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두 제국을 합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일인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셍상스 후작이 목소리를 떨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의 말대로 두 제국을 합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두 제국이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정치 구조를 하나로 통일해야 했다. 분명 그렇게까지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오랫동안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었던 텐젤과 아비드였으니 두 나라가 하나가 되기까지 더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리제아나….”
이안도 놀랐는지 ‘리제’나 ‘그대’가 아닌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게 제 두 번째 선물이에요. 제가 아비드의 황제가 되고 이안이 텐젤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라요. 저는 또 당신과 떨어져 있기 싫어요.”
리제아나는 반대하는 원로원 귀족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 여전히 이안의 손을 맞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두 제국을 합치다니. 어려울 거야….”
“처음은 항상 어렵죠. 하지만 텐젤이 아비드를 장악한 이상 아비드는 더는 예전의 아비드가 아니에요.”
“이건 그대의 제국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이 텐젤의 황제로서 이 제국을 정복했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아요.”
무엇이 그녀를 바꾼 것인지, 리제아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원로회의 귀족들이 눈을 크게 떴다. 황제라니?! 설마 저 옆에 선 남자가 텐젤의….
“텐, 텐젤의 황제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켈시엇 후작이 수염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고 그의 질문에 리제아나는 돌아섰다.
“제가 이안을 소개시켜 드리지 않았군요.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는 이안, 텐젤의 황제십니다.”
회의실 안이 술렁였다. 그녀와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는 남자가 텐젤의 황제라니.
귀족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이 노기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텐젤의 새로운 황제…? 그, 그렇다면… 이 일을 꾸민 것은…. 반, 반역자!”
“더는 못 들어 주겠군. 뚫린 입이라고 황제 앞에서 개처럼 짖으면 안 되지.”
이안이 음산하게 그들을 위협하자 주춤거리며 귀족들이 뒤로 물러났다. 몇몇 이들이 회의실을 벗어나기 위해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안의 부탁으로 미세리타가 병사들과 함께 문이 열리지 않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쾅쾅쾅.
놀란 그들은 문고리를 힘 있게 당겼으나 문은 도통 열리지 않았다.
“나가실 수 없으니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죠. 험한 꼴 보기 싫으시다면.”
리제아나의 목소리에 그들은 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껏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득과 실을 따져왔다. 누구의 곁에 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귀족들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리제아나는 이 아비드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설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반역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렇게 불러요. 하지만 당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믿나요?”
“?”
“공작에게, 선대 황제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왔을 때 당신들은 나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기 위해 송곳니를 들이밀었죠. 당신들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리제아나의 말이 날카롭게 그들의 가슴을 찔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그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도 없었다.
“섭리에 따라야 한다면 아비드는 텐젤의 국가에 속해야 하는 것이 맞아요. 하지만 이안은 아무래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제가 먼저 제안한 거예요. 원하는 분은 없겠지만.”
“리제, 이건 잘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야.”
머뭇거리던 이안이 원로회 귀족들 앞에서 당차게 말하는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혹여 자신 때문에 그녀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이라면 말리고 싶었다.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니까 존중해주세요. 더는 당신과 떨어져 있기 싫어요.”
리제아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안은 가슴이 뛰었다.
함께 하자며 손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못 말리겠네, 정말.”
이안이 실소를 흘리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먼저 반했으니.
“이의 없죠? 그럼 회의를 끝내겠습니다.”
리제아나는 손뼉을 맞부딪히는 것으로 원로회 회의를 끝냈다.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생각에 리제아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비드의 새로운 여제로서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곁에 있으니 그녀는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 ⚜ ⚜
회의가 끝나자 이안의 명에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귀족들이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열린 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어느새 다가온 미세리타가 넌지시 리제아나에게 물었다.
“설마요. 병사들이 그들의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몇 귀족을 통해 본보기를 보여야죠.”
“그 몇 명이 누군데요?”
위버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미세리타의 은근한 눈총에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필로렌치아 공작의 뒷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던 비리 귀족들이죠. 지금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다섯 사람이요.”
꽁무니 빼고 도망가는 셍상스 후작, 켈시엇 후작, 칼슨 백작, 아그린 자작 그리고 세바르토 자작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리제아나가 말했다.
“그들만 어떻게든 하면 나머지는 제 말을 다 따를 겁니다.”
그녀의 말에 미세리타와 위버 그리고 벨리타는 고개가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필로렌치아 공작의 방에서 더 조사할 것이 있는데…. 이안, 할 일 없으면 같이 갈래요?”
“그대의 시녀… 이름이 벨리타라고 했던가. 그녀와 함께 가보도록 해.”
리제아나의 부탁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권유를 거절했다. 리제아나는 의아했지만 그는 무언가 중요한 일을 앞둔 듯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벨리타와 함께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리제아나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안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미세리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르힌은? 하르힌도 같이 왔을 텐데.”
“여기 있습니다, 폐하.”
“지금은 예전처럼 부르라니까 너도 참 말을 안 듣는 것 같아. 상처 치료는 했나?”
이안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마법처럼 그가 나타났다.
하르힌은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이안의 핀잔에 대답하곤 정갈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십니까?”
“이건 하르힌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가 알아야 할 일이니까….”
이안이 그들에게 조용한 손짓으로 조금 더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미세리타였다. 흥분된 표정으로 옆에 있던 위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그녀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저하!”
위버까지 덩달아 환히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직 그렇게까지… 축하받을 일은 아니야.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이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은데… 하면 받아줄까?”
“….”
이안의 말에 마법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지만 유독 연애 면에서는 약했다. 말을 고르던 미세리타가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저하… 저하께선 청혼을 받으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미세리타와 위버가 동시에 한숨을 쉬자 보다 못한 하르힌이 넌지시 이안에게 말해주었다.
“제국을 합치자는 말이, 떨어져 있기 싫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아.”
영원히 함께하자는 청혼만큼은 그가 먼저 하고 싶었다. 두 제국을 합치자는 제안에 담긴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그는 부끄러웠다.
청혼만큼은 그가 먼저 하고 싶었다. 자신이 한차례 늦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왜 항상 저하께서는 리제아나 님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붉히십니까.”
“하르힌…. 왜 전혀 몰랐을까! 청혼만큼은 내가 먼저 하고 싶었는데. 어떡하지? 어떡해?”
하르힌의 어깨를 붙잡으며 이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지도 없는데….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마법으로 만든 싸구려 반지 따위는 리제에게 주기 싫단 말이야.”
“어차피 이곳은 거의 다 정리가 되었으니 저하께선 이제 저하가 기다리셨던 일을 하면 될 터인데…. 그럼 제가 텐젤 보석점에 다녀올까요?”
“…아니… 굳이 다녀올 거면….”
하르힌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안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곳에서 가져왔으면 좋겠어.”
“그곳이라면….”
이안의 말에 하르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그는 표정을 지우고 준엄하게 답했다.
“네.”
⚜ ⚜ ⚜
필로렌치아 공작의 집무실에서 다른 증거들을 찾던 리제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쁜 향이 났다. 공기 중에 은은히 퍼져있는 향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냄새 안 나? 불쾌한 냄새.”
“아뇨? 제가 코가 막혀서 못 맡는 걸까요…?”
벨리타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말에 리제아나는 더 묻지 않고 다시 증거 찾기에 돌입했다.
리제아나는 책상 아래의 서랍을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마지막 서랍장을 열던 중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리제아나가 힘 있게 서랍 손잡이를 뒤로 밀자 서랍장이 빠졌다. 그 뒤로 숨겨진 나무 덮개로 된 또 하나의 장이 나왔다.
마지막 서랍장 아래에 숨겨진 부분이 있던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리제아나는 서랍장을 뒤집어 나무 덮개를 빼냈다. 그러자 서류 뭉치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흩어진 종이들을 하나씩 훑어보던 리제아나는 한 장의 종이 위로 적힌 글자를 보고 멈칫했다.
‘텐젤 점령 계획’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 그녀의 손이 절로 서류로 향했다. 종이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과연 놀랄 만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첫 장의 첫 번째 문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텐젤 점령기 제1 계획, 광각초.’
모든 것이 광각초로부터 시작되어 여태껏 이어져 왔던 것이었다. 공기 중에 퍼져있던 냄새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공작이 뒷거래로 팔던 광각초로 만든 향수임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