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저택의 지하실로 내려가지 전, 리제아나는 이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순간이동으로 곧바로 지하실로 데려가지 말고 공작저 앞으로 이동해주세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리제아나의 부탁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뜻을 따라주었다. 리제아나는 거대한 저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거대한 공작저, 한때는 어린 시절의 그녀를 옥죄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주인을 잃은 지금의 공작저는 초라하게만 보였다.
“이안.”
“응, 리제.”
그녀의 부름에 이안은 그녀와 함께 공작저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을 열자 사람의 온기가 없는 차가운 저택의 내부가 드러났다.
이미 저택 안의 사용인들은 모두 흩어진 모양이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죽음이 아비드에 퍼지고 필로렌치아 가문이 쇠락하였단 소식을 그들 또한 전해 들은 것이다.
텅 빈 저택 안을 바라보며 리제아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필로렌치아 공작에게 학대받던 기억과 그의 가혹한 행동을 모른 척하던 가문의 사람들.
공작이 그녀를 홀대한만큼 그녀는 공작저에서 입지가 낮았다. 사용인들은 그녀에게 최소한의 수발만 들 뿐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다.
“저택에서 전 천덕꾸러기 신세였어요. 저에게 허물없이 다가와 준 사람이 없었죠. 무엇보다 그들은 절 없는 사람 취급까지 했으니….”
“리제아나…. 내가 당신을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리제아나의 과거를 들을 때마다 이안은 가슴이 아팠다. 황궁에서도, 가문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홀로 모든 것들을 참아내야 했던 그녀의 유년 시절을 상상하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리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에요. 그 시간들이 어디 갈까요? 지금의 제가 복수하는 방법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내 능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다. 앞으로 그녀가 어느 곳을 향해 걸어나가느냐에 따라 그들의 시선이 바뀔 테니 리제아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리제아나는 몸이 기억하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저택 안으로 들어가던 리제아나는 한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공작의 방이군.’
이안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방과 달리 화려한 장식이 있는 문이었다. 마호가니 문에는 금으로 도금된 문고리가 달려 있었다.
“후….”
리제아나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천천히 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들어갈까요?”
문득 뒤에 이안이 서 있다는 것이 생각났는지 리제아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녀가 문을 열자 문이 끌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정말 오랜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네요.”
“여기 들어온 이유는?”
“어떤… 것을 찾고 있어요. 이곳에 있을 것 같아서요.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가져가고 싶거든요.”
“공작의 방에서?”
리제아나는 대답 대신 자그맣게 네, 하고 대답했다.
공작의 집무실은 마탑에 있는 이안의 집무실보다 그 크기가 더 컸다. 이안은 감탄하며 고풍스러운 내부를 구경했다.
“어디 있더라….”
혼잣말하며 리제아나는 한참 방 안을 살폈다. 마침내 그녀는 집무실 책상 뒤로 커튼이 내려있는 벽 앞으로 멈추어 섰다.
다른 곳과 달리 창문 사이의 거리가 멀어 이질적으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이안, 이안은 어머니를 본 적 있어요?”
한참 침묵을 지키던 리제아나가 그에게 질문했다.
“아니. 하지만 아버지께서 초상화를 가지고 계셔서 얼굴은 어떻게 생기셨는지 알지.”
“어떻게 생기셨는데요?”
“오뚝 솟은 코에 긴 은빛 머리, 푸른 눈을 가지신 분이셨지.”
이안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그에게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안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볼 수 없었다. 저택 안에서 초상화를 찾으려 해도 어디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 보았던 초상화를 아직 이안은 잊지 못했다. 초상화 속 그의 어머니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안은 아직까지 또렷한 어머니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리운 얼굴을 했다.
“리제는?”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지웠어요.”
리제아나는 사브릴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후로 극심한 악몽에 시달렸다. 고통에 못 이겨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을 스스로 지우기를 택했다.
하지만 이제는 직접 마주할 시간이었다.
언제까지 그때의 기억 때문에 자신을 옥죌 수는 없었다.
황태자비가 된 후, 그녀가 잠시 저택을 방문했을 때였다. 필로렌치아 공작에게 인사하기 위해 그의 집무실을 찾은 리제아나는 집무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여인의 그림을 바라보던 공작과 마주하고 말았다.
놀란 공작은 서둘러 초상화 위로 커튼을 내려 가렸지만 리제아나는 초상화가 있던 자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리제아나는 커튼을 잡고 힘있게 거두어냈다. 그러자 커튼 너머로 한 여인의 초상화가 드러났다.
“제 어머니는 이렇게 생기셨군요.”
주홍색 머리칼의 여인이 그림 속에서 이쪽을 보며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접힌 눈과 보조개가 사랑스러웠다.
‘저분이 사브릴 황녀님….’
전 황제, 아담과 남매이건만 두 사람에겐 닮은 점 하나도 없었다. 그때 이안의 귀에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이안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엄마를 외면하고 살았을까요….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공작으로부터 리제아나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다. 하지만 딸은 고작 악몽 때문에 어머니를 외면해왔다. 그 사실이 와닿자 후회가 밀려왔다.
“괜찮아…. 응? 괜찮아….”
이안은 다른 어떤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의 슬픔을 알기에 함부로 위로해줄 수조차 없었다. 그저 리제아나를 더 품속 안으로 깊이 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리 울다 리제아나는 몸을 돌려 이안의 손을 잡고는 그의 품에서 자연스레 빠져나왔다.
리제아나는 울음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애써 숨기고 밝게 초상화를 향해 말했다.
“안녕, 엄마. 늦어서 미안해. 그래도 딸이…, 딸이 이렇게 악당을 물리치고 왔어. 잘했지?”
그녀의 장단에 맞추어 이안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그 또한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혼 상대도 왔답니다. 저희 결혼을 허락해주실 거죠, 장모님?”
초상화 속 여인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사브릴의 미소가 빛나 보였다.
⚜ ⚜ ⚜
반역이 있고 일주일이 흘렀다.
변한 것은 없었다. 아직까지 두 제국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비드의 제국민들은 천천히 밖으로 나와 다시 일상을 시작했다. 해가 지면 그들은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차기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안줏거리 삼아 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여?”
“쯧, 보면 몰라? 텐젤이지.”
“그럼 우리 제국은? 텐젤의 식민지가 되는 거야?”
“아이참,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아무 소식도 안 들리는데. 필로렌치아 공작이 죽고 그의 영지와 저택이 불에 탔다고 하니 황제 폐하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들은 라이핀의 죽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아비드 제국의 불안한 미래였다. 과연 아비드 제국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딛고 제대로 일어설 수 있을까.
“황후 마마는? 황태자비로서 등장한 뒤로 라이핀 폐하께서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는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비추신 적 없잖아!”
“얼씨구! 그 황태자비인지 황후인지 모를 귀족 영애는 껍데기일 뿐이란 소문도 못 들었어? 그 크로덴느 백작 영애가 황제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던데.”
“뭐 어때? 없으면 좋지. 소문에 따르면 못된 악녀라며?”
시내의 큰 술집 안, 거대한 테이블에서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술잔들이 맞부딪혔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그때 한 남자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브를 깊이 눌러쓴 남자는 혀를 차며 남자들 사이의 빈 의자에 멋대로 앉았다.
“당신은 누구야?”
당황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낯선 남자를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나는 길에 당신들의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야. 거짓 소문을 이리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남자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답하곤 맥주잔을 기울였다. 시원스럽게 맥주를 들이켠 남자는 빈 잔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 남자들의 시선이 낯선 사내에게 향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쯧, 잘들 들어보라고. 자네들, 황후 폐하를 직접 본 적 없지 않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왜 당신은 봤나 보지?”
사람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내를 비꼬았지만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본 적 없지. 그런데 황태자비 시절의 리제아나 님을 본 적이 있네.”
“황태자비 시절?”
“왜 그… 가장 악하다고 소문났을 무렵 말일세. 내가 황궁의 병사와 조금 친분이 있는데 말이야. 글쎄…,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창 이야기가 고조될 때 즈음 사내는 말을 끊고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알쏭달쏭한 태도에 마음이 조급해진 사람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어서 뜸을 들이지 말고 말해보게.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말해도 될는지 말이야 ….”
“말하라니까!”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치자 사내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황제 폐하께서 펼치셨던 정책은 황태자 시절의 그분 곁에서 보좌하던 리제아나 황태자비 마마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란 걸 아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에라이, 퉷!”
“그럴 줄 알았지. 몇 안 되는 황태자비 추종자!”
하지만 사람들은 리제아나를 칭송하는 듯한 말에 고개를 하나둘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그저 현재의 답답한 상황을 탓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리제아나가 그 대상이길 바랐건만 뜻밖에 말에 짜증만 더해졌다.
“잠시만! 증거가 있는데!”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낯선 사내는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리며 그들을 멈추어 세웠다.
“황제 폐하와 크로덴느 백작 영애의 바람 말이야. 피해자가 리제아나 황태자비 마마셨다니까? 거기다 크로덴느 백작 영애가 그분을 질투해서 폐하와 작당하고 그분을 몰아냈단 말이지.”
그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금 숨을 죽였다. 새로운 사실이었다.
“황후 마마가 되시고도 이혼하지 못한 건 필로렌치아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듣자 하니 필로렌치아 공작도 제 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더군. 세 명의 작당에 못 이겨 잠시 피신해있었던 거지.”
“그럼 증거는?”
누군가가 물었다.
“내일 아침, 황후 마마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입장을 밝히고 대신관 앞에서 서약한다는 소문을 들었네. 다들 그때 구경들 와보지?”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 물론 지금껏 내가 했던 말은 비밀이라네. 그러니… 지켜줄 수 있겠지? 내가 듣다 너무 억울해서 그런 것이니, 자네들만 알고 있어야 해?”
그의 말에 구경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마친 사내가 술집을 벗어나기 무섭게 술집 안은 대화 소리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