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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108/117)

108화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라이핀이 죽은 이후 텐젤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순식간에 성을 장악했다.

텐젤의 기습을 예상치도 못했던 아비드 제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라이핀의 죽음 소식까지 전해지자 대부분 항복을 외치며 무기를 버렸다. 끝까지 싸우는 이들도 있었으나 주인을 잃어 더 대항할 힘을 내지 못했다.

“다… 다 끝났네요….”

리제아나는 물끄러미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평생 그녀를 뒤쫓으며 괴롭힐 것만 같았던 그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는 그 무엇도 없을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자유였다.

“윽-”

긴장이 풀린 리제아나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쓰러질 뻔한 그녀의 몸을 이안이 부축했다.

“리제, 조금 쉬어. 그대는 오늘 너무 무리했어.”

“괜찮아요…. 그냥, 그냥 조금만 더 보고 싶어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눈치챈 이안은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부축하고 섰다.

과거의 그녀가 황태자비로서 섰던 아비드 제국의 궁이 텐젤의 손에 넘어갔다. 그녀는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황궁을 멀거니 지켜봤다.

아비드 제국을 무너뜨린 텐젤의 편에서 서 이 모습을 지켜보니 리제아나는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이안은 리제아나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조국이 무너진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여기서요?”

“침실에만 줄곧 있었을 거 아니야. 이제 상황이 점점 정리되어 가고 있기도 하고.”

이안의 제안에 리제아나는 고민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제가 머물었던 궁에 가보고 싶어요.”

그녀는 한때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여 걷는 것조차 힘들까 그는 순간이동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리제아나는 거절했다. 온전히 제 발로 걷고 싶었다.

이안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던 리제아나는 문득 궁의 시중들이 모두 자신을 보며 소곤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텐젤의 군대에 이미 항복을 하고 잡혀 있던 이들이었다. 겁에 잔뜩 질려 몇몇은 울고 있었지만 리제아나를 알아본 그들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황태자비님이 아비드를 공격할 군대를 이끌고 온 건가…?”

“자신의 고국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다니. 소문대로 악녀가 따로 없어….”

비난, 질타. 리제아나가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것들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몸이 떨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모르는 그들에겐 그녀는 나라를 배신한 변절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리제아나는 주먹을 쥐고서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리제아나는 그들의 소곤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했지만 이안은 그렇지 못했다.

“저자들이-”

리제아나의 몸이 떠는 것을 눈치챈 이안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리제아나가 그를 막아섰다.

“이안, 전 괜찮아요. 그들을 두세요.”

“포로가 된 이들이 건방지게 당신에 대해 이야기한 걸 그대로 둘 순 없어.”

그의 말에 시중들이 당황하며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금방이라도 그들을 베어버릴 듯한 기세에 그들은 몸을 떨었다.

“왜 참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모든 사람이 이안 같지 않으니까요.”

이안이 살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리제아나는 조용히 그에게 속삭이는 것으로 다시금 그의 주의를 끌었다.

“나는 괜찮아요.”

“그런 말을 해도 진심이 아니라는 것 알아.”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래요?”

“음….”

그녀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말처럼 들릴 뿐이었다. 이안은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이내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그는 리제아나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저 남자, 텐젤의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우리 이야기를 들은 게 틀림없어….”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엇 잠깐, 리제아나 님이….”

속삭이며 다시 말을 주고받던 이들 중 한 명이 리제아나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왜? 더 말해도 좋은데 말이야. 더 얘기해.”

리제아나가 그들 앞에서 서자 시종들은 놀라 몸을 움츠렸다.

“리, 리제아나 님….”

“앞에서 하지 못할 이야기라면 뒤에서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저흰… 그저….”

“제국의 앞날에 대한 숭고한 고민이라면 충분히 나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리제아나가 노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너희들은 너희 위치에서 몸부터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리제아나가 검을 뽑아들었다. 놀란 시종들은 숨을 들이키며 바닥에 몸을 숙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검 앞에서 한 시종은 아예 눈을 감기까지 했다.

스릉-

그러나 그녀의 검날은 시종들을 향하는 대신 그들의 발치 아래로 떨어졌다. 검이 스치는 소리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머. 목숨이 구한 줄은 아는구나? 앞으로는 입을 조심하렴. 언젠가는 그 입이 네 명을 재촉할 날이 올 것 같으니까.”

리제아나의 흔들림 없는 단호한 목소리에 시종들은 긴박하게 뛰는 가슴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깊게 고개를 숙여 수긍의 뜻을 표했다.

이는 완벽한 리제아나의 승리였다.

⚜ ⚜ ⚜

“으으 창피해. 모두 앞에서 그렇게 화를 내다니.”

리제아나는 아까 전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다시 붉어진 얼굴로 재빠르게 걸었다.

“그러면 뭐 어때. 이제 그대에게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이안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가볍게 툭 쳤다.

리제아나는 어그러진 웃음으로 답했지만 사실 그녀도 속 시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곳은 왜 오자고 한 거야?”

“작별 인사를… 해두고 싶어서요.”

리제아나가 떠나고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황태자비궁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떠난 공간에는 시린 공기만 맴돌았다.

“작별 인사라…. 무엇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거지? 아비드의 황태자비였던 그대에게?”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옛 모습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비드의 황태자비였던 그녀에게 인사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에 갇혀있던, 여전히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예전의 자신에게 할 마지막 인사였다.

불행한 자신의 삶에 울었던 자신에게, 공작이 무서워 두려움에 떨었던 자신에게, 라이핀에게 버려질까 초조했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현실에 절망했던 자신에게.

“리제아나 아비드 베네딕트, 안녕.”

결혼하고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리제아나는 방안을 보며 불행했던 그녀의 과거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리제, 나 할 말이 있는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이안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언제까지 숨길 수 없었다. 텐젤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그녀에게 말해야 했다.

“무엇인데요?”

“텐젤로 돌아가면 난 더 이상 공작이 아닌….”

이안이 머뭇거렸다.

“공작이 아닌?”

“공작이 아닌… 텐젤의 황제가 될 거야. 황제를 죽이고 나서 깨달았어, 황제에겐 혈족이 없는 데다가 나보다 텐젤에게 헌신했던 자들도 없으니까.”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리제아나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겨우 황비라는 직책에서 벗어난 그녀였기에 어쩌면 다시는 정치에 뛰어들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

리제아나는 한참을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이안 앞에서 멈추어졌다.

“황제…가 되신다고요. 그것도 텐젤의 황제 폐하가….”

리제아나가 중얼거렸다. 이안에게 하는 말이 아닌, 자신 스스로에게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

“나는… 나는 그대와 남은 삶을 함께하고 싶어. 지금 이 감정이 가끔 틀어질 때도 있겠지만 결국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하지만 선택은 그대의 몫이야.”

“이안을 따라가거나 이곳에 남아야겠죠.”

“이곳에 남다니?”

이안이 눈썹을 구겼다. 단 한 번도 그녀가 이곳에 남으리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졌던 일만으로 그는 충분히 괴로웠었다. 그녀가 곁에 없는 불안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리제아나가 그의 물음에 답을 하려 할 때였다. 장롱이 열리며 누군가 급히 숨을 헐떡이며 튀어나왔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리제아나를 감싸 안으며 경계했다. 리제아나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리제아나는 금세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리제아나 님!”

장롱에서 튀어나온 여인은 리제아나를 보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구지?”

이안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여자를 살폈지만 분명 그의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이곳에 사람이 남아 있었다니. 어서 병사를 불러야겠군.”

“잠, 잠시만요!”

이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부르려하자 여인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그를 만류했다.

“리제아나 님! 접니다! 한때 리제아나 님을 모셨던 벨리타요!”

“벨리타!”

리제아나가 반가움에 작은 탄식을 터트렸다. 벨리타, 그녀가 황비인 시절 유일하게 그녀를 챙겨주던 시녀였다.

“벨리타, 어째서 여기 있는 거니?”

“무서워서… 숨어 있었어요…. 리제아나 님이 계셨던 황태자비궁을 청소하고자 몰래 숨어들었었는데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청소? 이곳은 아무도 쓰지 않잖아?”

그녀를 감싸고 있는 이안의 품에서 조심스레 빠져나와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리제아나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한 달 주기로 매일 이곳을 청소하거든요. 전 언제나 리제아나님이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순수하게 웃는 벨리타를 보자 갑작스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자 이안이 다시금 리제아나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도 아비드에 당신을 아꼈던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의 말에 리제아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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