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재빠르게 두 손을 들어 코를 막으며 벨리타를 향해 이곳을 벗어나라고 소리치기 위해 리제아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그녀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이 공간에 머문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두 사람에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게 뭐지….”
리제아나는 그녀가 든 서류에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길 빌며 다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흘려 쓴 글씨체 때문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분명 공작이 직접 적은 것이 틀림없었다.
텐젤 점령이라고? 리제아나는 집중해서 서류를 훑어 내렸다.
“리제아나 님, 뭐 좀 찾으셨어요?”
무언가를 들고 선 리제아나를 발견한 벨리타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음…. 벨리타.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밖에서 기다려줄래?”
리제아나가 부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권유했다.
분명 리제아나가 든 서류에 중요한 정보가 적혀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벨리타는 리제아나가 곤란하지 않도록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일개 시녀인 자신을 곁에 둔 것만으로도 여신께 감사할 일이었으니까.
“네, 리제아나 님.”
벨리타는 아직 나이는 어렸으나 눈치가 빨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린 벨리타는 문 앞에 서서 혹여 누가 오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앞으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 ⚜ ⚜
“이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니, 참으로 우습구나….”
모든 서류를 읽은 리제아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서류에는 텐젤을 무력화시키고 점령하려는 라이핀의 계획이 적혀있었는데 대부분 광각초를 이용한 것이었다.
서류를 보며 리제아나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텐젤에 광각초를 퍼뜨리기 위해 라이핀이 직접 텐젤을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라이핀이… 무엇 때문에 텐젤을 직접 방문한 거야?”
그때의 라이핀은 황태자 신분이었지만 황제를 대신하여 아비드를 통치하고 있었다.
라이핀이 텐젤을 찾은 일정이 적힌 날짜 아래로 라이핀의 필체로 적힌 기록들이 있었다.
‘텐젤에 그리도 집착하던 이유는….’
여러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흩트려 놓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궁금증에 그녀는 서류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아. 젠장.”
마지막 장에는 공작이 남긴 짧은 기록이 적혀있었다. 결국 탐욕 때문이었다.
황위를 계승한 라이핀에게 사업 이야기를 흘린 공작은 그와 함께 은밀히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 라이핀은 심취해있었다. 자신이 훗날 정복할 거라 믿은 텐젤이라는 제국을 직접 밟기를 원했다.
그렇게 장황한 계획이 담긴 문서의 마지막 장을 넘긴 리제아나는 허무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욕심이 대체 뭐길래….”
공작의 비밀스러운 서랍 안에는 이때까지 그들이 목표를 위해 은밀히 처리해온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다. 명단을 들어 올리자 리제아나는 첫 번째 장에서 곧바로 어머니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작의 목을 조르고 싶은 분노가 솟구쳤지만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명예와 권력 앞에서 어찌 사람들이 이리 잔혹해질 수 있는 걸까. 리제아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리제, 바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그녀를 깨웠다.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이, 이안?”
생각에 깊게 빠진 나머지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리제아나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그녀는 이안 뒤의 문에 서 있는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벨리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입 모양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다.
“뭘 보고 있었던 거야?”
“…그게.”
“보여주기 싫다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려고 왔으니까. 전해줄 말도 있고.”
리제아나가 망설이자 이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황제의 집무실에 나도 마찬가지로 조사하러 갔었어. 그곳에 광각초에 대한 단서가 있더군.”
“어떤… 거였는데요?”
“복잡해. 광각초가 지금 어디 있는지에 대한 정보까진 나와 있지 않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꽤 재밌는 사실들을 알아냈어.”
리제아나의 눈이 찰나였지만 호기심에 반짝였다.
이안은 그것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비쳤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얼굴을 구겼던 그녀가 얼굴을 펴니 보기 좋았다.
“광각초는 양귀비가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쓰여 있었어. 한데 텐젤 황가의 피를 가진 자들은 양귀비에 내성이 있더군.”
“네?”
“그래서 그대가… 만일 사브릴 전 황녀님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그 파란 머리 개자식의 술수에도 살아남았던 이유가 그것 때문일 거야. 그리고 내 저주를 막을 수 있던 이유도….”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는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은 후각도 민감해 그러니 광각초의 냄새를 잘 맡을 수 있었을 거야.”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니까. 그리고 광각초를 퍼퓸니즈로 제조한다면 그 효과가 미약해지지만 끊을 수 없을 만큼 중독적이라고 하더군. 거의 마약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그래서?”
“아니… 이 공간에서 은은하게 광각초의 향이 느껴져요.”
리제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얼굴을 찡그리며 리제아나의 코를 막았다.
“뭐라고! 피했어야지!”
“내성 있다면서요!”
리제아나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그녀의 코를 막은 이안의 손을 거두어냈다.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이안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그대는 완전히 피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이미 한번 호되게 당할 뻔했잖아. 그때 내성이 약해졌었으면 어떡하려고!”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우스워 리제아나는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
그가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리제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뗐다.
“말짱하다니까요. 그럼 그 소식들 말고는,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은 뭔데요?”
일순 걱정 가득하던 이안의 적안이 살짝 흔들렸다.
“그게…. 그게…. 밥… 먹어야지.”
“밥이요? 뜬금없이요?”
“그대를 구하고 나서 우리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잖아. 그러니 이제 쉬는 것이 좋겠다. 배고프지? 식사나 같이할까?”
이안이 저 멀리 리제아나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거짓말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리제아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렇게 황궁이 어지러운데 어디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의아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이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배도 고픈데, 그럼 가죠.”
리제아나의 답에 이안의 망설이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리제아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서랍장 안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넣었다. 다시 찾아와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손을 이끄는 이안을 따라 집무실 안을 빠져나왔다.
⚜ ⚜ ⚜
걱정과 달리 그와 함께 식당에 들어가자 음식이 마법처럼 놓여 있었다. 리제아나는 놀란 눈으로 식당 안을 훑었다.
“말도 안 돼! 이안, 이건 마법으로도 하기 힘들 거예요.”
리제아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안은 의자를 끌어 그녀가 긴 탁상 앞에 앉게 도왔다.
“이제 밥은 잘 먹겠지?”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녀가 포로로 마탑의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를 기억하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덕분입니다, 폐하.”
리제아나가 능청스럽게 그의 농담을 받자 이안이 낮게 웃었다.
수저를 집은 그녀는 제 앞에 놓인 단호박 수프를 한 입 먹었다. 왜인지 어디선가 맛본 듯 익숙한 맛이었다.
수프에 이어 스테이크까지 올려진 호화스러운 식탁이었다. 리제아나는 벨리타를 불러 몇 가지 음식을 나누어주고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참 착해?”
이안이 핀잔 어린 칭찬을 던졌지만 리제아나는 그동안 고생한 벨리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 이안은 초조한 듯 낯빛을 굳혔다. 진한 초콜릿 시럽이 흘러내리는 브라우니를 앞에 두고도 그는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그는 단 디저트를 좋아했지만 왜인지 오늘은 그리 당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음식들도 통 먹지 못하는 그였다.
의아하게 그를 보던 리제아나가 시선을 돌렸다. 창가로 어느새 붉은 저녁노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루가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어디 갈 곳이라도 있으세요? 답지 않게… 분주하신 것 같아요.”
“어? 아니 전혀….”
어색한 몸동작과 함께 이안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은 리제아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식당의 문을 열자 황궁의 복도가 아닌 정원이 펼쳐졌다.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피어오른 정원은 보기에 아름다웠다.
“약속했잖아, 조금 늦었지만 이 덩굴의 꽃이 빛을 발할 때 그대에게 보여주겠다고.”
“동, 동백꽃이죠. 이거?”
이안이 그녀를 조금 더 이끌자 뒤로 문이 닫혔다. 정원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고요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두 사람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