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17)

110화

“저하는 어디 계시지?”

“저하가 아니라 이제는 폐하시다. 호칭을 정정해야지, 우리도.”

남은 아비드의 군사들을 정리하며 미세리타와 위버는 심드렁하게 앞으로 일어날 미래들에 대해 짤막한 담소를 나누었다.

위버는 단호한 미세리타에 입을 삐쭉 내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는 하루아침에 저하의 호칭을 그렇게 바꿀 수 있냐? 정도 없게.”

“정도 없게? 정? 내가 너보단 마탑을 더 많이 찾았어. 너야말로 어디서 뭘 하다 늦었는지 모르겠지만 마탑을 모른 체했던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이제 와서 추억 따위 운운하지 말지?”

“추억을 운운하는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난 그냥… 어느새 정체되어 있던 우리가 한꺼번에 앞으로 나선 느낌이라고.”

미세리타는 자신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한 병사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병사가 저 멀리 날아가게 만든 후 위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저하께 감히 어떤 말도 해드릴 수 없어. 우리는 언제나 변화에 익숙해져 왔잖아.”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겉모습만 보고서 사람들은 그가 과묵하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뚝뚝한 모습과 다르게 위버는 그저 낯을 많이 가리는 남자일 뿐이었다.

그는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제 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꼭꼭 숨겼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 미세리타는 항상 그를 다독여주고 싶었다.

“뭘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냥… 그냥 우리는 우리 대로 계속 삶을 이어나가야겠지.”

“…그렇구나. 그렇지만 난 이제 너무 지쳤어.”

“뭐?”

위버의 말에 미세리타는 높은 목소리 톤으로 되물었다.

그가 지쳤다는 말을 하다니, 항상 감정을 숨긴 채로 꿋꿋이 살아온 그가 지쳤다니. 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쳤다니? 네가 그런 말을 할 줄도 알았어?”

“그동안 용병단들을 도와주면서 여러 곳을 다녔거든. 물론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집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정리했어. 용병단도, 그동안 연을 이으며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과도 모두. 그 시기에 편지가 와서, 그래서 조금 늦은 거야.”

“너….”

“미세리타, 나는 조금 쉴래.”

위버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 밑으로 짙은 눈 그늘이 보였다. 그는 정말 피곤해 보였다.

그때 그들 뒤로 초록색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하더니 한 인물이 나타났다.

본래라면 경계해야 했지만 낯익은 마력이었다. 그들은 쉽게 마법진에서 나타난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하르힌?”

“이안 님은?”

“어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텐젤 제국과 아비드 제국의 황제들은 모두 죽었어. 앞으로 조금 혼란스러울 거야.”

하르힌의 상처를 힐끗 본 미세리타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다쳤어? 치유 마법을 할 줄 아는 애들이 없네. 여기 마법사들에게라도 받을래?”

“됐어. 그나저나 아직도 여기 정리 못 하고 있으면 어떡해.”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말투와 달리 무언가를 해결한 듯 후련해 보였다.

“알겠어. 지금 정리하면 되잖아.”

“…혹시 너희들, 텐젤로 돌아가면 다시 또 여행을 떠날 작정이야?”

“나는 안 떠날 거야. 다 정리했어. 저하께서 황위를 이어받으신다면 이어서 마탑이나 관리할 생각이야.”

미세리타가 대답하기를 망설이자 위버가 나서서 제 의견을 말했다.

“그래서 너는. 너는 어쩔 건데, 미세리타?”

하르힌은 위버를 응시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미세리타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세리타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문화를 배웠다. 여행을 하며 그녀는 누군가가 떠났을 때 그 빈자리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은 앞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며 유일한 기둥이 되어주기도 했으니.

말주변이 없고 의심 많은 이안에게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마탑 인원들뿐이었다. 네르아의 일을 겪은 뒤로 그 주변은 더욱 공허할 터였다.

“안 가. 나도 안 갈 거야.”

마침내 미세리타가 대답하자 그제야 희미한 웃음을 지은 하르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잘 생각했어.”

⚜ ⚜ ⚜

단 한 번도 여제가 될 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감히 그렇게 큰 꿈을 감히 꿀 수 없었다. 리제아나는 그녀에게 닥친 일들마저 벅찼다. 그래서 다른 꿈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벨리타와 이안은 황위 자리에 적합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고 흔들림 없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여제가 된다고…?”

당황한 나머지 말이 제멋대로 나왔다. 혀가 꼬이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가 정말 여제가 될 수 있을까?

“천천히 생각해볼 문제니까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이안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도 장차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될 사람으로서 결정을 신중해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리제아나를 구할 병력을 끌어다 모으기 위해 그는 고민 없이 황제 자리를 받아들었지만.

‘리제아나가, 여제…?’

그녀에겐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안은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가 여제가 된다면 리제아나의 능력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그녀라면 충분히 견뎌낼 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한편 리제아나는 정말 자신에게 여제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욕심이 났다. 아비드 제국의 비리를 어떻게 뿌리째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리제아나보다 그들의 악행을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황제가 오면 그들은 또다시 뇌물로 새로운 황제를 구슬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벨리타, 원로회의 절반이 찬성해야… 그래야 여제가 될 수 있는걸….”

하지만 그녀가 여제가 되기까지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원로회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들은 라이핀을 죽인 리제아나를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리제, 뭐가 걱정이지?”

“네?”

“그깟 아비드의 늙은 노인네들이 모인 원로회 정도야 갈아엎어 버리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잖아요….”

리제아나는 원로회의 귀족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들은 겉으로 달콤한 말들을 잔뜩 늘어놓지만 그것은 사탕발림일 뿐, 모두 교활한 자들이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이안이 리제아나에게 단호히 말을 이었다.

“리제, 강해져야지. 언제까지 저들의 눈높이에 그대를 맞출 생각이야? 황제는 그런 자리가 아니야. 그들의 우위에 있는 자만이 설 수 있는 자리지.”

리제아나가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지만 이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너무 위축되어 있어. 하지만 잘 견뎌냈잖아. 이제 그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즈음은 알 텐데. 나, 하르힌 그리고 위버와 미세리타 모두 그대 편이야.”

그의 눈빛이 너무 올곧아서, 리제아나는 쉽사리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벅찬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점점 빠져나오고 있었다.

여제가 되고 싶다. 그녀는 이 제국을 이어받을 욕심이 생겼다.

“그러니까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질러버려.”

그녀의 눈에서 타오르는 욕심을 본 이안이 그제야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뭐부터 해야 할까요?”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벨리타의 열정 가득한 모습에 리제아나와 이안은 서로를 마주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그들은 응원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묻긴 뭘 물어. 당연히 원로회를 소집해야지.”

리제아나가 헝클어진 긴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높게 묶으며 당차게 말했다.

⚜ ⚜ ⚜

아비드의 함락 소식이 너무나도 빨리 퍼진 바람에, 원로회들은 모두 당황했다.

게다가 원로회 소집이라니, 그들은 부리나케 저택에서 나와 황궁으로 급히 향했다.

황궁 주위는 텐젤 병사들이 이미 장악한 지 오래라 흉흉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목숨부터 부지하고 봐야 하니 그들은 빠르게 황궁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루아침에 아비드가 함락되고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다니요!”

원로회의 2인자였던 셍상스 후작이 불쾌하게 헛기침을 연달아 내뱉으며 아직까지 공석인 황제의 자리를 가리켰다.

“도대체 누가 황족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른 거랍니까? 그 마탑의 멍청이 방계가 우리를 부를 수도 없을 터인데. 게다가 텐젤 병사들이 우리를 잡지 않다니. 무언가 이상합니다!”

수염이 잔뜩 난 턱을 매만지며 칼슨 백작이 후작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탁자를 두어 번 큰 소리로 두드렸다.

“공작은? 그러고 보니 필로렌치아 공작은 어디 있답니까? 황제 폐하도 돌아가신 마당에. 혹시 공작이 우리를 소집한 건 아닐까요?”

“모르는 소리! 공작도 황제 폐하를 지키려다 끝내 돌아가셨다는 소문 못 들었소? 우리야 저택에 있었다지만 공작은 매일 황궁을 찾았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모았단 말입니까?”

원로회 귀족들은 모두 아비드 베네딕트 황가의 문양이 찍힌 편지를 받고 급히 황궁을 찾았다. 하지만 편지에는 수신인이 적혀있지 않아 누가 그들을 불러냈는지 알 수 없었다.

웅성거리며 불안에 떨고 있는 원로회 귀족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때 즈음, 회의실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목이 단숨에 한곳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들은 입을 벌린 채로 쉽사리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리, 리제아나 황태자비 마마?”

셍상스 후작이 정적 속에서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모두 오랜만이군요.”

선두로 선 리제아나 뒤로 처음 보는 남성과 시녀가 서 있었다. 당당한 자세로 그들을 훑어보는 리제아나의 한쪽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다.

“그, 그것이 도대체… 리제아나 님은 어디에 계셨…. 저희는….”

후작은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거만하게 웃은 리제아나가 검을 들어 보이며 고갯짓으로 텅 빈 왕좌를 가리켰다.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호칭 정리 하나만 해두고 시작할까요?”

“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몇몇 이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또 다른 이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들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리제아나는 그들을 지나쳐 걸어 마침내 왕좌 앞에 멈추어 섰다.

“황태자비 마마?”

“황태자비가 아니라 황제입니다. 폐하라 부르세요.”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이안은 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 그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왕좌를 뒤로 빼주었다.

리제아나는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하곤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검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이제부터 아비드의 황제는 접니다. 불만이 있다면 말하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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