나 리제아나와 이안을 향해 만세를 외쳤다. 뒤이어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리제아나 폐하 만세! 이안 폐하 만세!”
이윽고 신전에 있는 모두가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만세를 외쳤다.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를 비난할 거라 생각한 리제아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이안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다정히 안아주었다.
“잘 봐. 이건 그대가 만든 기적이야. 우리가 앞으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고, 미래야.”
이안의 온기가 그녀에게로 스며들었다.
그랬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들의 환호를 얻는 것,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것과 다름없었다.
앞으로 그녀가 나아갈 길은 모질고 험할 것이다. 리제아나는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흐를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두 제국의 안녕을 위해 힘써야 할 일들이 태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이안이 있었다. 영원을 맹세한 두 사람은 알았다. 어떤 역경이 와도 두 사람은 함께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의 사랑스러운 행운이에요.”
리제아나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이안의 입술에 제 입을 맞추며 싱그럽게 웃었다.
“나의 리제,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대만을 사랑해.”
그녀의 드레스에 달린 동백꽃보다 더 진한 붉은 이안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추운 겨울은 갔고, 이제 따뜻한 봄이 온다.
그리고 그 봄을 더는 혼자가 아닌 이안과 함께 맞이할 것이다.
영원토록,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