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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96/117)

96화

아비드 황궁의 가장 깊은 지하, 그곳에는 중죄를 지은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 있었다.

복잡한 마법이 걸린 그 감옥은 황족이 아닌 이상, 누구도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범죄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었다.

“…오랜만이야.”

라이핀이 쓰게 웃으며 철창 너머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그녀에게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옛 기억을 완전히 떨쳐 내긴 힘들었다.

라이핀은 한숨을 내쉬며 건너편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

델리사는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끌려 왔을 때 입었던 지저분한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그녀는 라이핀의 목소리에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라이핀을 마주할 때마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그 미소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라이핀은 뒤로 지하 감옥을 지키는 병사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을 알아들은 병사가 소리 없이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델리사,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

병사가 나가는 모습을 본 라이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믿었어. 그저 네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는데…. 언제부터 나쁜 마음을 먹었는지.”

“…하!”

그가 말하는 것을 듣던 델리사가 그의 말을 끊고 비웃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줏대도 없으십니다.”

“뭐?”

“제가 폐하를 사랑하길 원했다면 제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 역시 폐하께서도 하고 계셨어야 합니다.”

줄곧 아래로 떨어져 있던 고개를 들고서 델리사가 힘없이 답했다.

“제가 폐하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일을 꾸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델리사. 그거와 이건 다른 거야.”

라이핀이 미간을 구기며 그녀의 말에 반박했지만 델리사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가 다른 거죠? 당신과 나의 사이를 방해한 여자잖아요.”

“그래도 리제아나는 건들지 말았어야지.”

“리제아나를 진작 내치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델리사!”

“…폐하.”

델리사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뽀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폐하는 절 정말 사랑하셨나요?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에 내가 들어선 적은 있었나요…?”

“물론 있었어. 이것만큼은 진심이야.”

하지만 라이핀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라이핀은 분명 델리사를 사랑했다. 하지만 델리사를 앞에 두고서도 리제아나를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리제아나를 해친 델리사가 더 미웠다.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델리사가 그 몰래 뒤에서 리제아나를 납치해 괴롭히고 있었다니 라이핀은 믿을 수 없었다.

“폐하. 저희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은데… 어찌 제 마음을 모르시나요. 여전히 제 눈을 보지도 못하는군요.”

“델리사, 사실 알고 있잖아. 이 관계가 잘못된 관계였다는 것을.”

“폐하도 동의한 관계였어요. 벌써 잊으신 거예요?”

“…그래.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감옥에서 나가 리제아나에게 사과를 구할 거다.”

“사과라…. 풉. 잘도 말씀하시네요.”

눈물로 붉게 부은 눈으로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드레스 끝자락을 주먹으로 꽉 쥔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악에 받쳐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가 일어섰다.

그가 알던 그녀가 맞는지 라이핀은 혼란스러웠다. 정적 속에서 라이핀은 결심한 듯 말했다.

“사과를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녀는 앞으로 계속 내 옆에 있게 될 테니까. 다시 무사히 회복하여 내 옆에 있을 거다.”

“이전에 폐하께서 그 여자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아마 다시는 폐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질투하지 마라, 델리사.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더 망치지 마라.”

델리사가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이핀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질투? 하… 질투라….”

그의 행동은 델리사를 더 분노하게 만들 뿐이었다.

“제가 질투를…. 하하…. 정말 끝까지 저를 비참하게 하시는군요?”

“….”

“얼마나! 더! 저를! 비참하게 만드셔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네?”

델리사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도 라이핀은 침묵했다.

라이핀은 지친 눈으로 델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친다면 그녀의 형을 덜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만, 델리사.”

“…그 여자를 정말 사랑하셨다면 한눈팔지 마셨어야죠. 전 대체 당신에게 뭐죠?!”

“그 여자라고 함부로 칭하지 마라.”

“세기의 사랑 납시셨네요. 정말 진심이었다면 왜 그리 행동하셨습니까?”

라이핀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라이핀은 감옥의 출구로 향했다.

“그래서… 결국 이대로 저를 이렇게 버리시는 거군요.”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 탓에 그녀는 힘이 빠진 듯했다. 델리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멀어져 가는 라이핀을 붙잡았다.

“…버리는 것이 아니다….”

라이핀은 그녀의 말에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입구의 문을 노려보다 아래턱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일 뿐이야. 우리 두 사람, 이만 여기서… 끝내자.”

“사랑한다고요! 제발… 그 여자한테만 가지 말아줘요…. 폐하… 절 버리지 마세요….”

델리사가 애원했지만 라이핀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제 끊어내야 하는 관계였다. 라이핀은 더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폐하! 이대로 가시면 정말 저는 혀 깨물고 죽을 거예요. 정말 그럴 거라고요. 이대로 가시면 정말 다시는 저를 보지 못하실 겁니다. 명심하세요.”

“…그거 잘됐네.”

라이핀은 씁쓸하게 그녀와 함께했던 옛 기억을 삼켰다. 그는 울부짖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네가 스스로 죽지 않는다면 다른 이에게 죽을 테니까.”

“하…하하!”

라이핀의 말에 델리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내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작게 몸을 떨며 웃던 그녀는 큰 소리로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연인이었던 저를 이리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델리사의 마지막 절규였다.

⚜ ⚜ ⚜

네르아는 의자에 단단히 묶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이안,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왔다.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위해서 한 일들이 모두 그녀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짓이었다니.

“한때 있던 정을 봐서라도 살려줘, 하르힌.”

“그 정은 거짓이었잖아. 그리고 그 정을 거짓으로 만든 것은 너였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네.”

“빌어먹을.”

하르힌은 그녀의 방에서 찾은 광각초를 들고 서 있었다. 네르아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하르힌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르힌은 언제나 감정에 약했다.

그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네르아는 간절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하르힌.”

“전혀.”

하지만 하르힌은 그녀의 물음에 딱딱하게 답할 뿐이었다.

하르힌에게 명령을 내린 후, 이안은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아 황궁에 남아야 했다. 그 때문에 하르힌과 네르아만이 마탑으로 돌아왔다.

미세리타는 네르아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다며 따라오기를 거부했다. 위버는 이안을 보좌하겠다고 나섰기에 남은 것은 하르힌뿐이었다.

“하…. 인생 참 덧없구나.”

네르아가 공허하게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르힌은 그녀를 흘끗 바라볼 뿐 그녀의 혼잣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 봐. 아직까지 넌 나를 놓지 못하고 있는데 왜 너만 모르고 있는 걸까.’

하르힌의 무뚝뚝한 행동은 오히려 그가 아직까지 네르아에게 정이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마지막인 만큼 인사는 해줄게. 잘 가.”

하르힌은 마법으로 향을 봉해둔 광각초를 앞에 두고 손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막았다. 물론 자신에게 보호 마법을 덧씌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광각초의 봉인을 풀었다.

광각초의 강한 향에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네르아는 결국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가 쓰러지자 하르힌은 재빠르게 광각초를 불태우고 바람을 일으켜 냄새를 모두 방 밖으로 내보냈다.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네르아… 이제 다시는 널 볼 수 없겠구나.”

하르힌은 그녀를 옭아맨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네르아를 들어 올려 아비드와 텐젤의 국경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곳에는 위버와 미세리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국경선을 지키는 아비드의 병사들을 처리한 뒤였다.

“저하께서 따로 명하셔서 왔어.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고 오라고 하시더라.”

미세리타가 흘끗 하르힌의 어깨 위로 축 늘어진 네르아를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는?”

하르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고 이번에는 위버가 말을 꺼냈다.

“이것저것 처리하고 오시느라고 늦으신대. 황궁 병사들도 소집하신다고 하고….”

“그래.”

위버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하르힌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힌이 제 어깨에 걸쳐 든 네르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비록 듣지는 못하겠지만, 할 말들을 해.”

두 사람은 하르힌의 턱짓을 따라 네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힘없이 기절한 네르아를 앞에 두고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여전히 네르아에게 배신감이 들었지만 그녀와 함께 한 추억 때문에 제대로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르아. 네가 나와 함께 보냈던 모든 추억까지 거짓이라 치부하지 않을게.”

이내 미세리타가 정적을 깨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가.”

이어서 위버 역시 그답게 깔끔한 인사로 작별을 고했다.

이후 하르힌이 말을 빌려 아비드의 병사로 위장해 단숨에 황궁 근처 마을로 달려갔다. 그는 그녀가 깨기 전 나무 둥치에 앉혀놓았다.

돌아서려 해도 네르아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거 알아 네르아?”

하르힌이 잠든 듯이 나무에 기대 앉은 네르아를 향해 중얼거렸다.

“사실 너를 좋아했었어.”

그 말을 끝으로 하르힌은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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