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델리사는 한때 믿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주어진 인연이 있어서 생애 단 한 번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인연인 사람과 빨간 인연의 실로 이어져 있어 결국에는 운명처럼 만난다는 이야기를 델리사는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옛날에 버린 지 오래였다.
“다 당신 때문이야!”
“뭐가? 당신이 똑바로 교육했어야지!”
어린 시절, 처음 나간 티파티에서 다른 가문의 어린 영식이 델리사의 치마를 들추는 바람에 큰 소동이 났다. 화가 난 델리사가 영식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델리사의 부모는 겉보기에만 사이가 좋은 허울뿐인 관계였다.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삶이 있었지만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델리사가 태어났다.
“예의범절을 못 배웠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왜 제 탓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흔한 예절 선생 안 붙이고 뭐 했냔 말이야!”
“애가 알아서 배울 줄 알았죠!”
“멍청한 것. 당신을 닮아서 더욱더 멍청한 것이겠지. 다 그만둬!”
크로덴느 백작 부인은 자신을 치장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델리사의 예절 선생을 들이기 위한 돈도 그녀의 사치를 위해 써버렸다.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델리사는 새로운 드레스 한 벌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델리사는 조금 달라졌다.
‘누구나 마음에 들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면 엄마랑 아빠도 싸우시지 않고 잘 지내실 거야. 다 내 탓이야. 나만 잘하면 돼.’
델리사는 부모의 행동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다. 누군가 그녀에게 험한 말을 해도 웃음으로 넘겼다.
크로덴느 백작 부인은 아름다웠다. 그녀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델리사는 매력적인 여성으로 자라났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스러워했다. 그녀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부모에게 배운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라 낙인찍어 그녀의 앞에서 치웠다. 그러자 곧 누구도 함부로 그녀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만둬! 다 그만둬!”
“지긋지긋해, 모든 게!”
크로덴느 백작 부부의 관계는 더 붙을 수도 없이 금이 가버렸다.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그래서 델리사는 포기했다.
델리사는 스스로의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그녀가 선택한 길은 바로 출세였다.
겨우 황실의 무도회장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델리사는 그곳에서 라이핀을 마주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니….’
그의 뒤로 후광이 보이는 듯했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델리사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델리사는 그 순간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리라 다짐했다.
델리사가 춤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갈 때쯤이었다. 라이핀의 걸음이 한 영애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가 필로렌치아 가문의 기분 나쁘게 생긴 공녀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나를 두고 저 음침한 공녀에게 춤을 청한 거야…?’
처음에는 필로렌치아 가문의 위상 때문에 라이핀이 일부러 그녀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춤이 끝난 뒤에도 라이핀은 계속해서 리제아나 곁에 머물렀다.
델리사는 무도회 내내 라이핀에게 말을 걸 틈을 노렸으나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허탈하게 무도회에서 돌아온 델리사는 라이핀의 얼굴을 떠올리느라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리제아나는 더 적극적으로 라이핀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는 분명 그가 제대로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무도회에서 계급 높은 가문 영식이나 하나 잘 꼬셔서 살아남으렴.”
크로덴느 백작 부인은 항상 델리사에게 당부했다. 자신처럼 치졸한 남자한테 잡혀 살기 싫다면 적당한 남자를 고르라고.
적당히 어리석고 돈이 많은 남자를 잡아야 한다며 백작 부인은 델리사에게 말했다.
“어머니, 앞으로 황실 무도회는 제가 참석하겠습니다.”
“뭐? 안 된다. 무도회는 내 삶의 낙이야.”
“어머니께서 항상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남자 하나 잘 꾀어서 잡아두라고. 저는 지금부터 그 일을 해볼까 해요.”
“호오?”
백작 부인은 델리사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계속 말을 이어가 보라는 듯한 백작 부인의 눈빛에 델리사는 입을 뗐다.
“어머니. 저는 대어를 낚을 거예요.”
“대어?”
“엄청나게 큰… 보물…. 황태자 전하를 낚을 겁니다.”
“푸핫, 역시 내 딸이야. 좋아.”
델리사는 어렵지 않게 백작 부인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델리사는 황실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가하며 라이핀의 곁에 머무를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리제아나와 라이핀이 약혼식을 맺고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그녀가 낄 자리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델리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 가면 무도회가 열린다고 하더구나.”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가면무도회는 가면을 쓴 채 신분을 감추고 제약 없이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의 무도회였다.
“무도회에 참가하실 생각인가요?”
델리사는 최근 상점가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비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상한 물건이 많았다. 델리사는 그녀의 물건을 곧잘 구매하곤 했다.
“그래.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델리사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신가요?”
로브의 여인이 묻자 델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드디어 전하께 접근할 기회가 생겼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제가 도움을 주어도 괜찮을까요?”
“도움?”
그녀의 말에 델리사가 눈썹을 세웠다.
“저에게 마침 좋은 물건이 있거든요. 친구를 사귄 기념으로 하나 서비스로 드릴게요. 어때요? 이거 사실 엄청 비싼데 말이죠.”
“흐음…?”
“얼마나 좋은 물건인지는 직접 사용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로브의 여인은 가방 안에서 분홍빛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뭐가 들어가 있는지는 비밀이지만 제 말을 믿어보세요. 영애에게 분명 필요한 물건일 겁니다.”
“필요한 물건이라고?”
“못 미더운 모양이군요.”
“당연하지. 난 네 출신도 모르는걸?”
“뭐….”
델리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로브의 여인은 아쉽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다시 병을 가져가는 로브의 여인에 델리사는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 잠깐만.”
델리사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효과가 없으면 각오해야 할 거야.”
“물론이죠, 레이디! 이 향수면 콧대 높은 황태자 전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목도 충분히 끄실 수 있을 거랍니다.”
그녀의 말에 델리사는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향수를 챙겼다. 선택지가 많지 않던 그녀는 향수를 뿌리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향수를 몸에 뿌리자 장미 향이 났다. 금방 날아갈 줄 알았던 향은 오래도록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향수를 뿌리고 무도회장에 들어서자 연회장 안의 모든 남성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델리사는 그제야 향수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황태자 라이핀를 알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자주 홀로 내려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아름다운 파란 머리카락은 어디서나 눈에 띄어서 쉽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전하.”
델리사는 자연스럽게 라이핀에게 접근했다. 향이 그에게 전해지도록 머릿결을 정리하는 척 그녀는 머리칼을 흩날렸다. 그러자 라이핀의 경계심이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영애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 가면을 써도 그대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 같아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할 지경이야.”
라이핀이 그녀의 귀에 속삭이며 웃음을 지었다.
“저희 조금만 더 대화할까요? 저 발코니로 가는 것은 어떠세요, 전하?”
“영애가 먼저 그런 말을 하게 하다니. 나도 참 남자로서 실격이군. 좋아.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그다음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둘은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어느새 두 그림자는 한데 합쳐졌다.
⚜ ⚜ ⚜
“더 할 말이 있는가, 납치범?”
라이핀이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보았다. 예전에 그녀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라이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야속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변해버리실 수 있으십니까!”
“잠시 흔들린 것뿐인 가벼운 마음이었다.”
“!”
라이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델리사에게 차갑게 못 박았다.
리제아나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언제 싸늘한 얼굴을 했냐는 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리제아나, 원하는 걸 말해.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
“나는….”
“감히 나의 아내를 납치하다니. 그녀를 다치게 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이번에는 필로렌치아 공작이 막아서서 리제아나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되물었다.
“괜찮니, 리제아나?”
두 남자의 관심이 모두 리제아나를 향했다. 델리사는 리제아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한지 메마른 입술을 자꾸만 잡아 뜯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
델리사는 그 표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억압된 공기 속에서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설마….’
델리사가 이전에 보았던 리제아나와 달랐다. 리제아나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의 낯빛이 창백했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걸까?’
그녀는 사라졌던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 아비드 제국을 떠난 것이 아니었을까. 문득 델리사의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리제아나는 이곳 아비드 제국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말해보세요, 리제아나 님.”
델리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비드 제국을 떠났던 건 당신이 원해서 떠난 거죠? 지금 이곳에 한시도 있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게 어디서 감히!”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델리사의 뺨을 내리쳤다.
“…아.”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맞은 뺨이 아프고 쓰라렸다.
“옥에 가두도록.”
라이핀이 손을 가벼이 털며 한숨을 내뱉었다.
“가시지요, 영애.”
“놔! 솔직히 말해봐요, 리제아나! 내가 구원해준 거 아닌가? 모든 걸 가졌는데 왜 그렇게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지?!”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델리사를 끌고 나갔다. 델리사는 저항했지만 기사들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재수 없어, 당신!”
델리사는 끌려나가면서도 리제아나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듣지 마.”
라이핀이 두 손을 내려 그녀의 손을 막아주었다. 그녀는 한가지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탈출해야 해.’
입술을 짓씹었다.
‘이곳에 있다간 내가 먼저 말라 죽을 테니, 한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를… 라이핀을 죽여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