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새벽부터 일어났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고 밤이 찾아왔다. 이안은 리제아나의 손을 맞고 공작저를 거닐었다.
두 사람은 거대한 나무 아래 함께 자리에 앉았다. 리제아나는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많은 별이 하늘 위로 반짝였다.
“무슨 생각해?”
이안이 하늘을 바라보는 리제아나에게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하루가, 결국 끝나간다는 것이 실감 나서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물음에 리제아나는 생각에 빠진 듯 잠시 침묵했다.
“음… 잘 모르겠어요. 라이핀과 공작이 죽고, 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이안이 제게 청혼한 것까지…. 너무 많은 일이 지나갔어요. 그래서 기분이 이상해요.”
리제아나는 끝까지 공작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그가 어린 그녀에게 한 일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녀는 지금까지 고통받아왔다. 하지만 앞으로 모두 잊어버리리라. 리제아나는 다짐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 그는 편한 곳으로 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그를 깨끗이 잊고 그녀의 삶을 살면 되었다.
그녀 옆에는 이안이 있었다. 그에게 받는 사랑으로 그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고난이 있었지만 덕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걸로 되었다고 리제아나는 생각했다.
“우리 더 행복해지자.”
이안이 말했다.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좋아요. 앞으로 저희에게 마냥 행복할 일만 있진 않겠지만 그것 또한 견뎌낼 수 있겠죠?”
“그럼. 그대와 나, 함께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은걸.”
리제아나의 물음에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리제아나는 별이 뜬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그의 손을 이끌었다.
“이제 슬슬 갈까요?”
“벌써?”
이안이 아쉽다는 듯 잔뜩 울상을 지었지만 리제아나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리제아나는 더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결국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검은 마법진을 펼쳤다.
리제아나는 시무룩해진 얼굴의 이안을 눈치채곤 작게 미소 지었다. 리제아나는 마법진 위로 올라 황궁으로 이동하기 전, 그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이번 봄은 여기서 보낼까요?”
이안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마법진 위로 흘러나오는 빛 때문에 리제아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뿜어져 나오는 빛 사이로 이안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약속한 거다?”
***
마법진 위로 떠오른 리제아나와 이안은 식당 홀에 안착했다.
이안의 의도대로 남아있던 음식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주위가 고요한 것으로 보아 이제야 황궁이 정리되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하르힌에게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
“맞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제아나 님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에 몸을 돌리니 리제아나의 뒤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하르힌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하르힌은 전과 달리 차분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하르힌은 말끝을 흐리며 이안에게 물었다.
“이제 이안 님을 폐하라고 불러도 될까요?”
이안은 모든 것이 끝나면 그때 자신을 황제라 부르라 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그의 허락만이 남았다.
“후…. 좋아, 내가 어떻게 너를 말릴 수 있겠어? 대신 둘이 있을 때만 불러.”
“예, 폐하.”
이안의 허락에 하르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현재 상태를 보고드립니다. 거의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궁인들은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마법사들까지 전부 지하 감옥에 갇혀있으며 말씀하신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살려두었습니다.”
그의 보고에 리제아나의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귀족들만을 본보기로 삼고 다른 귀족들은 살려두기로 그녀는 이미 결정했다. 이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의견에 반대하려 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의견이 굽힐 생각이 없었다. 힘 있는 귀족들이 없는 것만으로도 남은 귀족들은 알아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일 것이다. 리제아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목숨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고?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건가?”
“그게… 조금 복잡합니다만, 마탑주가 마탑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그를 찾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동할 만한 퇴로는 모두 막아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탑주가 마탑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고?”
마탑주로 지냈던 세월을 되새기며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탑주라면 어떤 위기의 순간에서도 마탑과 마법사들을 지켜야 하거늘. 마탑주란 직책을 가진 자가 자신의 나라가 위험에 빠진 때에 제일 먼저 도망이나 가다니.
“놔둬요. 멍청해서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정 찾고 싶으시면 근처 항구를 조사하세요. 하르힌.”
“명 받들겠습니다.”
하르힌이 리제아나에게도 고개를 숙이고는 마법진을 펼쳤다. 그리고 사라지기 전, 리제아나의 왼쪽 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바라보며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하르힌이 사라지자 다시 식당에는 고요한 적막이 맴돌았다. 이안이 준 반지의 의미를 하르힌이 알아챘다는 생각에 리제아나가 얼굴을 붉혔다. 이제 두 사람이 결혼을 앞둔 연인임을 모두에게 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그러다 이안의 물음에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리제아나는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집무실에 가볼래?”
“음…. 아니요, 그러고 보니 아직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곳이 하나 있네요?”
“?”
그녀의 말에 공연히 이안은 물음표를 던졌다.
***
아비드 황궁이 텐젤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필로렌치아 공작까지 당했다는 소문이 아비드 제국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리제아나였다.
황제인 라이핀이 죽었다는 사실은 황궁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제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작의 죽음을 퍼트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빨리!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시간이 없어!”
필로렌치아 공작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의 우뚝 솟은 거대한 저택. 그 저택 아래의 지하실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한때 공작을 도와 퍼품니즈 사업을 도왔던 몇 무명 마법사들이었다.
공작이 당했다면 공작의 사업이나 광각초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그전에 돈이 되는 광각초라도 몰래 빼돌려야 했다.
“소문을 들어보니 제국민들은 건들지 않는다는데 이 틈을 타서 최대한 황궁의 시야에서 멀어져야 해!”
“멍청아 소리 좀 지르지 마! 그러다가 내 정신이 흐트러져 광각초 향에 중독되기라도 한다면 네가 책임질 거냐?”
그들은 약초에 재능이 있어 뒷골목 길드에서 주로 독초 제조를 담당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양귀비와 아직 조합하지 않은 약초들도 일단 가져와! 텐젤 쪽이야 몰래 들어가면 되니까!”
일행의 대장 격인 샥스가 나머지 마법사들을 통솔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텐젤에 들어간다는 거지?”
낯선 목소리에 놀란 샥스가 몸을 돌려 재빠르게 공격할 준비를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순식간에 뒤로 나자빠진 샥스가 낮게 신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샥스가 쉽게 당해버리자 당황한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그들 역시 가볍게 제압당했다.
“음…. 믿지 않겠지만 대화를 나누러 온 것뿐이야.”
“이리 공격부터 하다니. 우리가 어째서 당신을 믿어야 하지?”
이안은 답답한 듯 깊이 눌러쓴 로브를 벗어 내렸다. 그러자 결 좋은 백발이 로브 아래로 나타났다. 이안이 눈을 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러게 이런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그, 그게 무슨!”
“실세가 죽었다고 한들 아랫것들을 그대로 놓아줄 수 없지. 그렇지, 리제?”
이안이 몸을 돌려 그의 뒤에 서 있던 리제아나의 손을 맞잡았다.
“당신들이… 퍼퓸니즈 사업의 주력들이었군요.”
리제아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 그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그녀를 노려보는 자들을 응시했다.
“당신은 누구지?! 이곳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음…. 이래서 내가 혼자와도 된다고 했잖아, 리제?”
당장이라도 리제아나를 죽일 것처럼 눈에 살기를 띠고 다가오는 마법사를 구석에 던져버린 이안이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요, 이안이 있으니까. 그럼 광각초를 제조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당신들뿐인가요? 이 저택과 당신들만 없다면 광각초는 앞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수 있겠죠?”
리제아나의 섬뜩한 말에 그제야 마법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남녀 앞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눈치를 살피던 마법사들은 두 사람 앞으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광각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겠습니다.”
“제 기억을 지워버려도 좋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그들은 그녀와 이안이 누군지도 관심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독초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 은밀한 집단은 반드시 사라져야만 했다.
“맞나 보군요.”
리제아나가 로브를 더 깊숙이 눌러쓰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이안이 그들의 마력을 단번에 봉인시켰다.
“잠, 잠깐!”
샥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안과 리제아나는 사라졌다. 이윽고 거대한 저택은 거센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겨우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마법사들은 허탈한 얼굴로 불길이 거대한 저택을 삼키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