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17)

86화

“리제아나, 눈 좀 떠봐 응?”

마주 잡은 그녀의 손이 냉기가 서린 듯 시렸다.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가엾은 사람이, 홀로 그리 죽지 않으려고 버텼다니.

라이핀은 지금 당장이라도 제국을 뒤엎어서라도 델리사를 제 앞에 데려와 무릎 꿇게 만들고 싶은 강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리제아나.”

“….”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미약한 숨소리만 고요하게 이어질 뿐이었다. 그녀의 눈 밑 그늘이 더 진해진 모습에 라이핀은 가슴도 연달아 미어지도록 아파 왔다.

그녀와 언제부터 틀어졌던 것일까.

라이핀도 분명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보드라운 검은 머리카락과 빛나는 자수정을 빼다 박은 듯한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

이 여리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제 손안에 넣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찼다.

“리제아나, 제발 눈을 좀 떠봐….”

황태자로서 처음 나선 무도회에서 그녀를 필로렌치아 가문의 공녀라 소개받았을 때 어땠던가.

수줍게 얼굴을 물들이던 리제아나에게 첫눈에 반했던 라이핀이었다.

음악에 맞추어, 그의 손을 맞잡고 우아하게 춤추던 그녀의 모습 역시 아직까지 기억 한쪽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라이핀은 황제의 허락 없이 리제아나를 황태자비로 맞이할 수 없었다.

황태자비는 라이핀의 아내로서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에 라이핀의 눈에 비추어졌던 리제아나는 연약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귀족가 레이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강한 열망에 이끌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리제아나와의 국혼을 허락해 달라 직접 찾아갔던 때였다.

아마도 그날 밤이었을 것이다. 과욕에 휩쓸려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가.

“폐하는 지금 공작 저하와 이야기 중이십니다.”

선대 황제의 보좌관이 당시 황태자였던 라이핀을 막아섰지만 어린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비켜라.”

“전하.”

“비키래도. 어차피 필로렌치아 공작일 테지. 그 가문에 대해서 나는 폐하께 전해야 할 말이 있다.”

“하지만-”

“정녕 죽고 싶은 것인가. 감히 나를 막아서? 폐하께서 나의 알현을 거절하신 것이 확실한가?”

늦은 밤이었다. 황실의 일원이 아닌 이상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시간이었으며 황제는 황태자인 그에게 여러 특권을 주었다. 황제와의 제약 없는 알현 또한 그중 하나였다.

라이핀이 그 점을 파고들자 보좌관은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길을 비켜섰다.

필로렌치아 공작도 함께 있겠다,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는 것을 직감한 라이핀은 손을 문 위로 가져갔다.

“좋은 생각이야, 공작.”

“좋아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두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군.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 쉬워지겠지.’

라이핀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문을 열려던 찰나 그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손을 멈추어 세웠다.

“이 광각초 초안을 황실에게 바치다니.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지, 공작? 공작의 딸을 국혼이라도 시키기 위해서인가?”

광각초? 라이핀은 처음 듣는 단어를 곱씹으며 문 너머의 대화에 집중했다. 공작이 말하는 ‘딸’은 리제아나일 테니 침을 삼킨 그는 결국 조금 더 들어보기로 다짐했다.

“간단합니다. 그저 조그마한 지원을 지속해주시면 됩니다.”

“지원이라…. 푸하하하,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좋아. 대신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것으로 약속하지.”

“그렇다면 국혼 또한….”

“흐음. 글쎄…. 황태자비라….”

알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라이핀은 미간을 구기며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걸세.”

아비드의 황제는 갑작스레 호탕스럽게 웃던 웃음을 멈추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무겁게 휘어잡았다.

“만일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모습이나 황실에 누가 될 만한 언행이 보인다면 국혼은 생각도 해보지 않을걸세.”

“그럴 일, 절대로 없을 겁니다. 엄격히 교육을 잘 받아온 아이니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 말에 결국 라이핀은 문에 닿았던 손을 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

“…내가 왔다는 말을 꺼내지 말게. 갑작스럽게 할 일이 생겨서 잠시 돌아가는 것이니 폐하께는 내가 나중에 찾아가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고 라이핀은 그 길로 곧바로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황제와 공작 사이의 계약, 광각초는 또 무엇인가. 조금 전 대화를 떠올린 라이핀은 입가를 매만졌다. 그녀가 제대로 황실에 종신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곧바로 두 사람의 관계는 깨질 것이다. 여러 가능성이 머릿속을 채우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라이핀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 나름대로 리제아나를 지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라이핀은 자신을 숨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결국 후즈센 대공가의 영식, 킨 후즈센과 리제아나의 결혼을 진행하려 할 때, 라이핀은 그제야 그가 나설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극적인 상황에 나타나 리제아나에게 청혼했다. 리제아나가 그에게 빠지게 만들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이 머리핀, 시장에 나갔다 네가 생각나서 사 와보았어 리제아나.”

“날씨도 좋은데 뱃놀이라도 나가지 않을래?”

“리제아나 같이 티타임이라도 가질까?”

“이 무도회에서 가장 당신 아름다워. 누구를 견주어도 장담하건대 리제아나, 그대의 빛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진심이 담겨 있든 담겨 있지 않든 그의 사탕발림은 늘어만 갔다.

리제아나가 그를 위해서, 황실을 위해서 헌신하게 했고 필로렌치아 공작이 부러 광각초라는 소재를 자신에게 소개하게 만들어 그의 세력을 더 단단히 키워나갔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맡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던 모양이었다.

리제아나가 사라지고 무엇인가가 뒤틀렸다. 그동안의 일상이 모래성인 양 밀려오는 잔물결에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리제아나를 해친 이가 델리사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그의 아름다운 모래성은 분노로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잘못했다.”

라이핀이 리제아나의 손을 마주 잡고 그녀의 손을 제 이마에 대며 속삭였다.

“이제 다시는 놓지 않겠다. 함부로 뺏기지도 않을 거다. 우리, 이렇게 새로 시작하는 거야.”

그녀를 찾으면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으니 복잡했던 생각이 한결 잠잠해졌다.

“처음부터 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리제아나, 내가 감히 너에 대한 감정을 잊었구나.”

그는 은은하게 웃었다.

이제야 리제아나가 제 손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폐하! 델리사 영애를 찾았습니다!”

그때 일라이자가 헐떡이며 달려와 큰 소리로 델리사의 소식을 전해왔다.

“찾았다고?”

라이핀은 일라이자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다 리제아나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부정할 테지.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와. 필로렌치아 가문에게도 소식을 넣게. 모든 것을 뒤집을 시간이다.”

⚜ ⚜ ⚜

상황이 역전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네르아는 샐리로부터 크로덴느 백작가의 문장을 넘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장에 다시 내려왔다. 네르아는 여러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는 현장을 발견했다.

네르아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순간 걸음은 마법에 걸린 듯 정지되었다.

“델리사라는 여자 알아?”

“누군데 그래?”

“글쎄, 소문으로는 폐하의 정부라던데. 알고 보니 리제아나 황비 마마께서 납치되셨다며. 오늘 겨우 돌아오셨는데 범인이 그 여자래!”

“뭐어? 그래서 아까 병사를 만났구나!”

“그런 셈이지. 그런데 황비 전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왜 황실에서 공표하지 않았을까.”

먼저 말을 꺼낸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제 빨간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사실 황실도 그냥 사라졌으면 했는데 다시 나타나신 거 아니야? 푸하하.”

“어이구 말조심하세! 나도 소문으로 들었는데 폐하께서 황비 전하에 대한 사랑이 전보다 남달라 보였다네.”

네르아는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쓰고 있던 자두색 로브를 더 깊게 뒤집어쓰며 샐리에게 먼저 저택으로 가라고 했던 자신의 선견지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리제아나를 찾았다고?! 대체 어떻게 들킨 거지?!’

그녀는 사무치는 불안감에 막 구매했던 약초 가방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가방 안에 들어있던 백작가 문양을 기억해내고는 걸음을 돌려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일이 틀어진다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텐젤의 마탑으로 돌아가 자신의 모든 마법약 재료를 가지고 사라져야 한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오랜 시간 동안 숨어있다 다른 나라로 사라지면 그걸로 그녀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질 터였다.

마력을 다시 돌려받든, 돌려받지 못하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가진 약초 지식이 있으니 살길은 어떻게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더.”

네르아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방 안에서 크로덴느 가문의 문양을 꺼내 길바닥에 버려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이야.’

델리사가 잡혀 자칫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입을 연다면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든 이 텐젤의 땅에서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익숙한 길을 통해 마탑으로 넘어간 네르아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동안 이안 님은 마탑에 없다고 했으니.’

위험한 일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하르힌과 이안, 두 사람이 마탑을 비웠으니 그들에게 분명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빠르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올 거라 생각했어.”

그때, 문을 열고 들어간 네르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르아는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도망갈 겨를조차 주지 않을 셈인지 목소리의 주인은 마법을 사용해 문을 잠갔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본 네르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상대를 확인하고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게 무슨 일일까, 하르힌?”

네르아가 느릿하게 물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하르힌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네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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