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비드의 병사들과 황궁 사용인들은 대부분 텐젤 병사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귀족들은 숨을 죽이고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리제아나의 황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특히 원로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그들을 이끌었던 셍상스 후작과 칼슨 백작, 그 외에 그들과 관련된 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다.
아비드의 평민들 또한 함부로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모두 이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함께 황궁 안을 살피며 남은 궁인들과 병사들을 찾으러 다니던 미세리타와 위버는 두 갈래 길 앞에 섰다.
두 갈래 길 중, 오른쪽 길은 식당, 왼쪽 길은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럼 나머지 정리를 할게.”
“나는 그럼 이쪽.”
미세리타는 자연스레 식당 쪽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위버는 선택권 없이 훈련장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다.
식당에 도착한 미세리타가 문을 열자 호화스러운 음식들이 그녀를 맞았다.
“하르힌? 너 여기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음식들이 잔뜩 올려진 식탁 옆으로 하르힌을 발견한 미세리타가 고개를 기울였다.
당황한 미세리타는 주변을 살피곤 그에게 다가갔다.
“미세리타구나. 시간 괜찮으면 나 좀 도와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하르힌이 살짝 고개를 까딱여 간단히 인사하고는 그녀에게 식탁 위의 음식을 가리켰다.
손도 안 댄 음식들도 꽤 많아 보였다. 식탁 앞에 선 하르힌의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지쳐 보였다. 여태껏 치료조차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하르힌은 긴 로브를 두르고 있었기에 이안은 상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내색하지 않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로브를 벗은 그의 몸 위로 보이는 상처를 보며 미세리타가 입매를 굳혔다.
“너 상처가….”
“난 괜찮으니까. 와서 이거나 도와.”
“그럼 내 질문에 먼저 답해줄래? 이 음식들은 다 뭐야?”
그는 피곤했는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저하께서 리제아나 님께 먹이고 싶다고 시엘 님께 전에 부탁하셨던 음식들 몇 가지를 가져왔어.”
“리제아나 님만이 아닌 것 같은데?”
물끄러미 음식들을 바라보던 미세리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성큼 다가가 분홍빛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마카롱은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하르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미세리타가 이번엔 초록색 마카롱을 집어 그대로 그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뭐 하긴, 저하께서 리제아나 님만 챙기려고 시엘에게 음식을 부탁한 건 아니란 소리지.”
“똑바로 말해줄래?”
“리제아나 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들었어. 오랫동안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한 사람이 한번에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이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했을 리 없지. 마카롱은 너와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게다가 브리또 롤은 위버가 얼마나 좋아하는 음식인데.”
“…아.”
그의 말에 그제야 하르힌이 식탁 위의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좋아할 법한 음식들이 식탁 위로 한가득 있었다.
“분명 저하께서는 아셨겠지. 우리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면 우리가 거절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또 다른 건 뭔데?”
“뭐?”
“모르는 척은. 네가 방금 다른 것도 가져왔다고 했잖아. 혹시 그거 무슨 물건인지 맞춰봐도 돼?”
“다 아는 것 같은데.”
마카롱을 우물거리며 하르힌은 천천히 입안에 퍼지는 은은한 단맛을 음미하며 답했다.
“약혼반지 맞지? 선대 공작님의 것.”
미세리타의 말에 하르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세리타가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 이안 님이 리제아나 님에게 구혼을 하실 모양이었다.
“정말… 청혼하시려나 보네. 저하께서 결혼이라니. 생각해보지 못한 일인데. 사람을 못 믿던 분께서 사랑에 빠진 것도 모자라 결혼이라니.”
“그러게.”
마탑 안의 사람들 외에 외부 사람들과 교류가 적은 그가 변했다. 모두 리제아나를 만나고부터였다. 사람들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던 그가 그녀를 위해 변한 것이다.
이게 사랑의 힘일까? 하르힌은 이안의 변화에 놀라며 반지를 받은 그녀가 과연 어떤 표정을 할까 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리제아나 님이 받아주시려나?”
⚜ ⚜ ⚜
지는 태양은 마지막으로 빛을 뽐낼 생각인지 뜨겁게 그들을 비췄다.
심장 박동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 빛과 함께 알 수 없는 열기에 리제아나는 주변의 공기가 덥게 느껴졌다.
“이곳에는 갑자기 왜….”
부끄러움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숙여 발치 아래의 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그와 계속 눈을 마주치다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다 끝났으니까. 나머지 뒤처리들은 모두 병사들이 할 거야. 아비드 황궁의 사용인들도 시간이 지나면 감옥에서 풀어줄 테고.”
“보여주기식인가요?”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대로 아비드의 병사들을 풀어준다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
“역시 그렇죠. 하지만 전 제국을 이전보다 더 부흥시킬 거예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동백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니 우리 둘이 잘 이끌어 나가야겠지.”
리제아나는 석양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당황한 나머지 움찔거렸지만 이안은 그녀가 다시 손을 뺄까 봐 얼른 그녀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저는 그동안 아비드 황실의 재정을 손수 관리해 왔어요. 이 아비드를 잘 통치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잠깐의 침묵 뒤에 리제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비드 제국뿐이에요.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아비드는 결국 텐젤에게 이렇게 되었을 거예요. 이렇게 속이 썩었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아비드는 최후를 맞을 거라고 생각해왔으니까요.”
“음….”
이안은 그의 어깨에 힘없이 기댄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대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 텐젤까지 넘기기엔 그대의 어깨가 무겁겠지. 그러니 두 제국을 모두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텐젤을 통치할 테니.”
“네?”
“설마 두 제국 모두를 다스릴 생각을 했던 거야?”
목소리를 높이며 되묻는 그녀에게 이안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두 제국을 병합하자고 했으니 전….”
“리제, 나는 그대의 제안에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두 나라는 오래 대립해왔기 때문에 그 과정이 쉽진 않을 거야.”
텐젤과 아비드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교류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사브릴 황녀의 실종을 계기로 두 제국의 사이는 더더욱 벌어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황제가 바뀌었으니 두 제국의 제국민들 모두 당황스러울 것이었다. 그 시점에 섣부르게 나라를 급히 병합한다면 혼란만 더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당신은 아비드를, 나는 텐젤을, 서로의 제국을 돌보는 거야. 언젠가 두 제국이 서로를 이해하고 경계선을 허물게 될 때까지 함께하는 거야.”
이안이 몸을 돌려 그녀의 앞에 섰다.
“늦어서 미안해. 그렇지만 제대로 그대에게 청혼하고 싶어.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우리. 응?”
이안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이었다.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는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맞잡은 손끝을 떨었다.
리제아나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안이 반지를 꺼냈다. 그가 그녀 앞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대, 나와 결혼해주겠어?”
이안이 마침내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던 말을 꺼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들과 그 위로 쏟아지는 노을빛이 눈부셨다. 긴장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의 청혼에 리제아나는 뛰는 가슴을 안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염치없이 세 번이나 당신의 마음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리제아나가 이안과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가슴이 떨렸지만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좋아요.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을 두 번이나 놓치기 싫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그녀를 그녀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은 앞으로 없을 거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삭막한 그녀의 삶에 이안, 그가 나타났다. 아무리 밀어내도 먼저 다가와 주는 이안이 고마웠다.
그녀가 좌절할 때마다 옆에서 등을 받쳐주던 이안을 사랑했다.
“왜 울어. 응? 눈물은 내가 흘려야지. 나의 청혼을 받아줘서 고마워.”
이안이 은빛 링에 검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꺼냈다. 데벤시아 공작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결혼반지였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기 시작했다. 검은 보석이 노을빛을 받고 그녀의 손 위에서 반짝였다.
“너무 고마워서요…. 너무 미안하고 그리고 또….”
“사랑해.”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저 사랑해, 이 한마디면 됐다. 리제아나의 입에서 더는 사과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나도 사랑해요….”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자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턱을 틀어 리제아나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두 사람은 노을빛을 받으며 오래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