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17)

87화

네르아에게 하르힌은 다정한 동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안 옆에서 오랜 시간을 동료로 함께 했지만 깊은 이야기는 나누어 본 적 없었다.

네르아는 쉽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속내를 감추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안에게도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았다.

“하르힌?”

네르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최대한 하르힌에게 상냥하게 대하려 했다.

함께 일을 할 때도 하르힌은 묵묵히 네르아의 몫까지 해왔으며 그녀를 믿고 그녀가 하는 일에 말을 얹지 않았다. 네르아에게 하르힌은 소년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순진하고 선량한 남자였다.

“네르아 넌 너를 믿었어.”

하지만 지금 네르아의 눈앞에 있는 하르힌은 다른 사람과 같았다.

하르힌이 슬픈 눈으로 네르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아래로 그늘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하르힌, 지금 날 여기에 가둔 거야?”

“그래.”

“어째서 날 여기 가두는 거지? 당장 풀어줘. 장난칠 시간 따위 없다고!”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네르아는 천천히 뒷걸음쳤지만 문은 이미 잠긴 뒤였다.

“장난? 너야말로 장난치지 말고 회피하지도 말고 똑바로 말해.”

하르힌은 네르아를 다그치는 어조로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기 시작했다.

“하르힌…?”

“너도, 저하도. 그동안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참으라고 해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하르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내 그는 분을 못 이기고 입술을 피 날 정도로 잘근 짓씹었다.

“넌 날 그저 이용했을 뿐이지, 네르아.”

“하르힌!”

네르아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를 불렀지만 하르힌의 입술은 이미 피로 인해 상처가 난 후였다.

“아무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겨우 이 사달이 나고 나는 모든 걸 들을 수 있었지.”

“…그건.”

“예전부터 넌 그랬었어.”

네르아가 미처 끝까지 답하기도 전에 하르힌이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앗아갔다.

“날 동료가 아닌 그저 이용하기 좋은 도구처럼 사용해왔지.”

“하르힌.”

“내 이름 부르지 마. 너는 단숨에 내 신뢰를 짓밟았어. 괜히 자극하지 말란 말이야.”

그녀를 볼 때마다 친근하게 웃음 짓던 하르힌은 더는 없었다.

신뢰로 반짝이던 금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 네르아.”

“뭘… 말해?”

네르아가 되레 당황해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로 그의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리제아나 님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너 알고 있었어?”

리제아나를 항상 손님이라 불러왔던 하르힌이었다. 그래서 네르아는 리제아나가 아비드 제국의 황비라는 사실을 그가 모르는 줄만 알았다.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아비드 제국의 황비님이시지. 저하께서 그 이름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 해서 그동안 손님으로만 칭해 불렀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잠, 잠시만. 너는 저하를 방해하는 인물이 사라졌는데 전혀 기뻐하지 않는 거야?”

“방해하는 인물? 설마 리제아나 님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 여자가 이안 님을 위험하게 할 거야! 어떻게 아비드 제국의 황비 신분으로 이안 님께 접근할 생각을 했겠어?! 난 오직 이안 님을 위해서 그랬을 뿐이야.”

네르아는 주먹을 꽉 쥐며 하르힌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주길 바랐다. 그게 유일하게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네 그릇은 거기까지구나.”

하르힌이 침묵을 깨고 짓씹듯이 한 마디 내뱉었다.

“뭐?”

전혀 예상에 없던 대답에 이번에는 네르아의 인상이 종잇장처럼 분노로 일그러졌다.

“리제아나 님은 저하 곁에 계실 자격이 충분하신 분이야.”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여자의 신분이 밝혀진다면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무엇보다 그 여자 때문에 이안 님이 이상해졌다고!”

“이상?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전처럼 네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 저하는 리제아나 님을 곁에 두시면서 더 성장하셨다.”

하르힌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네르아에게로 다가갔다.

“발작…. 솔직히 말하자 우리. 너도 저하께서 겪고 계신 발작이 저주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나는 몰랐-”

“네 방을 뒤졌어. 그리고 황제 폐하와 나누었던 밀서들도 다 발견했지. 그건 저하께 이야기할 마음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저하가 널 경멸하실 이유는 네가 리제아나 님께 한 짓으로 충분하니까.”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조곤조곤 하르힌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

“그때… 저하께서 널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대로 죽게 놔두는 건데. 너같이 은혜도 모르는 것을.”

“닥쳐!”

결국, 참지 못한 네르아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마력이 없었다. 하르힌은 가볍게 그녀를 부엌으로 던졌다.

나무 식탁에 등이 부딪힌 네르아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붙잡았다. 어느 순간 다가온 하르힌은 그녀의 앞에 무엇인가를 던졌다.

‘저주 치료제 제조법 - 1급 기밀.'

희미해지는 시야로 겨우 종이 위에 적힌 것을 알아본 네르아의 눈이 커졌다.

“이걸 어떻게…! 너! 하르힌!”

“이것을 이안 님께 그대로 보여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걸 이안 님께 가져가게 하지 말아줘. 도대체 리제아나 님을 어디에 두었어?”

“하, 말하지 않을 거야. 절대. 그 여자 때문에 내 모든 것이 엇나가버렸으니까!”

“후…”

이내 하르힌은 더는 진행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관두기로 마음먹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날… 죽일 거야?”

네르아가 묻자 하르힌이 싸늘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답했다.

“솔직히 그러고 싶지만, 그건 저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하르힌은 손을 들어 네르아의 목덜미를 가볍게 쳐 기절시켰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왔던 무엇인가가 산산조각이 났다.

네르아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하르힌은 결국 체념했다.

다 끊어버리자고.

⚜ ⚜ ⚜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났다. 드디어 오늘 밤, 모든 것을 끝낼 차례였다.

이안은 미카일에게 건네 받은 갑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는 거울 안의 자신을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속에선 불이 나는데 거울 속의 그는 차가운 얼음장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리제아나의 곰 인형과 목걸이에 걸어두었던 추적 마법이 읽히지 않았다.

그날, 시장에서 곰 인형을 딴 후 이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추적 마법을 걸어두었었다.

마법 덕분에 그녀가 텐젤 제국 안에 있는 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제국 밖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다려야 하는 수밖에 없나….”

추적 마법에는 한계가 있어 결국 그의 또 다른 마탑 동료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도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리제아나뿐이었다.

“저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방 너머로 미카일의 비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가.”

이안은 거울 너머로 비친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드디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날이 돌아왔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황실은 오래전부터 데벤시아 가문을 손 위에 올려두고 마음대로 주물러 왔다. 이제는 그 탐욕을 끊어야 할 때였다.

그의 손이 자신의 목으로 향했다.

거친 붕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안에 감추어 두었던 태양의 문양이 강하게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는 감추어 둘 필요는 없겠지.”

이안은 마력을 손끝에 집중시켜 단숨에 붕대를 풀어냈다.

허전한 목에 닿는 찬바람이 익숙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기사들이 갑옷을 차려입고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이안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황제의 폭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내버려 둔 채 전쟁을 벌이거나 가혹할 만큼의 세금을 걷어가곤 했다. 황제의 폭정에 가족을 잃은 이들 또한 그들 중 있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더더욱 자격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해서 모두가 이안의 뜻에 찬성했다. 그들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길 누구보다 바랐다.

이안은 아무것도 없었던 그들에게 데벤시아 가문 기사단이라는 손색없는 명칭을 달아주었고 꼬박꼬박 생활을 지원해주며 부족함 없이 살아가게 해주었다.

“나의 뜻에 따라주어서 고맙다. 이 나라는 황제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황실의 잘못을 바로 잡고 미래로 나가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이안은 어둠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말에 동의할 거라 확신했다.

분위기에 휩쓸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일까. 이안은 그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마법으로 그의 손에 빛이 나오게 한 것이었다.

기사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랐다. 미카일은 당황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능력을 지금까지 숨겨왔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 더는 감추지 않을 것이다. 이 힘으로 너희들이 나에게 주었던 신뢰만큼 똑같이 되돌려주겠다.”

텐젤에서 마법은 생소하기 때문에 몇몇 기사들이 도망칠 거라 예상했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아까와 똑같이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경건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시간이다.”

하늘에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둥근 달을 응시하며 이안이 메고 있던 가죽 검집에서 검을 꺼내 하늘을 향해 높게 쳐들었다.

“Move(이동)”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진이 커다랗게 그들 발아래로 그려졌다. 마법진에서 서서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가자!”

그리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황제와 과거로부터 얽히고설켜 왔던 지긋지긋한 관계를 모두 정산할 시간이었다. 이안은 사냥개로서 단 한 번도 먹잇감을 놓친 적이 없었다.

다음 먹잇감은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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