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사브릴을 처음 만났던 날은 유난히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아비드 제국의 무역을 담당했던 당시의 필로렌치아 공작은 사절단과 함께 직접 텐젤로 넘어갔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텐젤과 아비드의 무역 협상을 마칩니다.”
그는 무역 협상을 벌이기 위해 총 한 달 동안 텐젤에 머물렀다. 매일 주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 참여하는 시간 외에 그는 자유롭게 황궁 안을 활보할 수 있었다.
정착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회의에서 말도 꼬이지 않고 술술 나왔다. 모두들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었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난 회의에 그는 유유자적하게 황궁의 복도를 구경했다. 그는 복도에 장식된 커다란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보석 중, 유난히 반짝이는 주황빛 보석이 그의 시선을 끌어 저도 모르게 응시하던 차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등 뒤로 들려왔다.
“아비드 제국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첩자입니까? 빠르게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근위대를 부르겠습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앞에 여성의 미모를 보자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 그가 바라보던 주황빛 보석과 같은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다홍빛 눈동자는 그녀의 머리칼과 더욱 잘 어울렸다.
“그게… 그러니까."
그가 이름 모를 여인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못하자 여인은 눈썹을 모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르겠습니다.”
“아, 아니 잠시만. 미안하네. 나는 아비드에서 온 사절단 중 한 명인 로버트 데 필로렌치아라고 하네. 신원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 근위대에게로 날 데려가도 좋아.”
“아비드에서 온 사절단이요?”
공작이 서둘러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여인은 조금 전 경계하던 모습과 달리 눈을 반짝였다.
“왜 그러지?”
“아비드라는 국가에 대해서 듣고 싶어서요. 저는 이곳에서만 있었거든요. 게다가 아비드는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방문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멋대로 돌아다닌 것에 대해 함구해줄 테니까 아비드에 대해서 좀 말해줄래요?”
그가 황궁을 돌아다닌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그를 꾸짖을 자격은 없었다. 원할 때 황궁을 구경해도 좋다는 말을 황제가 앞서 했었으니.
하지만 공작은 그녀의 말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혹여 그녀가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봐 가만히 웃기를 택했다.
날이 너무 좋아서, 그 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외모에 취해서 공작은 흔쾌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도 여인은 여전히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나중을 기약하며 공작은 자연스레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체리 같은 빨간 입술을 움직였다.
“내일 되면 아시게 될걸요, 로버트?”
다음 날 회의에서 황제는 자신의 동생인 사브릴 황녀를 데리고 왔다.
깜짝 놀라 휘둥그레 눈을 뜨고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에 사브릴은 웃을 뿐이었다.
얼마 전, 공작은 전 부인과 이혼했다. 재산만 축내는 쓸모없는 그녀와 드디어 헤어진 그는 사브릴에게서 새로운 매력을 느꼈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가요?”
“어떤 이야기든, 듣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만 해주세요. 무엇이든, 황녀님께서 원하시는 이야기는 다 해드릴 테니까요.”
“음… 그럼 오늘은 아비드 말고, 당신만 거북하지 않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녀는 황녀답게 그에게 예절을 차리며 물었다. 그녀의 몸에 배인 귀티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제 이야기는 별거 없습니다. 지루해하시지만 않는다면 다행이겠지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로버트,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뭐든지 재밌어요.”
“하하하.”
낮은 웃음소리가 둘만의 장소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제 그가 다시 아비드 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일주일의 시간만이 남았다. 그가 아비드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다.
어쩌면, 두 사람은 앞으로 평생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공작은 더더욱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내 이야기를 오늘 해줄 테니, 내일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공작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음… 좋아요. 항상 나만 들었으니까 내일은 내가 이야기할 차례네요.”
다음 날, 이슬비가 내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밀스레 만남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꼼짝없이 황궁의 마구간에 갇히고 말았다.
사브릴은 약속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그녀는 영리했다. 그녀는 회의에 자주 참석해 의견을 내곤 했다. 그녀의 의견은 여느 관료 못지않게 훌륭했다. 하지만 명석한 모습과 달리 그녀는 황제에게 억눌려 황실 내의 입지가 많이 약했다.
“저는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로버트, 그 회의에 당신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을 낮추는 그녀의 모습에 공작은 다시 한번 반하고 말았다. 공작은 분위기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으면, 나랑 같이 아비드로 넘어가겠습니까? 내가 잘해줄게요. 그곳에서도 당신은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황녀님, 아니 사브릴.”
“하지만 나는….”
“모든 게 괜찮을 거예요. 나만 믿어요.”
사브릴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입술을 움직였지만 공작이 그녀의 입을 제 입술로 부드러이 막았다.
그 섣부른 판단으로 점차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점점 그가 아비드 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일이 바빠 사브릴을 자주 볼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아비드 제국의 공작이나 사브릴은 타국, 텐젤 제국의 황녀였다. 그가 그녀를 아비드 제국으로 데려가려고 한 것을 누군가 알기라도 한다면 그는 텐젤 제국에서 죄인이 되어 다시는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쩌지…. 어쩌지….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을 텐데…. 그래…. 어차피 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야. 그렇잖아?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도 알겠지.’
떠나기 전날 밤, 그는 사브릴과 몰래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가지 않고 일에 열중했다.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제 이 성과를 아비드 제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제국 내 그의 위치는 더욱 높아질 터였다.
하지만 그날 밤, 공작의 방에 그가 바라지 않던 손님이 찾아오고 말았다.
“로버트.”
로브를 쓴 여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서류로부터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그가 그토록 피해 다녔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사, 사브릴 황녀님….”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갈 수 없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버리고 가실 순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요, 황녀님. 당신은 이 제국의 황녀십니다. 저는 일개 공작일 뿐이고요.”
“…나 임신했어요.”
그 한마디에 공작이 애써 유지해왔던 미소가 무너져버렸다. 감정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제 아이가 아닐 수도-”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이 아이를 당신 아이라 온 제국에 퍼트릴 겁니다. 당신의 아이가 틀림없어요.”
“황녀님!”
“나를 제발… 이 제국에서 구원해주세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공작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공작은 사절단 중 가장 믿을 만한 자를 불러 사브릴을 아비드로 돌아갈 일꾼 중 하나로 기록하게 했다.
사브릴이 그를 따라 아비드로 내려간 뒤, 두 사람 사이에서 리제아나가 태어났다. 공작은 아들이 아닌 딸의 출산에 매우 실망했다.
이윽고 텐젤이 황녀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텐젤과의 무역 협상 또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협상이 결렬된 모든 책임은 공작에게로 향했다.
공작의 분노는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사브릴과 그녀의 아이로 향했다.
⚜ ⚜ ⚜
“부질없는 인생이지. 사람은 말이다,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나 권위를 쟁취하던 나에게 절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공작은 허탈하게 웃으며 흰 머리가 곳곳에 있는 검정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사랑이라. 사랑…. 그래 사랑이란 건 참 아름답지.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어. 약점이 되니까.”
“하고 싶은 말이 그래서 뭡니까.”
리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는 네 엄마를 사랑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너무 찬란해서 아직 내 뇌리 안에 버젓이 박혀있지.”
“역시 당신이지?! 그런 사람이 왜 어머니를 죽였어요? 어떻게 그래. 어떻게 사람이 그래!”
“텐젤에서 낌새를 맡았는지 세작을 내려보내기 시작하더군. 황제도 무역 협상 건이 체결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분노하고 있었지. 황제가 탓할 대상은 오로지 나였어.”
“….”
“그래서 황제의 신뢰를 쌓기 위한 방법을 몰두하다 퍼퓸니즈와 광각초라는 아이디어를 냈지. 그런데 그거 아니? 그 계획은 사브릴로부터 나온 거란다.”
공작의 말에 리제아나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광각초를 만들 재료까지 친절히 알려주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했지. 광각초를 완성한다면 자신이 첫 시험자가 되게 해달라고.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말…도 안 돼.”
리제아나가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공작은 피식 웃으며 손을 가볍게 양옆으로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대신 리제아나, 너만큼은 자신과 똑같이 살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더구나. 그래서 난 널 더 강하게 키울 수밖에 없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이안이 참다못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공작의 시선은 여전히 리제아나를 향했다. 이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안을 응시했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의 방식이었다. 황제와의 결혼까지 성사시켰으니 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셈이야.”
“무슨 헛소리를!”
“하지만!”
리제아나는 눈물을 흘리며 반박하려 했으나 공작이 더 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지만 난 아니었다. 너에게 작은 애정조차 느껴본 적 없다. 내가 사랑한 여자는 사브릴이었지 그 아이까지 사랑할 수 없었다.”
“어쩜 그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사람이 어떻게 그래!”
“끝까지 멍청하구나.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기는. …폐하,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공작은 이윽고 제 품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제 운명을 끝내 받아들였다. 제 몸에 칼을 꽂은 공작이 털썩 쓰러져 눈을 감았다.
“히익! 공작!”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라이핀이 공작을 불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다니…. 용서 못 해….”
이안은 리제아나가 무너질 줄 알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검을 놓지 않았다. 팔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그녀는 더욱 검을 세게 쥐곤 방향을 틀어 다시 라이핀을 내려보았다.
“라이핀, 너 역시도 마찬가지다. 절대 용서 못 해.”
리제아나가 서늘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