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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117)

93화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그녀에게 아버지와 라이핀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다 괜찮을 거야.”

그가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소리 지르며 그의 손을 쳐 내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그녀에게서 눈 한번 떼지 않고 집중하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은 상품에 흠이 없는지 살피는 장사꾼의 것과 같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필로렌치아 공작의 시선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을까?’

그들과 함께 있는 이 공간이 끔찍했다.

그녀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두 사람이 그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증스러웠다.

“안정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몸은 좀 어때?”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막 일어난 탓에 머리 또한 어지러웠다.

“리제아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어떡하니.”

필로렌치아 공작이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재촉했다. 그의 목소리에 리제아나는 몸을 떨었다.

“폐하가 물으셨잖니.”

“…괜찮습니다, 폐하.”

“폐하, 이 일에 대한 범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까?”

무언가를 생각하던 공작이 넌지시 라이핀에게 물었다.

“그런 셈이지. 리제아나가 납치됐다는 것조차 비밀로 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고 리제아나가 회복하면 공식적으로 모든 것을 발표할 셈이야.”

“그렇다면 사실을 조금 뒤틀어 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필로렌치아 공작이 눈을 번뜩였다. 위험하게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아 그가 또 무언가를 꾸미는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을 뒤틀다니?”

“간단합니다. 이번 기회에 텐젤과의 악연도 정리하는 겁니다.”

“텐젤? 텐젤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폐하, 천천히 생각해 보시지요.”

공작은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는지 흥분 어린 목소리로 라이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딸, 리제아나가 텐젤에 납치되었다고 전하는 건 어떠십니까? 그리고 크로덴느 백작가가 그동안 텐젤과 내통해 왔으며 텐젤이 그녀를 납치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하는 겁니다.”

“!”

그의 말에 라이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과연!”

“그 풀에 대해서도, 그 계획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성공시킨 것도 없으니까요.”

리제아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풀’이라면 분명 광각초를 말하는 것일 테지만 그들이 말하는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같이 묶어 세력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저희 쪽에서 사절단을 보내고 그 안에 특급 정예 기사들을 넣어두는 거죠.”

라이핀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말을 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마법사도 붙인다면…!”

“완벽할 겁니다. 먼저 기사들을 보내놓고 마법사에게 이동 마법을 시켜 대기시켜둔 병사들도 모두 들여보내는 겁니다.”

“과연. 빠른 시간내에 초토화가 진행되겠군.”

두 사람은 텐젤을 공격할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텐젤? 이안…. 이안은 어떻게 되었지…?’

리제아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전투를 앞두고 있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리제아나.”

리제아나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라이핀이 그녀를 불렀다.

“네, 네….”

“이안이 누구지?”

“네?”

“꿈속에서 자꾸 그 이름을 불렀잖아. 이안이 도대체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황궁에도 그런 이름을 가진 귀족은 들어보지 못했다.”

잠결에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니. 리제아나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라이핀이 그의 이름을 들었다니 낭패였다.

“…이안…이라고요?”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필로렌치아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래도 나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식사를 하고 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라이자에게 들었습니다, 며칠간 간호만 하셔서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셨다고요.”

“공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가 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전하께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부녀끼리 대화라도 나눌 겸 말이죠.”

필로렌치아 공작의 말에 리제아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라이핀와 함께 있는 이 공간도 싫었지만 필로렌치아 공작과 단둘이 남는 일이 더 끔찍했다.

리제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라이핀을 돌아봤지만 라이핀은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라이핀…. 정말 끝까지…!’

리제아나는 불안감에 입술을 씹었다.

⚜ ⚜ ⚜

“흐음….”

라이핀은 조금 고민을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리제아나, 조금만 있다 올게.”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라이핀이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방에는 공작과 리제아나,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리제아나.”

라이핀이 방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필로렌치아 공작이 거만하게 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꼬며 그는 조금 전 언제 다정한 목소리를 냈냐는 듯 낮게 그녀를 불렀다.

“네…. 네….”

“어디에 납치되어 있었지?”

“….”

그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아온 리제아나는 그에게 비밀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안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텐젤에서 이안이 그녀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의 차례였다. 이안과 텐젤에 대해서는 단 한 단어도 언급해서는 안 됐다.

“리제아나?”

리제아나에게서 답이 없자 공작이 위협적인 어조로 다시 한번 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이상하구나. 말을 하는 법이라도 까먹은 게냐? 아까 폐하께서 네게 말을 걸으셨을 때도 넌 멍청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기만 했지.”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침대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윽.”

한순간에 그가 리제아나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거칠게 뒤로 당기는 손길에 리제아나는 속수무책으로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말을 했으면 빠릿빠릿하게 답해야지, 내 딸?”

“크, 크로덴느 백작가에….”

“아니지, 아니야.”

리제아나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원하는 답이 아니라는 듯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제아나, 너는 내 딸이니까 똑똑하잖아. 안 그래?”

“….”

“자 다시 말해보렴. 네 입으로 직접. 네가 어디에 납치되었는지. 또 누가 너를 감히 납치했는지 대해 세세하게 말이야.”

“크로, 크로덴느 백작가에서.”

“더 자세히 말해야지?”

공작의 위협에도 리제아나는 굴복하지 않으러 안간힘을 썼다.

“다시.”

공작이 짤막하게 말했다.

“크, 크로덴느뿐입니다.”

“리제아나. 저택의 지하 감옥에 다시 들어가야 알맞은 답을 해주겠니.”

“!”

필로렌치아 저택의 지하에는 어둠뿐인 조그마한 방이 있었다. 지하 감옥이라고 불리는 그곳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온갖 벌레가 바닥을 기었다. 게다가 벽이 모두 거울로 되어 있어 한시라도 그곳에 있기 괴로웠다.

“그곳에서 얼마나 있어야… 답을 해줄까?”

“공, 공작님….”

리제아나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가 공작이라고 불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 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증명받고자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단다.”

공작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나는 이안이라는 자가 누군지 아는데.”

“!”

“약속해주지. 네가 진실하게 말한다면 이안이라는 자는 살려주도록 하지. 폐하를 내보냈던 건 내가 네게 내리는 마지막 자비니.”

“….”

정적이 흘렀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지만 리제아나는 겨우 이성을 붙잡았다.

그녀의 반항이 수그러들자 공작이 만족스럽다는 듯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재차 물었다.

“내 딸, 리제아나. 아비로서 나는 정말로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야. 그러니 말해주렴, 진실하게 말이야.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납치되어 있었지?”

“….”

이번에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이안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힘을 길러 언젠가 그와 대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공작이 그녀의 머리칼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입을 떼지 않겠다는 각오가 공포 때문에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쓰러졌다.

‘미안해요, 이안….’

리제아나의 시야가 눈물로 뿌예졌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 때문에 나는 눈물이었다. 멍청하게도 지금의 리제아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텐…텐젤… 제국…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공작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텐젤 제국에서?”

공작이 물으며 그녀를 채근했다.

“크로덴느 백작가에서 텐젤 제국 병사들을….”

“흐음…”

필로렌치아 공작은 이안이 그녀를 납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에게 이안을 살려주겠다는 말을 했으니 망설이는 듯했다.

‘제발.’

리제아나는 그녀의 입으로 이안이 그녀를 납치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그에게 부탁한 일이지 않던가.

“좋아.”

생각을 마친 공작이 그녀의 머리칼에서 손을 놓았다. 리제아나의 몸이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황제 폐하께 그 충격적인 소식을 손수 전해주지.”

리제아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떠나던 이안의 뒷모습이 시선 끝에 자꾸만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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