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자신감 있게 일어났지만 약해진 몸을 급작스럽게 움직인 탓인지 리제아나가 비틀거렸다. 이안은 그런 리제아나를 빠르게 잡아 중심을 잡게 도와주었다.
“계획은 있나?”
“계획이라뇨?”
리제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밝은 미소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안도 여기 계획 없이 오신 거 아니에요? 제가 아는 이안은 분명 황궁을 함락시켜서라도 저를 찾으러 올 인물인데.”
“외교적 문제 때문이지. 그래서 몰래 들어온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뒤에 항상 붙어있던 하르힌도 없으시고 말이죠. 게다가 조금 전까지 맑기만 했던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폭풍우가 치는 것도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혹 그를 따라온 사람이 있을까 리제아나는 이안의 뒤를 살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못 당하겠네. 그런데 사실 그대만 몰래 빼 오려고 노력했었던 건 맞는데.”
“그런데….”
리제아나가 그에게 되묻기 무섭게 창문 밖으로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리제아나가 창문가로 다가가니 창문 너머로 마법이 시전되는 불빛이 반짝였다.
뒤이어 폭파되는 소리가 잇따랐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울렸다.
“음…. 노력이 실패한 모양이군.”
자신의 변명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의 행동에 리제아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다.
“푸흡, 네. 그런데 황제와 공작은 어디로 간 건지 아세요? 금방이라도 이곳으로 올 수도 있는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적어도 지금은 오지 않을 테니까.”
“?”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에 집중하자. 하르힌이 잘 해주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지 장담은 못 하니까.”
조금 전 들려온 고함 중 하나가 하르힌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리제아나가 눈을 크게 뜨며 창가에 몸을 붙였다. 당장이라도 방을 나가 그를 도와주러 갈 기세에 이안은 그녀를 황급히 말렸다.
“아니야.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가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어. 거기다 그대는 지금 거동조차 자유롭지 못하잖아.”
“…혹여 하르힌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하르힌은 다치진 않을 거야. 적군에게 그리 쉽게 당할 놈이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리제아나. 게다가 그와 함께 있는 기사단은 내가 직접 훈련한 기사단이니 괜찮아.
“지금 황제와 공작이 자리를 비워도 마법사들은 여전히 황궁에 남아 있을 겁니다. 마법사 한 명으로 모든 마탑의 공격을 막을 순 없을 겁니다.”
리제아나가 얌전히 그의 말을 따라주길 바랐지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분명히 납득을 할 이유가 있어야 움직일 리제아나라는 것을. 이안은 그녀의 그런 당당한 모습이 좋았다.
“마법사들은 지금 외부에서 황궁으로 쏟아지는 마법에 정신없을 거야. 세 곳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거든.”
리제아나가 그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 그녀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듯 통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 어리석은 마법사들은 그 공격을 막을 수 없겠네요!”
“뭐?”
“현재 아비드 출신의 마법사은 무능력한 자들이 다수입니다.”
리제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마탑에서 일하면 얼마나 많은 보수가 나오는데요. 그래서 마탑은 다 연줄입니다. 인맥으로 돌아가는 참으로 어이없는 집단들이죠.”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이안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텐젤의 마탑은 가장 마법 실력이 뛰어난 이가 마탑주에 올라 마법사들의 우두머리로서 마법사들을 통제하며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집단이었다.
그는 그리 교육받으며 자랐고 실제로 그리 행동해왔다. 따라서 그는 리제아나의 말이 정말 놀라웠다.
텐젤의 마탑에서는 보수를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황실에서 요구하는 재물과 돈을 바쳐야 했다. 보수를 받는 자리라니 이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인맥? 보수?”
“마탑주는 물론 마법 실력이 뒷받침해야 하지만 황제의 방계 혈족이에요. 이걸로 충분히 자격과 지위는 쥐어지죠.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이 그 아래의 마법사로 지원해서 들어갔을 겁니다.”
“허….”
“그래서 아비드의 마탑주는 이안처럼 강하지 않아요. 오히려 겁이 아주 많은 사람이죠. 카워드…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들었어요.”
사실 하르힌을 전장에 배치할 때 이안의 마음 또한 편하지 않았다.그래서 위버가 조금 더 무리해서 폭풍우를 끌어온 후 빠르게 하르힌과 합류해주길 바랐다.
아비드의 마탑주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소유자라면 하르힌이 정말 위험해질지도 몰랐다.하지만 코웃음 치며 걱정하지 말라는 리제아나를 보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후… 그렇다면 다행이네. 움직일 수는 있겠어? 아무리 무능력해도 마법사는 마법사니, 내 존재쯤은 알아차릴 테지.”
“움직일 수 있지만, 할 일이 남았다 했잖아요. 그새 잊은 거예요?”
이안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리제아나가 그의 품으로부터 몸을 빼내고는 그의 콧잔등을 살포시 건드렸다.
“위험해.”
리제아나의 성격을 보아 황제와 공작 두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것이 분명했다. 이안은 그녀가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답했다.
“위험하지 않아요.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처절한 경험을 했어요. 지금 텐젤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또다시 도망이나 친 사람이 되고 말 거에요.”
“도망가는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해서 잠시 후퇴하는 거라 생각하면 안 돼?”
“후퇴라는 단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요. 제가 언제 다시 아비드의 황궁에 쳐들어올 수 있겠어요?”
이안의 만류에도 리제아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녀 완강하게 답했다.
“리제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무모해. 상대는 제국의 황제와 공작이야.”
“이안. 나를 믿어요. 정 못 믿겠으면 나와 함께 있어 주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줘요.”
리제아나는 각오를 다지며 이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흔들림 없는 보랏빛 눈동자와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칼의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둘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개입할 거야.”
“그래서 제가 아까 도움은 조금 필요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
못 본 사이에 더욱 마른 리제아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이안은 손을 들었다.
“쓰다듬어도 돼?”
“얼마든지요. 근데 이곳 세욕제가 생각보다 거북해서 별로 맡고 싶지 않을 텐데요.”
“하하, 세욕제까지 욕할 정도로 그대가 아비드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이안은 리제아나의 허락을 맡고 나서야 그녀의 머릿결을 천천히 쓰다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드디어 체감되었다. 문득 아비드의 황제, 라이핀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이 일을 그대로 갚아 주어야 한다….’
이안은 리제아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에게 한 방 먹힐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을 조른다면 오히려 그녀에게서 반감만 살 뿐일 테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공격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 그런데 이안, 제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어요.”
이안의 생각을 이미 짐작했는지 리제아나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지? 말해봐 그대.”
“제가 이안을 좋아한다고 직접 말한 적 있던가요?”
“뭐?”
“아…. 안 말했었죠. 매번 이안이 말했으니까. 이제 제 차례네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리제아나는 얼굴이 벌게진 이안에게 고개를 숙여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저는 이안을 동경하고 있었어요. 예전부터 마음 깊이. 그래서 바보같이 이런 것도 몰랐었죠. 계절이 바뀔 동안에도 당신 생각뿐이었어요.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돼서야 마침내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생겼어요.”
“리제 난…. 나는….”
얼굴에 열이 서서히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안이 답지 않게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끝을 흐렸다.
“오늘은 제가 먼저 말할래요. 좋아해요, 이안.”
⚜ ⚜ ⚜
네르아가 더 움직이지 않자 라이핀은 그녀의 몸을 누르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그녀가 죽은 것이다.
“폐하! 황궁에!”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필로렌치아 공작이 그에게 달려왔다. 그는 혹 라이핀에게 다른 상처가 없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멀리서 한 마법사가 두 사람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아비드의 마탑에서 마법으로 특출하다고 알려진 마법사, 머스켓이었다.
라이핀은 피를 닦아내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머스켓의 얼굴은 꽤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황궁에 다수의 외부 마력이 모여 있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지금 이 기이한 날씨는….”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금세 세찬 바람과 함께 굵은 빗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라이핀과 공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응시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폭풍우가 몰아치다니. 라이핀은 제 얼굴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불쾌한 듯 닦아냈다.
“계속 이야기해라.”
계속 말을 전하라며 독촉하던 라이핀이 멈칫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곱씹으니 무언가 떠오르던 것이 있던 탓이었다.
“그 전에 잠시만, 황궁 안에 다수의 외부 마력이 모여 있다고 했나? 그게 무슨 소리인지 똑바로 말해보도록. 지금, 당장!”
“그, 그러니까….”
“일라이자 님의 마력이 느껴지지만 왜인지 누군가와 대결을 벌이는 듯 거칩니다…. 거리가 멀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공작 그리고 머스켓과 나머지 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사건을 수습하도록.”
황궁에 다른 변고가 없길 바랐지만 그의 욕심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라이핀은 빠르게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말에게 향했다.마음 한구석에 불길한 예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