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으헉!”
악몽에서 깬 황제가 신음을 뱉으며 일어났다.
텐젤의 황제, 아담은 이상한 꿈에 빠져들곤 했다.
끝없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자면 은빛 용이 단번에 그의 목을 쥐었다. 용이 단번에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거세게 조르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황제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용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 깨기 전 용은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그에게 물었다.
‘과거를 후회한 적은 있는가.’라고.
한동안 오랫동안 꾸지 않던 꿈이었다. 더는 꾸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폐하!”
밖에 있던 일레네가 갑작스레 집무실 너머로 들린 비명을 듣고서는 서둘러 황제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지금이 몇 시지?”
“새벽입니다. 폐하. 침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밀린 서류들을 확인하는 도중에 잠이 든 듯싶었다.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준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악몽 때문에 더 축 처지는 듯했다.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귀찮았다.
“밖에 병사들은 어딨지?”
문득 문밖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바라보며 황제가 느릿하게 물었다.
“폐하, 조금 전 병사들을 물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만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휴식이 필요하신 듯합니다.”
일레네는 눈썹을 한데 모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제에게 휴식을 권했다.
황제 아담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지만 벌써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최근 연속으로 밤새워 일했으니 일레네가 충분히 걱정할 만했다.
“괜찮대도.”
하지만 황제는 완벽주의자였고 그가 하루 동안 정한 일을 끝내지 못하면 절대로 먼저 들어가 쉬는 법이 없었다.
“차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일레네는 고개를 숙여 그를 향해 짧은 경례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반역으로 황좌에 오른 황제는 다른 이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의 손을 거친 차는 입에 대지 않았다. 반역을 일으킬 때 옆에서 보좌하던 일레네만을 겨우 신용할 뿐이었다.
선반에서 황제가 제일 좋아하는 캐모마일 찻잎들을 모아둔 유리병을 꺼낼 때였다.
“와아아!”
커다란 함성이 우레같이 황궁 한가운데서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병들의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유리병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큰 소리를 내며 쨍그랑 깨졌다.
일레네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이에서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집무실에 있다! 다들 전진하도록! 밤이니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적을 것이다.”
묘하게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흔들림 없이 날카로우면서도 정갈한 어조.
“배신자가!”
일레네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황제의 옆에서 그를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옆에서 보좌하면서 보냈던 세월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황실의 개, 이안 이라는 것을.
“젠장 복도는 또 왜 이렇게 긴 거야?”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지나왔던 복도인데 더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끝까지 달릴 뿐이었다.
이안이 기사들을 이끌고 집무실까지 들이닥치는 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지금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황제를 피신시키는 것뿐이었다.
“잠시만, 거기.”
드디어 복도 끝의 집무실이 보였다. 일레네가 안심의 숨을 내뱉으려 할 찰나 문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
걸음을 멈춘 일레네는 침을 삼키며 제발 그가 황궁의 정찰병 중 한 명이길 간절히 빌었다. 그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인물을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어느 소속인가.”
일레네가 외쳤다.
“글쎄…. 하지만 확실한 건 있지.”
“무슨 소리냐.”
“나는 절대 당신을 이 문 너머로 보낼 수 없어. 왜? 나는 황궁 소속 마법사이지만 결국 마탑에 충성하니까.”
“!”
그제야 일레네는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이안이 집무실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애초에 전제가 틀렸다.
이안은 황제가 임명한 마탑의 마탑주였다. 텐젤 제국에서 몇 없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조금 전의 고함은 순전히 자신을 낚아내기 위한 고함일 뿐이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일레네가 대충 짐작 간다는 듯이 내뱉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 서늘한 달빛과 어울리는 차가운 푸른 눈.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직면하고서야 깨달았다.
“마탑의 추적 마법사 미세리타군.”
“정답!”
마탑의 마법사인 미세리타가 손뼉을 맞부딪히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날렸다.
“자네가 여기 와있다는 것은 배신자가 이미 집무실에 있다는 이야기군.”
“배신자?”
“감히 거두어준 은혜도 모르고 저기 검을 겨누고 있는 자를 배신자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겠나.”
“그럼 나도 내 주군을 감히 욕보인 것에 대해 한마디 하지.”
일레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나라의 황제는 기만자다.”
“감히!”
미세리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레네의 주먹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 ⚜ ⚜
- 쾅.
집무실 안으로부터 낮은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이안.”
황제는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깜짝 놀라 눈꺼풀을 화들짝 크게 떴다.
순간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이안의 모습이 꿈에서 보았던 은빛 용과 겹쳐 보였다.
어둠 속에서 이안은 집무실 정중앙에 놓여 있는 낮은 탁자 옆에 서 있었다.
“네가 이 밤에 갑자기 이렇게… 무슨 무례한!”
“무례라…. 그렇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이안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 숙이는 것으로 사과를 했다.
“하?”
황제는 이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연거푸 내뱉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명하신 대로 프로디터들을 황궁으로 안내했죠.”
“안내라고?”
그의 문장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점을 찾아낸 황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네, 맞습니다. 안내요.”
“수장은?”
“어째서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정말 모르는 거라면….”
이안은 흔쾌히 어깨를 으쓱이며 서 있던 탁자에서 내려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너 이게 무슨!”
“제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폐하를 찾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경어를 붙였으나 그의 눈은 분노와 광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야말로 나한테 감히 칼을 겨누는 것이냐! 은혜도, 고마움도 모르는 것!”
황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점점 그는 목소리를 키우며 권위와 어울리지 않게 망가진 모습으로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이안은 침착했다. 그는 표정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은혜와 고마움이라….”
이안은 검은 천천히 들어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붉은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 뇌까렸다.
은혜와 고마움, 어떻게 황제의 입 밖에서 그런 단어가 그리 쉽게도 나올 수 있는지.
분노의 파도가 그의 한 단어로 인해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폐하의 입에서 어찌 그 단어들이 그리도 쉽게 나올 수 있습니까.”
차오르는 분노는 눈물로 뒤바뀌어 이안의 눈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뭐?”
“제 아버지를 제 손에 죽게 만들고 황가라는 이유로 제 가문의 사람들을 하나하나씩 죽여 없애셨죠. 그래 놓고서 양아버지인 척까지…. 하….”
“…너.”
“어떻게 알았냐 묻고 싶습니까? 제 기억은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저주로 정신을 잃었을 때 저를 시켜 사람들을 죽이게 만드셨던 것까지 전부 기억났습니다.”
“!”
말을 하면 할수록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멈추고 싶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은 더 뜨겁게 흘러내리며 깊숙이 억눌러왔던 슬픔까지 쏟아냈다.
“나는….”
“부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럴수록 제가 폐하를 용서해야 할 마음이 더욱 사라지니까요.”
이안의 말에 말문이 막힌 황제는 항상 우위에 있는 듯한 웃음을 지웠다. 그러자 늙고 연약한 노인의 모습을 한 황제가 있었다.
“제 검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것만이 폐하께서 저와 제 가문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니 말입니다.”
“….”
그들 사이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문득 황제가 당황한 표정을 지우며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웃는 겁니까?”
“너희 가문 사람들은 어찌 그리 매번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지. 나는 항상 궁금했지.”
황제가 느긋하게 주름 잡힌 눈매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체스펠과 이안, 그리고 내 아버지 곁에서 체스펠이 선선대 데벤시아 공작의 목숨을 뺏는 것까지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지.”
“….”
“어린 마음에 처음엔 잔인한 방식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전혀 아니었어. 후대에게 저주의 힘을 계승하는 동시에 피로 이어진 관계를 그리 끊는 것이 기억에 남았거든.”
“…감히.”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 아직 짐의 말이 안 끝나지 않았네.”
이안이 아래턱에 힘을 주어 황제를 불렀지만 황제의 여전히 위엄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끝까지 듣고 죽여도 상관없잖아? 밤은 아직 기니 그 정도 시간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기다릴 시간 같은 건 없다.”
“아이쿠, 말이 짧아졌군, 그래? 그러는 편이 더 재밌으니 계속 개처럼 짖어봐라. 내 손에 목줄이 더 이상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군.”
황제의 말에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이안은 검을 치켜들었지만 황제가 한 수 더 빨랐다.
황제의 집무실 책상 밑에는 직접 제작한 은색 검이 뾰족한 날이 갈아진 채로 자리하고 있었다.
“윽-”
한때 검사였던 황제는 단숨에 이안의 어깨를 찔러 넣었다.
이안이 신음을 흘렸다. 황제가 도로 검을 빼낸 자리에서 흐르는 피가 흘렀다. 상처를 쥐어 잡으며 그는 몸을 휘청였다.
“미친개라 불리던 공작이여.”
그제야 황제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어디 계속 짖어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