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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17)

91화

장미 향이 났다.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그 향기만큼은 또렷했다. 리제아나는 조금씩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장미….’

장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리제아나에겐 끔찍한 기억만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아비드에 있던 시절, 아비드 황궁의 정원에는 언제나 장미꽃이 만발했다. 그래서 장미 향을 맡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끔찍한 기억들이.

“리제아나!”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의 것보다 굵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굴지 생각해보던 리제아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깨어난 거야? 정신은, 좀 차릴 수 있겠어?”

리제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직 시야가 돌아오지 않아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의식이 몽롱했다.

‘마탑에는 장미꽃이 없어. 어째서 장미 향이 나는 거지…. 여긴 어디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다시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리제아나는 아비드 황궁의 정원에 있었다. 어리둥절하게 정원 안을 살피던 리제아나는 그녀가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제아나!”

리제아나는 정원 안의 장미를 구경하고 있었다. 색색의 장미를 바라보고 서있자니 저 멀리서 라이핀이 다가왔다. 그녀 앞에 멈추어 선 라이핀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제야 리제아나는 꿈으로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핀과 약혼식을 치른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 틀림없었다.

약혼식 후로 그녀 앞에 설 때면 라이핀은 매번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을 때는 리제아나에게 일을 맡길 때뿐이었다.

“전하.”

리제아나는 예를 지켜 라이핀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자 라이핀의 옆에 선 여자가 눈에 띄었다.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리제아나.”

“말씀하세요.”

“델키란 영지에 나오는 원두를 이번 로드비아 왕국의 사절단에게 주는 것은 어떤가?”

“네?”

아비드 제국는 다양한 영지에서 원두를 재배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원두는 사세리아 후작의 영지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황궁에서조차 사세리아 후작의 영지에서 나오는 커피를 선호할 정도로 사세리아 후작 영지의 원두는 질이 좋았다.

한데 사세리아 후작의 영지가 아닌 델키란 영지의 원두를 선사품으로 보내라니. 리제아나는 당황스러웠다.

“델키란 영지의 원두는 사세리아 영지의 원두보다 질이 떨어집니다. 질이 더 떨어지는 원두를 보낸다면 저희 아비드 제국의 평판이….”

“황태자비 전하. 그 말씀은 설마 제 가문이 수익만 추구하는 불명예스러운 가문이라는 것인가요?”

리제아나가 라이핀의 말에 반대하자 여자가 울음을 머금은 채로 훌쩍였다.

찰랑거리는 분홍 머릿결에 태양 같은 금안. 그녀의 생김새가 낯이 익었지만 어디서 본 영애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리제아나.”

라이핀이 굳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옆에 선 여자를 제 품에 깊게 밀어 넣으며 그가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다.

“하라면 해. 토 달지 말고.”

“…네, 전하.”

델키란 영지의 원두는 질이 매우 나빴다. 로드비아 왕국에게 좋은 품질의 선사품을 주어야 했지만 라이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번 로드비아 왕국 사절단의 방문은 앞으로 두 나라 사이의 외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그래서 리제아나는 그들에게 사세리아 후작에게서 받은 최상급의 원두를 선사품으로 하사하되 재배지는 델키란 영지라고 소개했다.

로드비아 왕국은 훌륭한 원두에 감탄을 쏟아냈고 이윽고 텔키란 영지의 원두가 로드비아 왕국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사세리아 후작은 황궁의 배신으로 몸 앓아누웠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훗날 이 일을 라이핀에게 보고하자 라이핀은 짧게 감탄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역시 리제아나야.”

“리제아나!”

‘어라?’

분명 꿈속인데 어째서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는 거지? 리제아나는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눈살을 찡그렸다. 상아색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리제아나! 깨어났구나!”

증오스럽기 그지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 ⚜

필로렌치아 공작은 여느 때처럼 저택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퍼퓸니즈 사업에 상당한 적자가 난 탓에 그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양귀비를 얻기 힘들어지면서 더는 광각초로 향을 만들 수 없었다.

다른 약초를 찾아보았지만 양귀비만 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초조해졌다. 황실에 자금줄을 대지 않으면 그동안 그가 황실을 통해 누리던 것들을 모두 잃고 말 터였다.

“젠장! 리제아나, 이게 다 그 계집 때문이야. 그 아이가 사라진 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없다고!”

필로렌치아 공작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저하! 필로렌치아 공작 저하!”

일라이자가 헐레벌떡 공작이 있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방문 일자도 잡지 않고 필로렌치아 공작저를 찾은 일라이자에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일라이자?”

“황태자비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

공작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실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줄곧 막막한 기분이었는데 리제아나가 돌아오다니. 그녀가 있으면 자금줄을 끌어올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참말이냐? 폐하께서는?”

“폐하께서 구해오셨습니다. 많이 위급해 보이셨습니다.”

“뭐라고! 지금 당장 가지.”

“모시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일라이자가가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타 곧바로 황궁에 도착했다. 그는 단번에 리제아나의 손을 간절하게 잡고 있는 라이핀 앞에 도착했다.

“리제아나!”

평생 속만 썩일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그토록 반가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리제아나는 수척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놀라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폐하. 리제아나, 우리 리제아나는 괜찮은 겁니까?”

“일단 급한 대로 처치는 해두었는데 모르겠네.”

“그럴 수가. 안됩니다. 제가 약초라도 구해오겠습니다. 제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겁니다.”

그녀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공작은 아직 리제아나의 지위가 필요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든 목숨만 붙여놓아도 상관없었다.

‘의식을 찾지 못하더라도 숨만 쉬어준다면….’

그때였다. 리제아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눈꺼풀 사이로 리제아나의 보랏빛 눈이 나타났다.

“리제아나!”

“리제아나!”

놀란 세 사람이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살았어. 살았구나. 역시 리제아나, 당신이야.”

라아핀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을 하며 리제아나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얕은 키스를 했다.

“윽. 이게 무슨…. 여기가 어디야….”

현기증이 나 리제아나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녀는 얕은 신음을 냈다.

정신이 점점 또렷해지자 그제야 리제아나는 그녀가 아비드 제국의 황궁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제아나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리제아나, 괜찮아?”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내가 왜 여깄어.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라이핀을 바라보았다. 리제아나는 몸을 움츠리며 라이핀에게서 물러났다.

“일단 전정부터 하자, 응? 리제아나. 당신 지금 많이 허약해져 있는 상태야. 그러니까 조금만 휴식을 취하는 게….”

“미친 소리 하지 마. 나를 왜 데리고 온 거야. 이곳이 더 끔찍한데…. 이곳이 더….”

머리를 감싸며 리제아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끔찍한 곳에 다시 돌아오다니. 꿈일 것이다. 현실일 리가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라이핀의 그늘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황궁 안이었다. 그에 대한 원망과 다시 돌아왔다는 허탈감에 숨통이 조여 들어왔다.

“리제아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똑바로 봐. 나야 나, 라이핀. 네 남편.”

“나, 나에게서 떨어져…!”

라이핀이 다시 그녀에게 손을 뻗자 리제아나가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를 이용만 하다가 끝내 그녀의 목숨까지 앗아간 그였다.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그를 다시 마주한 현실이 끔찍했다.

“내 딸.”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제아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몸이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낮게 방 안을 울렸다.

“조용히 해야지. 폐하 앞에서 그게 무슨 추태지?”

“설마….”

필로렌치아 공작의 목소리를 알아챈 리제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교육을 받았던 시절의 공포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래. 그래야지. 잘했어 리제아나.”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공작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은 어떻니?”

“괜찮습니다….”

“장하구나. 너무 장해. 역시 필로렌치아 가문의 딸다워서 이 아비는 그저 행복할 뿐이란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리제아나는 이전에 공작에게 고통받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의 손길만으로 리제아나는 어렸을 적 그때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폐하.”

공작이 고개를 돌려 라이핀에게 공손히 말을 붙였다.

“왜 그러지 공작?”

“진상 규명을 할 때입니다. 리제아나가 어디에 어떻게 납치되어 있었는지 말이죠.”

“걱정할 필요 없네. 벌써 범인은 잡았으니까.”

“정말입니까?”

라이핀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이핀이 방 한편에 있는 설렁줄을 당기자 일라이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데리고 왔습니다.”

일라이자는 라이핀에게 고개를 숙이곤 문 너머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기사들 손에 한 여자가 끌려들어 왔다.

머리가 엉망으로 풀어진 채 어디 성한 구석 없이 구겨지거나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델리사였다.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레이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그녀는 기사들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델리사 영애…군요.”

필로렌치아 공작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죄인을 이 앞으로 끌고 오도록.”

라이핀이 고갯짓으로 제 앞으로 가리켰다. 델리사는 기사들의 손에 그의 앞으로 무릎이 꿇렸다.

“어때, 리제아나?”

라이핀은 비참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델리사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라이핀이 리제아나의 어깨를 잡으며 다정히 물었다.

“너를 다치게 한 여자를 데려왔어. 어떻게 하길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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