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네가 이래 봤자 아무도 너에게 관심 없어. 심지어 폐하조차도 말이지.”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언젠간 돌아오실 리제아나 님을 위해 청소할 거야.”
“으구, 똥고집.”
벨리타가 청소 도구를 들고 아무도 없는 궁을 찾아갈 때면 다른 동료들은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곤 했다.
“똥고집 아니야. 언젠간 정말 돌아오실 거라니까?”
“그래 뭐…. 어쨌든 폐하께서도 얼른 새 사람을 찾으셔야 할 텐데 말이야. 델리사 님이 훨씬 낫지 안 그래?”
“조용히 해. 쟤 울겠다. 풉."
리제아나의 실종 소식 이후로 황궁 안의 사람들은 누구도 리제아나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시종들은 모두 라이핀이 새로운 사람을 맞길 기대했다. 언제나 그들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벨리타뿐이었다.
라이핀이 그녀를 델리사에게 배정했을 때, 그녀는 거부하고 싶었으나 황제의 명에 반한다면 쫓겨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그녀는 버텼다. 리제아나가 언젠간 돌아올 그 날을 위해.
벨리타가 리제아나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 계기는 우연히 그녀의 눈물을 보았을 때였다.
“황태자비님, 황태자님께서….”
그날, 벨리타는 일라이자로부터 황태자가 전달하라 명한 서류를 받아들고 리제아나의 집무실을 찾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왔던 리제아나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태연하게 맞받아칠 준비가 되어있는 강한 사람이었다.
라이핀이 델리사를 데리고 왔을 때도, 그녀를 방치하고서 서류만 보낼 때도 리제아나는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면 때문에 그녀를 향한 궁금증이 자라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
평소와 달리 집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벨리타가 조심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문 사이로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여 누군가 들을까 당황한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은 벨리타, 한 명뿐이었다.
바늘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냉정한 얼굴을 하던 그녀가 그리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다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왜…?”
벨리타는 서류 뭉치를 꽉 끌어안고 문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리제아나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순간, 벨리타는 스스로 다짐했다.
이 드넓은 황궁에 제 편 하나 없는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살펴야겠다고.
참으로 인간이란 간사한 종족이었다. 리제아나를 잘 알지 못하였을 때는 본래 다른 이들이 욕하는 대로 벨리타 역시 리제아나가 악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저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툰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황태자비 전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흐느낌 소리가 잦아들자 그제야 벨리타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방에 들어가자 리제아나는 올곧은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류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인기척에 그녀가 고개를 올려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조금 붉었다. 만일 그녀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녀가 울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테다.
“수고했어, 어서 가봐.”
“…네!”
리제아나는 짧게 대답하며 벨리타가 건넨 서류뭉치를 건네받았다. 벨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위치가 되지도 못했다. 벨리타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녀가 라이핀이 아닌 진정으로 그녀를 아껴주고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왔다.
리제아나가 진심으로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래서 리제아나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눈물부터 솟아올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돌아오실 거잖아요. 그죠? 돌아오셔야 하는데….”
리제아나가 없어진 후 궁을 찾던 시녀들의 발걸음이 끊기고 먼지가 차츰 쌓이기 시작했다. 델리사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중, 델리사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자 벨리타는 기뻤다.
델리사의 옆에 있으면서 리제아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녀는 다시 깨달았다.
벨리타는 진심으로 리제아나가 돌아오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성실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지 델리사가 함께 따라가겠냐고 물었지만 벨리타는 그녀의 말을 정중히 거절했다.
벨리타는 많게는 한 달에 세 번, 적어도 한 번은 황비궁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벨리타는 리제아나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 ⚜ ⚜
“리제아나 님…. 너무나도 뵙고 싶었습니다.”
벨리타는 잔뜩 울음을 머금으며 눈물을 훔쳤다.
리제아나는 이런 벨리타의 속사정을 몰랐으니 그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지만 그래도 벨리타는 상관없었다.
드디어 그녀의 바람대로 리제아나가 돌아왔다. 그것으로 되었다.
“나를? 네가 나를 모신 것은 내가 황태자비가 되고 난 후 짧은 시간 동안일 텐데…?”
“네. 그래도 리제아나 님께서 간절히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황태자비궁에 어울리시는 분은, 리제아나 님뿐이니까요. 이제 황후마마라 칭해야….”
“잠시만.”
그때 이안이 손을 들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벨리타가 황후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급격히 그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아비드의 황후로 리제를 칭한 거야?”
“네? 네….”
그제야 리제아나의 옆에 있던 남자의 존재를 깨달은 벨리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국적인 외모의 남자는 붉은 눈과 백발의 머리가 아주 잘 어울렸다. 이안을 바라보며 벨리타는 감탄했다.
“장롱 안에 숨어있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너희는 더는 황제가 없는, 갈 곳을 잃은 제국민들이야.”
“네? 그게 무슨….”
“너희 아비드 제국의 황제는 죽었다.”
“네?”
믿을 수 없었는지 벨리타가 동그란 눈으로 리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사실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맞아. 폐하는 서거하셨다. 아비드는 더는… 예전의 아비드로 있을 수 없겠지.”
리제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이핀의 방계혈족을 찾아서 황제의 자리에 세운다고 해도 아비드 제국이 곧바로 바뀌긴 어려울 것이다. 썩은 물은 그대로 썩어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부패한 황궁을 바꾸고 비리를 저질러왔던 귀족들을 모두 몰아내기까지 갈 길은 아주 멀었다.
“설마… 우는 거니?”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인 벨리타가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자 걱정스럽다는 듯이 리제아나가 조용히 물었다.
“우냐고요…?”
그녀의 걱정과 달리 벨리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리제아나가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벨리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전혀요! 라이핀 폐하가 없다면 이제는 제약이 없는 거잖아요!”
“뭐?”
벨리타가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것을 알았으나 고국이 무너진 일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눈을 반짝이며 한 걸음 더 리제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간 벨리타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이안이 그녀를 막으려고 했지만 리제아나가 고개를 저어 벨리타가 하는 대로 두었다.
“솔직히 저는 라이핀 폐하보다 리제아나 님, 아니 전 황태자비 마마께서 이 나라를 이끌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었거든요!”
“벨리타? 그게 무슨 소리야? 잠시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벨리타가 곧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뜸을 들이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만일 다른 이가 아비드의 황위에 앉는다면 저는 리제아나 님께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녀의 말에 적막만이 공간을 메웠다.
리제아나도 이안도 함부로 그 말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오직 벨리타만이 홀로 기뻐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여제가 되라는 말…인가?”
“못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동안 라이핀 전 황제 폐하의 일을 보아왔던 사람도, 아비드 제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리제아나 님뿐인데요.”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해. 알잖아, 심지어 이곳 시종들까지 나를 여전히 악녀라 욕하고 있어.”
혼란스러운 낯빛을 하며 리제아나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이곳에서 악녀로 칭해질 뿐만 아니라 지금은 조국을 배신한 배반자로 여겨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요? 저는 황족이 아니라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간사하다는 것은 알거든요.”
“?”
“사람들은요, 특히 저희 제국민들은 누가 황위를 잡았고 또 누가 누굴 내쳤는지 큰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지에 대해 반응이 달라질 테죠.”
리제아나는 벨리타의 눈을 맞추고 서서 계속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리제아나 님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약속드릴 수 있어요. 여제가 된다면 그 능력이 빛을 볼 기회를 얻겠죠. 보여주세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아비드 제국민들에게도, 그 능력을요.”
자신의 능력을, 제국민들에게 보여 달라는 말이 왜 그렇게 리제아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찌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못 하시겠어요! 리제아나 님인데.”
벨리타의 말은 리제아나의 어깨 위의 있던 짐을 단숨에 녹여버렸다. 리제아나는 밀려오는 눈물을 참느라 조금은 애를 먹어야 했다.
“어째서 나를 그렇게 믿는 거야?”
매번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비난받아왔던 리제아나로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사랑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의문을 던지는 그녀에 이번에는 이안이 답해주었다.
“그대는 왜 스스로를 부정하는 거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다재다능한 사람인걸.”
이안이 환히 웃어 보였다.
어쩜 그는 웃음만으로도 사람을 안정시킬 수 있는지, 리제아나로서는 아직도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