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황제의 탐욕은 결국 그, 스스로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안은 조금 전 황제가 검으로 벤 어깨의 상처를 움켜잡았다. 검상이 꽤 커 아팠으나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온 정신은 리제아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황제를 처리했으니 이제 리제아나를 찾는 일만 남았다.
“저하.”
미세리타가 이안에게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위버가 도착했습니다.”
“참 빨리도 오는군.”
이안이 구시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세리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었다.
“위버가 언제 시간 지켜서 온 적이 있나요. 이 정도 시간에 온 거면 빨리 온 축에 끼는 거죠.”
위버는 마탑 소속의 마법사로 날씨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탑의 중요한 인력이었다.
하지만 위버는 미세리타처럼 한 곳에 얽매이지 않아 용병단에 입단하는가 하면 마탑에 잘 머무르지도 않았다.
“저하!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바닥에 푸른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그 위로 위버가 나타났다. 위버는 헐레벌떡 이안에게 다가왔다.
“네가 늦게 와서 저하께서 이렇게 다치셨잖아!”
미세리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위버를 야단쳤다.
“정, 정말? 저하 죄송합니다. 이렇게 다치시다니…. 그게 제가 정말 늦으려고 늦은 게 아니고요, 사실은….”
위버는 큰 키와 달리 소심했다. 미세리타는 보기와 달리 소심한 구석이 있는 위버를 놀리기를 좋아했다.
매번 당하면서도 위버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위버는 웅얼거리며 용서를 구했다.
“됐어. 너 때문에 다친 것도 아니야. 대충 치료했으니 되었다. 미세리타, 위버 좀 그만 놀리지 그래? 얘가 울 지경이잖아.”
“저하 이렇게 재밌는 일을 어떻게 그만둡니까? 장난이었어 소심아.”
이안이 그녀를 타박하자 미세리타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에 마지못해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소심이라니! 나 소심이 아닌데….”
“흐음….”
“미세리타.”
“아유, 알겠어요. 저하. 취소다, 그 말!”
미세리타와 위버가 함께 있을 때면 이안이 먼저 나서서 중재해야 했다. 그가 나서지 않는 한 미세리타는 위버를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를 왜 부르신 거예요?”
그제야 위버는 얼굴을 풀고 목덜미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설마 동봉된 편지도 안 읽고 왔냐?”
“나는 그냥 빨리… 오라고 전달받았는데…. 아 폐하에 대한 복수 건도. 그리고 그 뒤는….”
미세리타가 기가 찬 얼굴로 눈썹을 모으며 위버를 추궁했다. 위버의 말이 흐려지자 이안이 재차 물었다.
“그 뒤는?”
“저는 반역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온 건데요….”
“근데 그렇게 늦게 왔다 이거지?”
“아니 그건….”
위버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이안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 건은 이미 끝났고 이제 다른 중요한 일이 남았어.”
“중요한 일이요?”
“일단 그 전에, 미세리타.”
이안은 위버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미세리타를 향해 고갯짓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미세리타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위버는 침묵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세리타는 손바닥을 펴 이안에게 가져갔다. 이안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주인 모를 상아색 손수건을 올렸다.
“Pondus(추적).”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손 위의 손수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 위로 노란빛이 떠오르며 주위가 빛나기 시작했다.
미세리타의 능력은 ‘추적’이었다. 찾고자 하는 사람의 물건만 있다면 그녀는 마력을 이용해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안이 건넸던 것은 그가 떠나기 전, 리제아나가 주었던 손수건이었다.
“찾았나?”
미세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느끼는 듯이 두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복잡하지만 찾긴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것이….”
“그녀가… 아비드에 있던가?”
이안의 말에 놀란 미세리타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응시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내 마력이 느껴져서 아닌가? 그래서 네가 이상하다고 느꼈겠지.”
그의 말이 맞았다. 그에게 감탄하며 미세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 주인의 기운을 따라가던 중 거대한 마력 방어막에 부딪혀 더 그 기운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방어막 너머로 이안의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의 마력으로 미세리타는 다시 겨우 기운을 따라갈 수 있었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지금요?”
“아니 어디를요? 아비드를요?!”
이안에 말에 미세리타와 위버가 놀라 동시에 외쳤다.
“저하!”
그때 체스포레스 후작과 다른 프로디터 일원들이 다가와 대화에 껴들었다.
“뭐지?”
“어디를 가시던지 저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만, 가시기 전에 해결하시고 갈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지 않지 않습니까?”
“무엇이지? 황제도 서거하셨고 황후 마마까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까! 다음 황위 말입니다. 이렇게 빈자리로 놔두시고 떠나버리시면 텐젤 제국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체스포레스 후작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이안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텐젤 티베라 가문에 방계 혈족도 없나? 아무나 찾아봐.”
“전 황제가 혹시나 있을 반역을 우려하며 모든 혈족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자신의 성을 버리고 이 나라를 떠났습니다….”
“결국 남은 황족도 없다는 뜻…이네요.”
말을 흐리는 후작의 말을 미세리타 자연스레 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 에 대한 회의가 필요합니다.”
“지금 나에겐 시간이 없다. 당장 가야 할 곳이 있단 말이다.”
이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체스포레스 후작은 그대로 그를 놓아줄 수 없다는 듯 그의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럴 순 없습니다! 텐젤에는 새로운 황제가 필요합니다. 전 황제는 권위에 도전하는 것들은 모두 피로 물들었죠. 하지만 현 황제는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내뱉는 건 어떤가.”
그를 부추기는 듯한 체스포레스 후작의 말투에 이안이 그의 말을 잘랐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안이 새빨간 눈을 번뜩였다.
“저희 프로디터들은 이안 공작 저하께서 황제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뭐?”
“그동안 황제 폐하의 옆에서 처형인의 역할을 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하께서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나는 황제 자리를 맡을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새로운 황제의 재목을 찾아봐.”
이안이 발걸음을 돌리자 체스포레스 후작이 다급하게 앞서 나가 그를 막았다.
“뭐 하는 거지?”
그의 행동에 이안이 거슬린다는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체스포레스 후작은 두렵지 않았다. 제국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다. 황제와 달리 이안은 텐젤을 어질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발 제 말을 헤아려 주십시오.”
“황제가 되면 귀찮은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저하! 그게 아니죠.”
이안이 다시 한번 단호히 거절하자 이번에는 미세리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다급하게 이안을 설득했다.
“황제가 된다면 아비드를 쳐들어갈 이유가 합당해지지 않습니까? 더 많은 병사를 이끌고 아비드 제국을 쓰러뜨리러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거 없이도 충분히 너랑 나 위버, 셋이서 가면 충분하잖아.”
“아니요! 아비드 제국이 마국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저희는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니 저희 마법과 병사를 합쳐야 합니다.”
“….”
미세리타의 말도 맞았다. 하지만 황제라는 직책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됐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눈빛들을 마주하며 그가 입을 뗐다.
“…나는.”
⚜ ⚜ ⚜
“공격해야 합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침을 튀기면서까지 라이핀을 설득하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텐젤을 공격할 때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네, 리제아나도 돌아왔고, 무엇보다 텐젤을 공격할 구실이 있지 않습니까?”
“구실이라…. 전에 말했던 그 계획을 말하는 건가?”
필로렌치아가 라이핀의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텐젤 제국을 무너뜨릴 그 계획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하긴 했어. 텐젤의 황제인 그 늙은이가 하는 행동과 말이 예전부터 거슬렸거든.”
“바로, 그겁니다!”
허공으로 두 남자의 눈빛이 마주쳤다.
두 남자가 같은 목표를 두고 야망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좋아. 그 안건을 승인하도록 하지.”
라이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들과 마법사들을 모두 정비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그들이 리제아나를 건드린 것은 우리 아비드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과 마찬가지니.”
라이핀이 힘 있게 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드디어 텐젤을 무너뜨리는 거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제 뜻대로 흐르는 상황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드디어 전쟁이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눈을 빛내며 음침하게 웃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라이핀이 문득 필로렌치아 공작에게 물었다.
“필로렌치아 공작, 혹시 광각초 남은 것이 있나?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향수는 없지만 풀은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재료 하나를 추가해서 나에게 줄 수 있겠나?”
필로렌치아 공작이 의아한 눈으로 라이핀을 바라보았지만 라이핀은 답하지 않았다. 공작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