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제 끝났구나….”
축 늘어진 공작은 숨소리 없이 가만히 쓰러져있었다. 언제나 강인해 보이기만 했던 그가 미동도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그렇게 있었다.
리제아나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삼키고는 라이핀을 향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난 이 제국의 황제라고, 리제아나! 황제!”
“당신이 죽고 나서 이 제국을 돌볼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아요? 누군들 당신보다는 나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 하는 거지? 나만큼 제국을 잘 돌볼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악녀라고 소문난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당신이? 우스운 소리를 하네요. 이때껏 이 아비드 제국의 재정은 내가 직접 꾸리지 않았습니까? 당신 곁에서 개처럼 자라온 세월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었지. 그러니 악녀는 훈장일 뿐이야.”
리제아나가 손을 들어 무심하게 말했다.
라이핀은 공작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녀가 라이핀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때 그녀는 그를 위해 일하는 인형처럼 살아왔다. 그것이 사랑하는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잖아, 리제아나.”
그동안 그녀가 해온 것들을 인정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라이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그대가 한 일은 모두 제국을 위한 일이었잖아. 당신은… 황태자비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고.”
“…뭐라고?”
리제아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분노가 들어찼다.
“그러는 당신은 무엇을 했지?! 내가 당신을 위해 그리 노력할 때에!”
“난 그저 이 자리에 무사히 있는 것만으로도.”
“…라이핀!”
“리제아나. 당신 지금 너무 흥분했어. 조금 그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은 어때?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는 거야. 천천히. 응?”
라이핀은 그녀가 동요하는 틈을 타 타협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안이 있었다. 이안은 리제아나의 왼쪽 손을 잡고 끌었다.
“리제, 혹시라도 힘들다면.”
“아니요. 괜찮아요, 이안. 그리고 라이핀. 당신과 할 이야기는 더 없어. 우린 이미 예전에 끝난걸.”
리제아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에게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그에게 사실을 알려줄 차례였다.
“물론 나에게 일을 떠넘긴 것만 말고도 당신은 다양한 일들을 했잖아. 공작이 벌인 퍼퓸니즈 사업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되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어떻게 퍼퓸니즈 사업에 대해 알고 있지? 라이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깨달았다. 리제아나가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유통 업체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망가트리고 있었다는 것을.
“너, 너였구나. 텐젤에 광각초와 관련한 정보를 흘린 사람이!”
라이핀이 노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내가 그랬지.”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감히!”
“감히라니! 당신이 나에게 감히란 말을 꺼낼 자격이 있나?! 그것뿐일까? 당신은 셍상스 후작에게 황실 재정 후원을 약속받고 후작 영식을 근위대 대장으로 세웠었잖아.”
“그건!”
“그것도 모자라 방계 혈족에게서 돈을 받아먹고서 마탑주의 자리를 흔쾌히 내주었던 당신이잖아!”
“!”
“또 전에는 델리사 영애에게 빠져서는 델리킨 영지의 원두를 주원두로 내세우다니. 참으로 멍청한 판단이었지.”
리제아나가 라이핀이 저질러온 짓들을 폭로하자 라이핀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난….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젖혀 허공을 바라보다 말을 머뭇거렸다. 그는 끝까지 제 입 밖으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요. 당신이 하려는 그 말, 절대로 하지 마.”
리제아나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잘 가요.”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지치게만 했다. 리제아나는 더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그에게 겨눈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숨을 쥐고 있는, 이전의 처지와 반대된 상황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라이핀이 힘없이 쓰러져 원망스러운 한편 간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미래가 바뀐 것이다.
“리제아나, 잠시만!”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리제아나는 결국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경험했던 고통과 절망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가 받은 모든 상처는 다시 새 살이 아물지 못할 정도로 해어지고 곯아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쿨럭-”
그녀의 검을 맞은 라이핀이 자신의 피가 묻은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 밖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피를 손으로 힘없이 막던 그는 마지막으로 리제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랑이란 단어로, 우리는… 우리는 영원히 정의될 수 없겠지.”
한 단어씩 힘겹게 내뱉은 라이핀은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구겼다.
“맞아요. 영원히, 우리는 서로에게 악연으로 기억될 거야. 첫 단추부터 어긋났던 우리였으니까.”
“리제아나 당신은…. 당신은….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았구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리제아나는 그런 라이핀을 향해 마지막으로 제국의 인사를 한 후, 검을 바라보았다. 검을 잡은 손끝이 잘게 떨고 있었다.
“떠는 거야?”
어느새 이안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물었다.
“힘들었어요….”
“역시 내가 할 걸 그랬나.”
“아뇨…. 이제야…. 이제야 모든 게 끝나는 기분이 드네요.”
리제아나는 이안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폭풍우는 멈췄는지 어두운 구름 사이에 가려져 있던 찬란한 햇빛이 구름 사이로 내려와 그들을 비추었다.
“수고했어.”
이안은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았지만 결국 답은 하나였다. 결국 자신의 악연을 모두 끊어낸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 그뿐이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이안이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저하!”
그때 침실이 열리면서 미세리타와 위버 그리고 그의 기사단의 기사들이 다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안이 그녀를 안지 않았다면 그대로 밀려날 뻔했다.
“헉!”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연 위버는 문 너머의 광경에 놀라 두 손을 입으로 막았다. 딸꾹질하며 서로를 끌어안은 리제아나와 이안을 바라보는 위버 뒤로 미세리타가 섰다.
미세리타가 위버의 등을 가볍게 때리며 그를 타박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천천히 가자고 했는데 이놈이 하도 걱정해서요. 옆에 계신 분은 리제아나 님이시죠? 저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갑작스러운 미세리타의 말에 당황한 이안이 답지 않게 눈을 뻐끔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미세리타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듣던 대로 저하와 잘 어울리십니다.”
그녀의 칭찬에 부끄러운 듯 리제아나는 수줍게 웃었다.
“그런데 하르힌은?”
그제야 선두로 그들의 앞에 서 있어야 할 하르힌이 보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이안이 물었다.
“어? 그러고 보니 하르힌은 어디 갔지?”
위버도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며 똑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하르힌은.”
그리고 미세리타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르힌은 아까 저희보고 먼저 저하께 가라고 했습니다. 어디 갔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음… 놔둬.”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말했다.
“어디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 ⚜ ⚜
그 시각 하르힌은 로브를 쓴 채로 아비드의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큰 소란이 있었는지 거리는 모두 엉망이었다. 거리를 얼마 걷지 않아 하르힌은 금세 찾던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방울이 젖은 머리칼을 타고 볼로 흘러내렸다. 하르힌은 물기를 털어내고 부서진 잔해가 가득한 시내 한복판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 전의 싸움에서 다친 상처를 잡고 하르힌은 걸었다. 그새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위버와 미세리타가 만일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 터였다.
“젠장.”
하르힌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사건 현장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과 함께 모인 여럿의 마법사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내어 그가 서 있는 곳과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을 향해 작은 폭발을 일으킬 정도의 마력을 쏘았다.
예상대로 당황한 병사들과 마법사들은 그곳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골목길에 숨어있던 하르힌은 그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거리로 나왔다.
그는 무너진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미스 헤버넷의 샬롱’이라 쓰여 있는 고급스러운 손글씨와 다르게 가게는 절반이 무너져 있었다. 그 잔해 아래로 그가 찾던 사람이 있었다.
“안녕, 네르아.”
하르힌은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는 차오르는 눈물을 쓰게 삼키며 겨우 네르아의 이름을 내뱉었다.
“결국 이런 최후를 맞는 거야? 네르아.”
언제부터 네르아가 나쁜 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만일 알았다 해도 그가 막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이 하르힌을 더욱더 괴롭게 했다. 그동안 네르아를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라 생각했으면서 정작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가 미웠다.
그가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한 것처럼 그녀 또한 그랬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호기심에 대한 답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진심을 들을 자신도 없었다.
“네르아, 나 너무 힘들어. 너도 힘들었지? …돌아가자.”
“….”
“돌아가자, 집으로.”
아무 대답 없는 그녀를 들어 올려 품에 안은 하르힌은 깨달았다.
지금껏 그의 볼을 타고 흐르던 것은 물방울이 아니었다. 바로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