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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5/117)

105화

“리, 리제아나!”

라이핀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질끈 감은 그의 눈에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어떻게 당신이…!”

하지만 그의 입에선 끝까지 리제아나가 듣고 싶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 그저 사과 한마디면 되었다. 장황한 사과는 필요 없었다. 단지 그가 ‘미안해.’, 그 한마디만 하더라도 리제아나는 가슴에 품었던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끝까지… 당신은.”

리제아나는 분노하며 검을 강하게 쥐어 잡았다. 검을 쥔 그녀의 손이 얕게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높이 검을 쳐들고 마무리를 지으려 할 찰나였다.

“페하! 거기 계십니까!”

누군가가 라이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침실의 문이 열렸다.

“누구…?”

이안은 갑작스레 찾아온 침입자를 경계 어린 눈으로 살폈다. 침입자를 훑어 내리며 그의 정체가 무엇일지 이안이 가늠하는 사이 리제아나는 몸을 굳혔다.

그의 존재만으로 리제아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피가 차게 식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폐, 폐하!”

눈앞의 광경에 필로렌치아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직접 눈으로 봐도 그의 앞에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의 딸, 리제아나가 자신의 남편인 황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검은 분명히 라이핀의 목 앞에 있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다가오자 처음 보는 남자가 그를 막아섰다.

“리제아나? 너 지금 무슨 짓을!”

상황을 깨달은 필로렌치아 공작은 경악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앞의 남자를 밀치고 리제아나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그건 안 되지.”

하지만 이내 얼마 가지 못해 공작은 공중에 띄워져 리제아나에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몸부림치듯 허공에서 팔과 다리를 흔들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리제, 저 사람이 그대가 그토록 경멸하는 사람인가?”

이안은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공작을 바라보며 눈썹을 구겼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두려움을 눈치챈 그가 물었다.

그녀와 같은 검은 머리칼을 보고서 이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답이 없었다.

공작을 바라보고 선 리제아나는 불안한 눈을 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리제아나! 뭐 하는 거냐? 지금 당장 나를 안 내리고 뭐 하는 거냔 말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이 쓸모없는 것! 항상 너는 필요한 순간에 방해만 하곤 했지!”

공작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힐난하기 시작했다.

“저, 저는…. 당신은….”

리제아나가 놀란 틈을 타 라이핀이 그녀의 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것을 놓칠 이안이 아니었다.

이안이 손을 휘두르자 그녀의 검 앞에서 조용히 몸을 빼던 그가 고꾸라졌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그를 짓누르는 힘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네 녀석, 텐젤인이 아닌가…. 텐젤이 어떻게 마법을!”

당황한 라이핀이 이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리제아나의 시선은 여전히 공작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삶에서 거대한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람이었다. 라이핀에 대한 기억은 그녀 스스로 이겨낼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리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몰랐다.

“당장! 나를! 내려라!”

홀린 듯 그녀는 그의 명령에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명령하면 그대로 따라야 했다. 그것이 그의 교육 방식이었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그녀를 강하게 짓눌렀다. 그때였다.

“리제아나.”

이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제아나.”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리고 그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재차 그녀를 불렀다.

“이제 당신은 그에게 속하지 않잖아. 그대는 자유로워.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마.”

그녀의 귀를 조심히 막은 이안이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리제아나의 떨림이 조금 멎었다.

“필로렌치아… 공작.”

그녀가 운을 떼며 검을 든 손에 다시 힘을 쥐며 일어섰다. 그녀는 마법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 라이핀에게 향했다.

“리제아나, 네가 어떻게 감히 황제 폐하에게 칼을 들이대느냐?!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구나!”

“후….”

리제아나는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본래 가족이란 이런 것일까? 리제아나는 아버지란 존재가 본래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딸을 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그가 그리 그녀를 키웠던 것이라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리제아나는 공작에게 그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값어치 있는 상품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한 번도 그가 그녀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었다. 그 드높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그 앞에서 이렇게 덜덜 떨 수만은 없어. 이제는 다르잖아. 이안도 옆에 있잖아.’

결국 그녀가 놓으면 모든 것이 끝날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라이핀에 대한 마음은 접었으며 그녀는 더는 핏줄에 집착하지 않았다.

“공작은 저를 죽이실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시잖아요?”

“뭐?”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내려드리지요.”

“네가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는 게냐!”

당황한 공작은 다급하게 그녀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보다 못한 이안이 나서려 하자 리제아나는 그의 팔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그를 막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감당해야 할 문제예요. 이안에게도 사과할 것도 있고.”

“나한테?”

리제아나가 자신한테 말을 걸자 이안이 되물었다.

“네.”

“…그래, 그럼. 뭔데?”

“그게-”

공작의 협박으로 결국 이안의 신분을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찰나였다.

“그,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나는군!”

필로렌치아 공작이 무언가가 떠오른 듯 외쳤다.

“넌 이안이라는 텐젤의 공작 아닌가. 하, 하지만, 텐젤이라면… 이런 마법을 쓸 자가 없을 텐데?”

“나를 알다니.”

“그래…. 리제아나가 이야기한 놈이… 바로 네 놈이었군.”

리제아나가 불안한 눈치로 그를 곁눈질하자 이안이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공작에게 당신 이야기를 한 것은…. 제 의지가 아니라….”

“사과하지 않아도 돼, 리제. 당신이 원해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뭔데요?”

“원한다면 내가 당신의 복수를 해줄게.”

입술을 떨던 리제아나는 얼마 안 있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안은 허공에 있던 공작을 단숨에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그리곤 이안은 천천히 라이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폐, 폐하! 리제아나, 당장 이 남자를 멈추어라!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째서 그녀에게 명령하는 것이지? 당신은 그녀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

공작은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라이핀만은 지키려는 듯 외쳤다.

“공작, 병사들은…! 병사들은 어디 있나!”

라이핀이 이안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것이.”

“내가 대신 이야기해주지. 너희 아비드 병사들은 현재 우리 텐젤군에 의해 제압당했다. 하늘의 폭풍우를 보면 모르겠나.”

“뭐라고?”

“그동안 군사 훈련을 엉망으로 한 모양이군. 마국이란 명성도 무색하게 텐젤의 마법사에게 패하다니. 그렇지 않나?”

공작은 움찔 몸을 떨며 황궁에 도착하고 보았던 참담한 풍경을 떠올렸다. 기절한 일라이자 뒤로 아비드 병사들이 텐젤의 기사들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아비드 병사들의 숫자가 더 많았으나 텐젤의 뛰어난 기사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감히 아비드 제국을…! 이렇게…!”

“이 제국에서 가장 권력 있는 두 사람을 이렇게 잡다니. 아비드 제국도 이제 끝이군.”

이안은 공작의 외침에도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 공작한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리제아나가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제아나의 고개가 여전히 라이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히 전해졌다.

“…그날. 그날 엄마는 왜 죽이셨어요?”

“그날…? 이런…. 사브릴 말이지?”

“…네.”

그녀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브릴은 너처럼 나에게 방해만 되는 여자였어. 너는 태어날 때부터 내 계획에 없던 두 번째로 지워지지 않는 변수였다.”

공작의 말에 리제아나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렀다. 정말 그에게 그저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실을 확인받자 리제아나는 절망했다.

문득 이안의 생각은 한 이름에서 멈추었다. 사브릴. 낯설지만 어디선가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곧 공작은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오늘이 나의 끝을 맞는 날이라니, 젠장.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너는 역시 필로렌치아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건 나도 알아요.”

“너는 치명적인 내 사생아였다.”

“?”

리제아나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첫째 부인은 아이도 없이 재산만 갉아먹는 여자였기에 일찌감치 내쫓아버렸다. 네 엄마와는 단순 유흥으로 시작된 관계였지. 하지만 네가 태어났지.”

“…하.”

리제아나가 고통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광각초가 너에게 효과가 없다니 역시 너는 이미 광각초에 대한 존재를 아는 것 같구나.”

“모를 리가 없잖아요.”

“운이 나빴어, 네 엄만. 내게 광각초 사업의 실마리를 제공해준 그 첫 번째 실험의 주인공이 된 거니까. 사랑해서 그랬다는 허울뿐인 거짓말은 하지 않으마.”

“….”

“후회도 뭣도 하지 않아. 그 결정이 나를 지금까지 이 자리까지 이끌어주었으니. 그러니 리제아나, 나를 죽일 거라면 빠르게 죽여라. 죽음을 앞둔 이상 미련은 없으니.”

리제아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공작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내 천천히 그녀가 입을 뗐다.

“그래, 당신은 나와 엄마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이 리제아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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