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황족을 감히 해하려 한 죄에 타국과 몰래 내통한 죄까지 더해져 델리사에게 무거운 형이 내려졌다. 형 내린 이는 다름 아닌 그녀가 열렬하게 사랑해 못지않던 황제였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폐하를 보게 해달라고!”
“조용히 고통 없이 보내드리겠습니다.”
“고통이고 나발이고…. 폐하를 한 번만 다시 보게 해주란 말이다…! 마음이 변하셨을 거다. 아직 나에 대한 사랑이 굳건하실 거라고!”
델리사가 애처롭게 말해도 병사는 강건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그의 옆에 선 다른 병사가 그녀를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았다. 찢어진 드레스를 입은 허름한 차림새로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린 채 황제를 찾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왔던 황제가 떠나고 큰소리로 황제를 한참이나 저주하던 그녀였다. 한데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델리사를 병사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폐하께선 바쁘십니다. 그리 전하라 하셨고 실제로도 그러하십니다.”
“네가 뭘 알아! 지금 당장 폐하를 부르란 말이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나는 언제나 그에게 최선을 다했다. 한데 나를 이렇게 버릴 수 없어!”
“….”
병사는 한때 귀족이었던 그녀에게 예의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배려에도 델리사는 황제를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되겠군.”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며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발자국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흠칫 몸을 떨며 델리사가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감히 일개 병사 따위가 나한테 오는 것이냐? 훗날 제국의 황후가 될 나에게?”
“어떻게 죽을지 선택지는 많습니다. 고르셔도 좋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첫 번째, 처형 마법으로 죽는 것. 두 번째, 검으로 목을 베는 것. 세 번째, 독을 마시는 것. 고르십시오. 직접 고르실 수 있도록 폐하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절망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에게 병사는 침착하게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세 가지 선택지를 일러주었다.
본래라면 그녀처럼 큰 죄를 지은 이들은 교수형에 처해야 했으나 그녀는 예외였다.
옛 그의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베푸는 라이핀의 마지막 배려였다.
“저리 가! 내 곁에서 떨어져.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그 세 가지 중에서 단 한 가지도 선택하지 않을 거니까.”
“정말입니까?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병사는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듯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병사에게 그녀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며 라이핀은 또다른 말을 붙였다. 병사의 어깨를 잡고 라이핀은 속삭였다.
“델리사가 반항하거든 회유할 생각 말고 그대로 숨결을 다 앗아가 버리도록.”
한때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으로 황궁 안을 떠들썩하게 하던 두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언제 그녀를 사랑했단 듯 차갑기만 했다.
그 말을 속삭이던 라이핀은 결심한 듯 매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런. 어쩔 수 없군요.”
병사는 라이핀의 말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녀를 그리 비참하게 죽이고 싶지 않았건만 결국 그녀는 악을 쓰며 선택하기를 거부했다. 병사는 라이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병사가 눈짓을 하자 뒤에 선 다른 병사가 빠르게 감옥을 빠져 나갔다. 병사가 감옥을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침한 모습의 남자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델리사에게 처형 마법을 내릴 마법사였다.
병사들이 모두 물러서자 마법사가 천천히 델리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델리사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벌떡 몸을 일으킬 때였다.
마법사는 단숨에 장갑을 벗어 델리사의 얼굴에 길게 편 손바닥을 가져갔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어두운 기운은 그녀의 숨결을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
델리사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매끈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생기며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한 병사만이 있을 뿐.
그것이 델리사의 마지막이었다.
⚜ ⚜ ⚜
‘아무나…. 아무나 오기만 해봐. 가만히 두지 않겠어….’
리제아나는 이불 아래로 작은 검을 숨겼다. 그리고 검의 손잡이를 힘있게 잡으며 인기척이 들려오는 문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문으로 들어오는 누군가에게 검을 찔러 넣을 수 있게 리제아나는 몸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만 라이핀이든 필로렌치아 공작이든 단숨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침실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리제아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녀의 예상처럼 침실을 찾은 이는 라이핀뿐만이 아니었다. 라이핀을 선두로 일라이자와 몇 명의 병사들이 그녀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리제아나. 오늘은 좀 어때?”
“….”
라이핀이 다정하게 물어왔지만 리제아나는 그를 잠자코 노려보기만 할 뿐 말을 아꼈다.
“갈수록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정말…. 그런데 말이야.”
그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를 말없이 보던 그가 문득 리제아나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
“손에 쥐고 있는 그 검은 위험하니까 내려 놓는 게 어때. 리제아나, 당신은 이 나라의 황후가 될 몸이야. 검을 들고 있다가 손에 상처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날씨를 묻는 듯 그가 단조롭게 말했다. 놀란 리제아나는 몸을 주춤거렸다.
눈에 살기를 담고 그를 노려보던 리제아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단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 검은 언제나 내 허리춤에 있는 것인데.”
“!”
“리제아나, 당신이 마음에 든다면 가져도 좋지만 그걸로 누구를 죽일 순 없다는 건 알아둬.”
놀라 말문이 막힌 리제아나가 입만 뻐끔거리자 라이핀이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일라이자가 리제아나를 경계하며 라이핀을 저지했다. 하지만 라이핀은 가볍게 웃으며 그의 보좌관의 말을 무시했다.
“내가, 고작 이런 것에 당할 리 없잖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라이핀이 어느새 이불을 거두고 리제아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리제아나는 단검이 라이핀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아래턱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개자식.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로 봐준 거라고?’
리제아나는 분한 마음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밀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렇게 나를 노려보진 말아줬으면 하네, 리제아나. 당신의 예쁜 얼굴이 아깝잖아.”
“그냥 죽이시죠.”
리제아나가 씹어뱉듯이 답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놀란 듯 몸을 굳힌 라이핀이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이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나는 이제 당신밖에 없는걸. 나를 보좌해줄 사람은 당신뿐이야. 이제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
“그냥! 그냥… 죽이시라고요. 저는 싫어요. 모든 것이. 황궁도 지긋지긋하고… 폐하의 그런 달라진 말투들도 싫다고요!”
“내 달라진 말투라니. 난 잠깐 흔들린 것뿐이야. 사람은 누구나 다 한 번씩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잖아?”
“뭐라고요?”
그의 말에 리제아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공작에게 들었어. 이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말이야.”
라이핀이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어떻게라니. 공작이 설마 그 중대한 사실을 나에게 숨겼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감히….”
“이런, 이런 리제아나. 감히라는 말은 당신의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니라 내 입에서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분노에 눈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위협을 받아도 털어놓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지켰어야 했다. 그만큼 소중한 사람인데…. 리제아나는 절망스러웠다.
“델리사로 내게 원망할 구실은 사라졌네. 이제는 당신이 말할 차례인데. 이안이라는 사람과는 무슨 관계지? 사랑하는 사이인가?”
리제아나가 그의 시선을 피하자 그가 리제아나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사실대로 말해줘, 리제아나. 그 편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 생각해. 그 사람은 대체 누구지?”
“폐하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끌어들이지 마세요.”
“당신이 그렇게 누군가를 감싸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소중한 사람인가?”
“아니…. 무고한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를 숨기고자 해도 라이핀은 이미 그와 리제아나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럼 이제 잊을 수 있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쨌거나 그 사람이 텐젤 쪽 사람이니까 당신도 세작으로 몰리기 싫으면 깨끗이 잊을 준비가 되어있냐 이거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이안을 왜 잊….”
기어코 실언해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리제아나는 공작의 가르침에 따라 상대방을 편히 부른 적 없었다. 언제나 존칭을 붙여 상대와 선을 유지했다. 남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이핀은 그녀에게 이름을 허락했지만 그녀는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외간 남자의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라이핀은 몸 안 어딘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뭐라고 불렀어? 이안? 이안이라고? 하하….”
“폐하….”
“이것 봐. 당신은 나를 지금도 폐하라 칭하는데 그 남자는 이름으로 부르는군…. 그 사람이 정말 궁금해지는데 어쩌지?”
리제아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려는 모습에 라이핀은 입매를 굳혔다.
“안 되겠어, 당신.”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금니에 힘을 꽉 준 라이핀이 말했다.
“일라이자, ‘그것’을 가지고 와.”
“폐하, 쓰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일라이자가 만류했지만, 라이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가져오래도!”
그가 언성을 높이자 일라이자는 쭈뼛거리며 자그마한 상자를 가지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일라이자에게서 빼앗듯이 상자를 가져간 라이핀이 피식 웃으며 리제아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뭐지 아나?”
“그게… 뭡니까?”
“광각초.”
새하얗게 질리는 리제아나의 얼굴을 보며 라이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