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현재 상황은?”
“심각합니다. 광각초를 마신 이의 힘이 본래 강했던 모양입니다. 무척 세고 날렵해 잘 집히지도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라이핀은 푸른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 피해는? 주변의 주민들은 무사한가?”
“그 부분에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마법사들이 안전하게 대피 시켰습니다. 또한 최면 마법으로 최대한 기억을 지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호라. 역시.”
필로렌치아 공작의 보고에 라이핀의 종잇장처럼 구겨진 미간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그의 대처가 그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인명 사상은 없는 거지?”
“네. 그건 확실히 확인하였습니다. 부상자는 있으나 아직 사상자는 없다고 합니다.”
“서둘러야 한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라이핀은 기사에게서 마물이 있는 곳을 보고 받은 후 움직였다. 그는 말을 재촉하며 필로렌치아 공작과 함께 빠르게 마물이 있는 중심가로 내달렸다.
“조심하십시오!”
라이핀은 뒤에서 들려오는 경고에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돌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외침을 듣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깜짝이야.”
“폐하! 괜찮으십니까? 마물의 속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니 나는 괜찮으나 저 옷차림과 외모는 분명….”
필로렌치아 공작이 놀라 라이핀에게 다가왔으나 라이핀은 손을 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라이핀은 소동을 일으키는 마물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옷차림과 행색이 우리 아비드 제국과 다르다.”
분명 여성의 형체를 한 마물은 아비드 제국에서 흔히 보는 여성들의 것과 확연히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베이지색 긴 팔 블라우스에 갈색 남성용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 저 여자, 설마 혹시 바지를 입은 겁니까?”
“평소 레이디들의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았건만 남성복을 입은 여자라니 이상하군.”
“아니 어떻게 저럴 수 있답니까? 만일 제 딸아이가 저런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면 당장 내쫓았을 겁니다. 파문시켜버렸을 거라고요!”
아비드 제국은 여성이 지켜야할 규율에 대해 엄격했다. 또한 언제나 관습적인 규율과 규칙을 지킬 것을 강조하던 필로렌치아 공작에겐 노할 일이었다.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맡겨만 주신다며억-”
공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 올리며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의 목덜미를 채어 간 라이핀 덕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져 땅을 굴렀다.
그가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라이핀을 올려다보았다.
“폐하!”
“나한테 고마워나 해. 조금 전의 내 꼴이 될 뻔했다.”
라이핀이 고개를 돌려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조금 전, 공작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바윗돌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이핀의 고갯짓을 따라 거대한 바윗돌과 눈이 마주친 공작이 놀라 딸꾹질을 했다. 공작이 딸꾹질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라이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은…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어. 내가 처리 하도록 하지. 저런 마물과도 같은 힘을 가졌지만 한낱 인간이 아닌가.”
“정신 세뇌는 안 될 겁니다! 이미 광각초가 너무 강력해서….”
“목소리를 낮추어라. 그리 소리 지르면 다들 광각초란 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겠느냐.”
라이핀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은빛 칼이 빛을 받고 빛났다. 그는 강하게 검을 움켜쥐고 상점가를 엉망으로 만드는 네르아에게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거친 레이디시군!”
“크아아악!”
“야수인가?”
네르아는 그녀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라이핀을 발견하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달려오는 그를 공격하기 위해 그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위험한 상황에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치켜들 뿐이었다.
공작은 별 도움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빠져 있도록 해. 여긴 내가 맡도록 하지.”
“폐하! 위험합니다!”
하지만 공작의 만류에도 라이핀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을 들어올렸다.
쾅-
네르아가 상점가 한편에 있는 살롱의 부서진 진열장에서 마네킹 몸통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라이핀을 향해 마네킹 몸통이 날아왔다. 라이핀은 가뿐하게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네킹을 두 동강냈다.
라이핀이 눈을 반짝이며 네르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검을 쥔 그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리제아나를 되찾았지만 변한 그녀의 모습과 델리사와의 일로 머리가 아픈 나날이었는데 검을 쥐니 언제 그랬냐는 듯 두통이 잠잠해졌다. 오직 눈앞의 상대를 물리치는 일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디 와 보거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서진 마네킹 사이로 네르아가 돌진했다.
그는 부서진 마네킹의 잔해를 팔을 휘둘러 거두어 내곤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과정에서 마네킹에 꽂힌 옷핀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이건 좀 아픈데.”
그가 가볍게 혀를 차며 그를 노려보며 언제든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는 네르아를 쏘아보았다. 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네르아가 다가오려는 것을 막았다. 그녀는 분한 듯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지금 내 얼굴에 흐르는 게 땀이 아니라 피라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무언가를 손등으로 훔쳐 냈다. 무심코 손등을 바라본 그는 눈썹을 모았다.
“…피잖아?”
볼의 상처를 확인한 그는 조용히 분노했다. 황제가 된 후로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거늘 감히 타국에서 온 마물 따위가 그에게 상처를 내다니.
“감히 황제의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그는 상처가 있는 곳을 더듬었다. 그가 검을 들고 금방이라도 네르아에게 달려들 듯이 차게 노려보았다. 마치 라이핀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네르아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두 번은 안 당한다. 나의 얼굴에 한 번 더 상처 낸다면 너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라이핀은 자신에게 몸을 내던지는 네르아를 가뿐하게 피한 후, 그녀가 당황한 틈을 타 그녀의 등을 강하게 찼다.
그의 발길질에 몸의 중심을 잃은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목에 검을 가져갔다.
“자비를 내리려고 했지만 안 되겠군.”
“으으윽-”
그의 발 아래로 네르아의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잘 가도록 해라, 이방인.”
라이핀은 말을 마친 후 주저 없이 검을 들어 단칼에 네르아를 베었다.
그의 발아래에서 반항하던 네르아의 움직임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의 몸이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늘어지자 그가 검을 검집에 넣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옥체에 혹여 상처라도 나신 건…!”
“얼굴. 제기랄. 얼굴에 상처가 났잖아! 지금 바로 황궁으로 돌아간다. 뒷수습은 마법사들한테 부탁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숨어있던 필로렌치아 공작은 그가 검을 거두기 무섭게 라이핀에게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 상처를 발견한 그는 놀라 말을 쏟아냈다. 그때였다.
“폐하! 황궁에!”
멀리서 한 마법사가 두 사람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가 다급하게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자 라이핀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 ⚜ ⚜
이안은 혹여 이것이 자신의 상상일까 봐 두려워 섣불리 리제아나를 만지지 못했다. 리제아나는 앞에 선 그의 모습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꿈일까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정말 진심이야. 빠르게 오지 못해서 미안해.”
리제아나는 볼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가슴 안에 담아둔 모든 말을 꺼냈다.
“그, 그런데. 이거 정말 꿈이 아닌가요? 이안 맞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야. 내가 그대를 이렇게 안고 있잖아.”
“…저, 광각초의 향을 맡았어요.”
“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안이 그제야 품에서 그녀를 떼어냈다.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광각초에 중독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색이 조금 나쁠 뿐이었다.
“라이핀이 마취제와 광각초의 향을 같이 섞어서 들이마시게 하셨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세상에. 리제, 그대는 정말 운이 좋았어.”
이안이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왜…왜 그래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요?”
그의 행동에 당황한 리제아나가 그에게 되물었다.
이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리제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여신상에게 절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했다.
“제아무리 강한 독초들이지만 이것들이 한데 섞이면 본래 효과를 잃어버리기 마련이지. 광각초에 마취제를 첨가한다면 오히려 뒤섞인 향들은….”
“서로의 힘들을 상쇄시키기는 힘을 가지고 있죠.”
“둘은 서로 상극이야. 간과한 것이지. 광각초는 여러 독초로 만든 것이야. 만일 그 효과를 반감하는 다른 약초를 혼합한다면 그저 보통의 풀이 되어 버리지.”
“…세상에. 말도 안 돼.”
리제아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섰다. 이안은 그녀를 보며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말도 안 되니까요. 어떻게… 어떻게….”
“말은 아껴두고. 몸은 움직일 수는 있겠어? 손가락도 까닥하지 못하겠다면 편히 기대도 좋아.”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이안의 품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걸어 보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몸에서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곳이나 마비된 곳은 없었다. 오히려 몸이 더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이안.”
“응?”
“이안이 여기 온 이유는 저를 구하기 위해서죠?”
“그렇지.”
“그럼… 다시 텐젤로 떠나기 전에 이곳에서 제가 마무리 지을 일이 있는데 기다려주시겠어요?”
“마무리 지을 일? 내 도움은 필요하지 않나?”
이안의 물음에 리제아나는 야윈 얼굴과 다르게 자신만만한 미소로 답했다.
“조금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제가 할 테니까요.”
그녀의 뒤로 있는 창문으로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일순 번개가 내리치는 거대한 소음과 함께 창문 밖으로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이안은 다시 깨달았다. 그가 좋아하는 리제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