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황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던 것일까.
그에게 이골이 났다. 어깨가 빠져나갈 듯이 아팠지만 이안은 꿋꿋이 참았다.
“잘 가라 이안!”
“누가 갑니까.”
황제가 칼을 직선으로 뻗어 곧장 이안의 다친 어깨를 향해 겨누었다. 이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이안은 빠른 속도로 왼쪽 어깨를 비틀어 공격을 한차례 피했다.
“!”
“제 차례군요.”
그의 발 빠른 동작에 당황한 황제가 제대로 다시 자세를 잡을 틈도 없이 이안은 이를 바득 갈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검을 들고 있던 오른손을 그대로 내리쳐 황제를 한발 물러서게 한 그는 그대로 황제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렸다.
‘설마 찌르겠어?’
황제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제아무리 반격을 가했대도 결국 그의 손안에서 키워진 세월이 있으니 쉽게 그를 베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과의 눈을 보자 믿음이 저 아래서부터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잘 가십시오!”
새빨간 눈동자는 복수를 앞두고 희열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녁 빛 노을보다 새빨간, 어느 밤보다 더 짙은 어둠을 품은 눈을 그대로 마주한 황제는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안의 검이 천천히 그의 목을 따라 움직였다. 검은 조금만 움직여도 벨 수 있을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잠, 잠깐!”
“이제야 겁이 나시는 모양이군요.”
온정이라곤 하나 없는 모습에 황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잠깐만, 이안. 아직 얘기가, 얘기가 안 끝났잖아?”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황제는 어떻게든 제 목이 붙어 있을 시간을 끌어보려는 듯이 악착같이 매달렸다.
“나를 살려주기만 하게. 응? 조용히 살아주지.”
“살아주지? 재밌는 말을 하시는 군요. 제가 어째서 폐하를 살려드려야 합니까.”
“아, 아니 살려만 주게 조용히 살 테니. 부탁이야. 정말 부탁이네.”
“흠….”
“그동안 내가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저버릴 수 없다, 이안! 네가 나 없이 홀로 어떻게 견뎌냈을 거라 생각하지? 내가 너를 그 자리까지 키워준 거다. 나 덕분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거다. 알기나 하는 것이냐!”
하지만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협박이라도 하려는 듯 황제는 언성을 높였다.
“…폐하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아버지가 지금까지 제 옆에 계셨을지도 모르지요.”
“멍청한 것! 네가 체스펠을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넌 그 힘도 가지지 못했을 거라고.”
그의 높아진 목소리에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고는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들어 올려 비웃음을 조금 흘려보내는 것으로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비, 비웃어? 네가 감히?”
“전 제가 한 번도 이 뭣 같은 능력을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안은 그 말을 하면서 다시금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아래턱에 힘을 주고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로부터 침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그럼 이만….”
“뭐, 잠, 잠깐.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이안이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꺾었다. 그가 굳은 목소리로 무심히 반응하자 황제는 다급하게 검을 떨어트리고는 말을 더듬었다.
“시간을 끌수록 두려움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아시지 않지 않습니까.”
“정말로 하나만 묻고 싶다, 이안.”
“뭐 그럼, 좋습니다. 하시죠.”
“저주를… 그간 홀로 버텨낸 것인가? 어떻게 해서 과거로부터 그리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황제의 예상치 못한 마지막 질문에 이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제게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처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제게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삶을 구원받았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죠.”
“?”
“처음 만남과 달리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단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으로부터 과분한 것들을 받았습니다.”
“…큭.”
황제는 이안의 말을 듣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한참을 더 웃었다.
“왜 웃는 겁니까.”
황제를 바라보며 이안이 의문스럽게 묻자 그제야 황제는 웃음을 멈추었다.
“사랑하는군, 이안. 그 사람을.”
“첫사랑이죠.”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데?”
“이루어질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 사람이 궁금해지는구나. 네가 황실에 칼을 든 반역자라는 것을 알기나 할지.”
“그 사람이라면 제가 무엇을 하든 믿어줄 겁니다.”
-폐하!
“!”
문득 문 너머로 일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으로 달려오는 발소리에 황제는 낮게 코웃음 쳤다.
“흠…. 되도록 일레네 앞에서 죽고 싶진 않았는데.”
“시간을 빨리 끌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이죠.”
“상관없나. 어차피 내가 죽은 뒤의 일일 테니 딱히 신경 쓰이진 않는구나.”
“이기적이시군요.”
이안이 비릿하게 뇌까렸다.
“일레네는 나와 함께 해온 세월이 길지. 젊은 시절부터 나를 가까운 곳에서 받들어 온, 나를 유일하게 챙겨주었던 사람이니까.”
“황후 폐하는….”
“황후라…. 그녀는 더 나를 볼 수 없으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혀가 길구나. 어서 나를 죽여라. 너랑 시답지 않은 대화나 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 않다.”
황후 이야기를 꺼내니 황제가 서글프게 말했다.
이안은 황제가 황후에 대해 더 설명하길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하하. 잔인한 놈.”
황제가 허공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순간이구나.”
“좋은 곳은 가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일 테다.”
- 쾅.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황제의 몸이 이안의 검에 쓰러졌다.
“저하!”
“폐하!”
미세리타와 일레네가 각자의 주군을 불렀다. 싸움의 종결을 알리는 최후의 외침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황, 황제 폐하!”
모든 것을 내려놓아 허탈해 보이는 얼굴로 이안이 초연하게 말하자 일레네가 괴로운 얼굴로 황제를 찾았다. 쓰러진 황제에게 다가오려는 일레네를 미세리타가 막아섰다.
“미세리타. 보좌관을 데려가라.”
“…”
“미세리타, 대답.”
“…존명.”
미세리타는 경례를 취하며 말없이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텐젤의 주인이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고맙다.”
허리를 펴며 일레네와 함께 모습을 감추는 미세리타를 바라보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아래로 눈을 감은 늙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중얼거렸다.
“…끝났구나. 드디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결국 그가 해낸 것이다.
“아버지.”
그리고 마침내 소리 내 입 밖으로 그리워하던 그 이름을 못내 외쳐보았다.
“아버지….”
하지만 그의 부름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저하!”
이안이 허털한 눈으로 검을 든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미세리타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일레네를 어딘가에 두고 온 모양인지 미세리타가 그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처,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마력으로 대충 치료했어. 황후 폐하는?”
“황후 폐하께서는 저 콧수염 백작이….”
미세리타는 고갯짓으로 상황을 지휘하던 체스포레스 백작을 가리켰다. 그를 가리키는 단어에 이안은 조금 웃었다.
“이 아가씨가! 콧수염 백작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저하, 황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성난 발걸음으로 다가온 체스포레스 백작이 실눈을 떠 미세리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곧 그는 이안에게 고개를 돌려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죽었어.”
“직접…말이십니까?”
“그래. 약속했잖아. 수장으로서 너희들의 원한과 내 원한의 모든 것을 갚아 이곳을 그의 무덤으로 만들겠다고.”
“…그러셨죠.”
체스포레스 백작이 웅얼거리며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래서 황후 마마는? 어디 계시지?”
황후, 메탈리아 텐젤 티베라는 황제의 단 하나뿐인 부인이었지만 그저 허울 좋은 방패일 뿐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드높은 가문의 명성을 이용해 귀족들은 단숨에 제 편에 서도록 했다. 그 덕에 황제는 권력을 유지할 발판을 다질 수 있었다.
이안은 프로디터들과의 상의 끝에 그녀가 그들에게 해를 가한 흔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낸 후 살려두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것이, 황후궁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황후궁 사용인을 붙잡아 물었는데….”
체스포레스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빨리 말하지.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어느새 다가온 미세리타가 긴 금빛 머리를 배배 꼬며 구시렁거리자 백작이 또 한 번 그녀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한 달 전, 병으로 돌아가셨다 합니다. 아직 황제는 공식으로 그녀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은 듯합니다.”
“….”
체스포레스 백작의 말에 왜인지 이안의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껍데기뿐인 황후라고는 하나 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왜 감추었던 것일까.
잠깐이었지만 여러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백작이 한 가지 더 생각났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황후궁 사용인들 말로는 황후 폐하가 황제의 첫사랑이라고 하더군요. 황제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약점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랑하지 않은 척했다더군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겠으니…. 됐다.”
그제야 황후의 이야기에 일그러지던 황제의 눈을 떠올린 이안은 뭇내 눈을 잠시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저하? 피곤하십니까?”
“…아니.”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비를 하고 아비드로 전진한다.”
“쉬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 돼. 나는 괜찮으니까 리제아나를 한시라도 찾아야 해.”
방금 황제의 말을 들어서일까, 갑작스레 애써 잠재우고 있었던 불안감이 속도를 높여 마음을 뒤덮기 시작했다.
“…리제.”
손에 더이상 그녀의 온기는 남아있는 듯해 그는 손을 희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