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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117)

89화

이안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고 간신히 몸에 힘을 주었다. 이마를 어깨에 비벼 옷에 땀을 닦았다.

“그래, 쉽게 죽으면 안 되지.”

이제 황제는 희열 가득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안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어디 덤벼 보아라.”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이안은 황제를 바라보며 살기를 흘렸다.

‘찔린 곳이 왼쪽 어깨라 그나마 다행인 건가.’

움직일 때마다 상처에서 고통이 느껴져 입술을 악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재 그의 목표는 황제를 제거하는 것, 그뿐이었다.

“봐주지 않습니다.”

“와보거라!”

허공에서 두 검이 신랄하게 부딪히는 커다란 쇳소리가 집무실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늙었지만 여전히 예전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황제는 예상보다 검술이 뛰어났다.

“윽.”

그 바람에 이안은 한쪽 손으로만 상대할 수 없어 다친 어깨를 무리해서 움직였다. 어깨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짧은 신음과 함께 이안은 그가 가진 역량을 발휘해 황제에게 맞섰다.

“아픈데 포기하지 그래? 지금이라도 투항하면 다시 예전처럼 귀여워해 줄 수 있는데.”

“우스운 소리 마시지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폐하께서 제 모든 것을 망치지 않았습니까.”

검이 맞부딪힌 상황에서 황제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다. 이안 지금이라도 네가 포기한다면 오늘 벌인 모든 일을 용서해주겠다.”

“단언컨대 필요 없습니다.”

“아쉽구나. 이게 마지막 기회이거늘!”

이안이 거절하자 황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검에 힘을 더욱 주고 이안의 검을 내리쳤다.

“제가 제 주제를 잘 알거든요.”

이안은 종아리에 힘을 주어 황제의 검을 받아쳤다.

“그래? 그렇다면 네 주제를 알면서도 감히 덤비는 것이냐?”

“누구보다 잘 아니까 두 번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이안의 반격이 이어졌다.

그는 몸을 빠르게 숙이고 황제의 검을 피하며 동시에 진격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황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황제가 다시 몸을 일으킨 찰나에 다리를 뻗어 그의 복부를 걷어찬 것이었다.

황제는 그의 일격에도 넘어지지 않고 버텨 섰다.

“나여서 네 불같은 성격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네가 날 죽이면 넌 평생토록 아무런 해독제 없이 저주에 고통받으며 살아갈 텐데?”

“피의 맹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사서를 참 자세히 읽기도 했군.”

“그것이 아버지가 남기신 마지막 흔적이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낮게 말을 뱉으며 이안이 다시 한번 아픈 어깨에 힘을 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황제는 생각처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마법을 쓰지 않는구나.”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황제가 삐딱하게 말했다.

이안은 텐젤에 얼마 없는 마탑의 마법사였다.

그런데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황제를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검으로 그를 상대하는 것이 이상했다.

“이제야 눈치채셨습니까?”

상처로 인한 고통으로 이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마력은 최후의 수단이거든요.”

“최후의 수단이라? 그 말대로라면 난 어떻게 되든 죽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군.”

“안심하십시오. 제가 이겼을 때 얘기니까요. 제가 진다면 깔끔히 패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호오?”

이안이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검을 든 자세에서 그의 비장한 결심이 엿보였다.

“이 검으로 폐하의 심장을 꿰뚫어 드리겠습니다.”

“애송이가!”

이안의 도발에 걸려든 황제는 재차 검을 들어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한 채 덤벼들었다.

- 챙챙챙.

세 번의 쇳소리가 울렸다.

이안은 계속해서 검의 방향을 바꾸어 황제를 공격했다. 황제는 아까 자신이 찌른 이안의 오른쪽 어깨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이안이 걸음을 한 발자국 뒤로 하자 그의 상처 입은 어깨가 드러났다. 그때만을 기다렸던 황제가 진전했다.

어릴 때부터 이안을 보아온 황제는 여전히 그가 제 손바닥 안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이따금 눈앞의 목표를 위해 무모하게 뛰어들 때가 있었다. 눈앞의 것에 집중한 나머지 빈틈이 생기는 것이다.

황제는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잘 가거라, 이안!”

황제의 검이 단숨에 빠른 속도로 차가운 공기를 뚫고 이안의 어깨를 조준하며 돌진했다.

“악!”

이내 고통 어린 비명이 동시에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 ⚜ ⚜

미세리타가 가볍게 직선으로 다가오는 주먹을 피하고는 다시 일레네가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곧바로 일레네는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고 그의 주변에는 동그란 결계가 감쌌다.

“좋은 말 할 때, 놓아라,”

일레네가 얼굴을 왈칵 구기며 미세리타를 노려보았다.

일레네가 먼저 기습적으로 달려들었음에도 그녀에게 단번에 당해버린 것이었다.

“감히 황제의 보좌관을 이리 대하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시끄러워.”

일레네의 외침에 미세리타는 새끼손가락을 귀에 가져다 후비는 시늉을 했다.

“뭐…?”

일레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런 그의 심경의 변화를 지켜보는 미세리타는 마냥 즐겁기만 할 뿐이었다.

“애초에 이 반역에 동참한 것 자체가 살아남지 못 할 짓인데. 죽기 살기로 덤벼야지.”

“그럼 들어나 보자고. 도대체 왜 황제의 개가 배신을 했는지.”

“뭐라?”

단번에 굴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일레네는 욕설을 내뱉을 뿐 그 이상의 반항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마냥 속이 편하지 않다는 것 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개?”

마탑의 일원이었던 그녀는 이안의 험담에 얼굴을 구겼다.

이안의 험담에 분노한 그녀는 주변의 공기를 그녀는 가차없이 마력을 이용해 압축시켰다.

“컥-”

공기가 흐르지 않자 숨이 막힌 일레네가 제 목을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거칠게 헐떡였다.

“감히 이안 님을 개라고 불러?”

한치도 흔들림 없는 폭풍전야의 바다 물결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미세리타가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한 번만 더 개라고 칭했다간 보좌관님을 진짜 개로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 점 유의하시죠?”

이후 공기를 압축시켰던 마법을 해제시킨 미세리타가 집무실 문에 몸을 기대 공기를 격하게 들이마시는 일레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궁금하다고 그랬죠? 저하께서 왜 반역을 결심하셨는지.”

“그, 그래. 콜록콜록.”

일레네는 간신히 숨을 걷잡으며 답했다.

“그분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으시거든. 게다가 이 황제 폐하의 강압적인 정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개, 개인적인 원한?”

“그것까지 내가 알려주어야 하나. 나중에 알아보시던가.”

“나중에? 나를 죽일 것이 아닌가!”

천연덕스러운 미세리타의 태도에 화가 오른 일레네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죽여? 내가? 누구를? 당신을?”

하지만 미세리타는 커다란 푸른 눈을 과장되게 크게 뜨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황실 안의 살인은 저하만의 권한이시고요. 게다가 이번 작전에도 살인이 허용된 건 딱 한 사람뿐인데.”

“그게 누구… 설마.”

“명색이 황제의 보좌관이라고 멍청하진 않은 것 같네요. 주군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함께 기다려 봅시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몸을 문에 기대려던 찰나였다.

“악!!!”

커다란 소리가 동시에 울렸고 미세리타와 일레네는 직감적으로 싸움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문 열어!”

“열라니? 나한테 명령하지 말죠? 나한테 명령하실 수 있는 건 오직 저하뿐이야.”

“빨리 열지 못해!”

그녀를 재촉하지만 실은 일레네는 누가 이겼는지 확인하기가 못내 겁났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주군이라 믿고 따랐던 사람이 설마 시체로 자신 앞에 나타날까. 마음은 쉽사리 그의 고민에 답하지 못했다.

황제가 황제로서 공평하지 못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일레네에게는 단 하나뿐인 주군이었다.

그를 믿어야 하는데.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은 이렇게 붙잡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보좌관 님.”

그때 미세리타가 일레네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집무실 손잡이에 문을 가져다 대며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일레네가 고개를 들었다.

“?”

그녀의 부름에 복잡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일레네가 고개를 올렸다.

“각자 자신의 주군을 믿읍시다.”

“뭐?”

“명색이 보좌관이시면서 결과를 보기도 전에 세상을 다 잃으신 표정이네.”

미세리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일레네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당신과 나의 차이는 그것으로 어긋나죠.”

그녀가 손에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주군이신 저하께서 어떤 싸움에서라도 지신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분은 항상 그런 믿음을 주시는, 뭐 본인께선 부정하시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눈에는 태양 같으신 굳건한 분이시니까.”

“….”

“그래서 난 이번에도 결코 믿어 의심치 않아요.”

천천히 미세리타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잠시 문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봐요, 믿는 자가 승리한다니까. 저하 만세.”

그녀 너머로 피를 흘리며 힘없이 쓰러져 있는 황제 옆으로 굳건히 서 있는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거사를 치른 이안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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