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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17)

95화

“황제가 되면 좋은 거 아니야? 왜 망설이시는 거지…?”

“조용히 해 멍청아. 감히 저하의 생각을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정적 속에서 위버의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미세리타가 곧장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좋은 거라….”

이안이 그의 말을 그대로 나지막이 읊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황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황제란 자리가 가지고 있는 책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저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저주를 완벽하게 치료하지 못했으며 리제아나를 아비드 제국에서 데려오지도 못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미세리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듯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뻐끔대는 위버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리제아나 님을 구하시러 가셔야 하잖아요.”

그녀의 이름에 이안이 몸을 흠칫했다. 위버와 미세리타에게 편지를 보낼 때 모든 사정을 적어 보내 그들도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이안은 단번에 리제아나를 떠올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빛 머릿결과 은하수의 빛나는 별 같은 보랏빛 눈동자. 문득 이안은 사무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아비드의 황궁에 가신다면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거대한 두 제국이 맞붙는 것이라고요.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

“홀로 그분을 구하러 가실 수 없다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저희 셋이 간다고 해도 무사히 그분을 빼내실 수 있을지 모르는 부분입니다.”

“하….”

그녀의 말에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이안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하르힌이랑 네르-”

“가만히 좀 있으라고! 편지를 끝까지 읽지도 않았으면 좀 조용히 있어!”

미세리타가 방심한 틈을 타 위버가 입을 뗐다. 다행스럽게도 위버가 네르아의 이름을 꺼내기 전에 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이안은 그녀의 이름을 들은 모양이었다.

이안은 하르힌에게 받은 보고를 떠올렸다. 네르아를 마탑 아래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고 하르힌은 전했다. 그녀가 한 말들을 그대로 적어놓은 하르힌의 편지를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끓어올랐다.

‘다시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은 완벽하게 끊어내야 한다.’

이안 역시 누군가를 차갑게 내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마탑의 마법사들 또한 갑작스럽게 네르아를 끊어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네르아와 가족처럼 지내왔다.

미세리타만 해도 그랬다. 네르아와 친했던 미세리타는 처음 이안의 편지를 받고 종일 펑펑 울었다고 털어놓았다. 네르아의 배신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안이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리 없었다.

“하르힌에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할 수 있긴 한데요….”

“흠…. 아무나 해봐.”

“제가 할게요. 그런데 뭐라고 연락해요?”

“이쪽으로 공간이동 마법을 써서 해서 오라고 해. 올 때 네르아도 데리고 오라고 하고. 모든 것을 청산할 시간이니까.”

⚜ ⚜ ⚜

이안이 명령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세리타는 하르힌과 단단히 묶인 네르아와 함께 나타났다.

“…네르아.”

이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네르아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엉망이 된 몰골로 그의 앞에 꿇어앉은 그녀는 얼굴을 굳힌 채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부르시잖아.”

달라진 모습을 한 건 네르아뿐만이 아니었다. 하르힌이 굳은 얼굴로 네르아를 노려보았다. 이전에 네르아를 애타게 찾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안의 말에 그녀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하르힌이 그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하르힌, 그럴 필요까진 없어.”

“범죄자잖아요.”

“….”

“이 여자는 잔혹한 배신자입니다. 제가 뭘 찾은 줄 아십니까, 저하? 저하의 발작 치료제 제조법을 찾았습니다.”

“?”

하르힌의 말에 이안의 저주에 대해 아는 이들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네르아는 잠시 당황해했으나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치료제 제조법이라니…. 네르아, 네가…. 아니 너도 입이 있으면 직접 모든 걸 좀 말해봐…응? 우리가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을 봐서라도… 제발 부탁이야….”

미세리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네르아에게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언제나 의연했던 미세리타가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서 점차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네르아.”

사실을 들은 이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황제와… 황제와 계약 했느냐?”

“….”

“정말 너만큼은 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다, 네르아. 그러니 아무 말이라도 해라.”

이안이 네르아의 턱을 움켜쥐어 바닥을 보던 그녀의 시선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제가… 어떤 말을 해드려야 될까요?”

잠잠하던 네르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해탈한 어조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예. 진실을 원한다면 말씀드리죠. 저는 전 황궁 약제사로부터 오랜 가르침을 받았고 황제 폐하의 밑에서 쭉 일해왔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발작 치료제 제조를 이었죠.”

“언제부터… 언제부터 나를 배신한 거야?”

“전 배신한 적, 없습니다.”

“네르아!”

미세리타와 하르힌이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내질렀다.

“시끄러워요. 다들 뭐가 그렇게 분이 난다고 소리들을 치시는지.”

“네가 무슨 짓을 한 지는 알기나 해?”

하르힌을 향해 고개를 돌린 네르아는 당황했다. 하르힌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저하를 위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됐어요.”

네르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저하, 하고 싶은 대로 하시지요. 죽이든지, 미끼로 쓰시든지.”

네르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안은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은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체스포레스 후작.”

“네, 네!”

모두 숨죽여 이안의 말을 기다렸다. 이안이 후작을 부르자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후작이 빠르게 대답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

그의 말에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는지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었다. 모두 한마음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지금 나한텐 중요한 일이 남았다. 그러니 일이 끝나기 전까진 후작 당신이 임시 대리인이야. 일레네를 감옥에 가두고 급한 일들부터 처리하고 있어.”

“네!”

감격하여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후작을 뒤로한 채, 이안은 하르힌에게 고갯짓했다. 하르힌이 의문스러운 눈을 하고 그에게 다가오자 이안이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하르힌, 네르아를 아비드에 던져주도록 해.”

“네?”

네르아가 당황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미끼로 써달라며. 더는 대화를 하고 싶지도 않으니 아비드 제국으로 가라.”

“!”

분명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정말로 그가 그녀를 미끼로 쓸 줄은 몰랐다. 네르아는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미끼로 써주지. 그럼 이걸로 다시는 볼 일도 없겠지. 아, 광각초를 들이마시게 한 후에 아비드에 던져 소동을 일으키게 만들게 해.”

“잠, 잠깐만요 저하. 이건!”

“그녀가 소동을 일으켜 이목이 끌리는 찰나를 노려 우리도 함께 쳐들어간다. 마법 경계선이 있지만 말을 타고 간다면 간단히 뚫을 수 있는 약점이 있으니까.”

“저하!”

네르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하르힌이 침묵 마법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존명.”

⚜ ⚜ ⚜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느리게 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리제아나는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라이핀과 공작은 매일 찾아와 그녀의 몸을 살폈다.

이안의 이야기를 공작에게 말한 자신이 미워서 리제아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리제아나는 입을 다문 지 오래였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리제아나는 그저 숨만 쉬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안이 자신을 찾아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으니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마땅했다. 그저 그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탈출할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창가 너머로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동안의 일을 되새기며 고통스러워했다.

황궁 안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감사했다. 리제아나는 자조했다.

‘죽으면… 다시 회귀할 기회가 오긴 할까. 아니면 이게 마지막일까.’

그녀의 회귀가 예전에는 그녀를 가엾게 여긴 여신이 준 기회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잘못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주어진 형벌 같았다.

이안을 만나 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느꼈다. 그와 함께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느꼈다.

그래서 결심했다.

“…끝내자.”

이 질긴 악연들과 영원히.

이안에게 결국 마음을 전하지 못해 미련이 남지만 이곳에 있는 것이 그녀에게 더 고통스러웠다.

누구에게라도 복수를 하리라.

라이핀과 필로렌치아 공작. 두 사람 중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라이핀은 항상 차고 다니던 허리춤의 단검이 리제아나의 눈에 띄었다. 조금 전 그녀를 찾은 라이핀이 두고 간 모양이었다. 리제아나는 얼른 라이핀의 단검을 챙겨 들었다.

‘누구든 와보라지.’

이윽고, 발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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