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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85/117)

85화

“하나, 둘!”

“하나, 둘!”

매서운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데벤시아 공작가의 영지에 커다란 기합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기사들은 이미 예전부터 고된 훈련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몸에 얇은 민소매 옷 한 장 걸친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데벤시아 공작답게 단상 앞에 서서 그들의 훈련을 진행했다. 기사들은 입으로 소리를 내며 기합을 따라 했다.

“너희들은 아주 잘하고 있다!”

이안은 언제나 기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들을 했다.

그는 한 번의 실수를 수용할 줄 아나 반복된 실수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데벤시아 기사단 일원들이었기에 더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다.

그래서 데벤시아 공작가의 기사단들은 모두 실력이 훌륭했다.

“앞으로 일주일이다!”

이안이 세차게 부는 바람 사이로 또렷하게 소리를 지르며 외쳤다.

“앞으로 일주일! 너희들이 나를 믿고 따르는 만큼, 나도 너희들을 믿는다! 그러니 약속하마! 너희들의 결정이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

이어 기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우레와 같이 들려왔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뿐이었다. 역사를 뒤엎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안은 잠시 휴식을 외친 후 미카일이 건넨 물을 들이마시며 드디어 새벽부터 움직이던 몸을 의자에 붙였다.

몸은 피곤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믿고 따라와 준 사람들인 만큼, 이안도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반역은 기필코 성공해야 했다.

프로디터들은 일주일 후 새벽, 그들의 본거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날 그곳에서 이안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간이동 마법을 펼칠 예정이었다.

그들이 이안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반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저하.”

미카일이 이안에게 다가와 그를 불렀다.

“뭐지?”

“계속 궁금했던 건데… 하르힌 녀석은 같이 참여하지 않는 겁니까? 항상 저하의 옆을 지키던 놈이 아닙니까?”

조심스레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안의 심기를 살핀 미카일이 재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르힌….”

이안이 하르힌의 이름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내며 조금 흐렸다.

“왜…. 그러시는지?”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며 미카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불길한 기운이 그들을 감쌌기 때문이리라.

이안은 앞으로의 거사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리제아나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리제아나…. 하르힌은 리제아나를 찾았을까….’

이안의 명령을 받은 하르힌은 곧바로 마탑으로 돌아갔다. 그는 리제아나가 마탑에 있는지 혹은 없는지 살펴본 후 편지를 전달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벌써 그날로부터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애써 불안을 잊어버리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으로 자신의 몸을 혹사했다.

“미카일.”

앞으로 남은 날 동안 모두 전력을 쏟아부어 훈련을 진행해야 했던 터라, 이안은 그들을 버리고 마탑으로 갈 수도 없었다.

“네, 저하.”

미카일이 이안의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르힌은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서 현재 없다. 그러니 너도 어서 가서 쉬도록 해.”

“…예!”

이안이 번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미카일은 괜히 그의 신경을 돋우기 전에 먼저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리제아나….”

이안은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감에 초조하게 턱을 매만졌다.

“…아니다. 정신 차리자, 위버와 미세리타에게도 편지를 보내놓았으니 어떻게든 될 터다.”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간신히 차린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다시 기사들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저하!”

데벤시아 영지 북부 저택의 시녀장 비올레시아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찾아왔다.

그녀도 미카일과 함께 한때 기사단으로 뛰었던 여기사였지만 전장에서 한쪽 눈에 상처를 입어 시녀로 이안을 보필하고 있었다.

“비올레시아?”

이안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비올레시아를 보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한때 기사였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이안이 얼굴을 찡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도달한 비올레시아가 손에 있던 것을 내밀었다.

이안은 단숨에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방금 온 건가?”

“네. 서신이 오면 바로 저하께 드리라 하여 저하께 바로 가지고 왔습니다.”

“고맙군. 비올레시아.”

발신인 항목에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었지만 단숨에 하르힌이 보낸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이안이 조급하게 봉투를 뜯었다.

안에 들어 있는 서신을 꺼내 빠른 속도로 펼쳐본 이안은 그만 편지를 태워버릴 뻔했다.

편지에는 단 한 문장 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탑 그리고 텐젤 시장 구석구석을 훑어보아도… 그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힘껏 편지를 구긴 이안은 비올레시아에게 이만 가보아도 좋다며 손짓한 후 심호흡을 했다.

분명 네르아가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다.

네르아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눈치 빠른 그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네르아는 치밀한 기회주의자였다.

“그게 나에게 독으로 작용할 줄이야.”

이안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안은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제는 하르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리제아나도 그가 치르려는 거사가 그녀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었다.

“저하?”

어느새 휴식 시간이 끝나 있었다. 문득 미카일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보니 기사들이 아까와 같은 대열로 꼿꼿이 허리를 펴고서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잠시 멈칫하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안은 책임져야 할 일들이, 풀어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는 무엇 하나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 ⚜ ⚜

일라이자는 사이사 백작과의 알현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라이핀의 침실로 다시 돌아가 문을 두드렸다.

“폐하?”

하지만 방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두드리자 다급한 라이핀의 목소리가 침실 밖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당장 일라이자를 불러라!”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눈치챈 일라이자는 병사들을 물린 후 답했다.

“폐하, 찾으신 일라이자 여기 있습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당장 들어와라!”

라이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일라이자는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내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린 채 굳었다.

“폐…하…?”

그의 주군은 낯익은 얼굴의 여자를 끌어 안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이분은…. 설마…!”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녀가 위험하다!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도록 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황제의 품에 있었다.

검정 머리칼에 흰 피부, 분명 그녀가 틀림없었다.

“일라이자!”

라이핀의 일침으로 일라이자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황궁의 의원 닥토르를 호출했다.

“어떤가?”

닥토르와 함께 다시 라이핀의 침실을 방문한 일라이자는 여전히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침착하게 닥토르의 진찰을 기다렸다.

리제아나는 침대 위에서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물수건이 그녀의 이마 위에 올려져 있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 만큼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일단 몸을 따뜻하게 해주시고 충격받을 요인들은 최대한 물려주세요. 정확히 언제 깨어나실지는 경과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닥토르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를 좁히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하…. 알겠다. 나가보도록.”

라이핀 역시 그의 소견이 이어질수록 점점 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닥토르가 나간 후 때를 보던 일라이자가 넌지시 라이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비 전하를 도대체 어디서 모셔온 것입니까?”

“오두막. 한때 델리사와 만남을 가졌던 오두막에서 발견했다.”

두 사람만이 아는 오두막에서 발견이 되었다면…. 그의 대답에 일라이자는 더 말을 떼지 못하고 굳었다.

아침에 보았던 모습과 달리 라이핀은 황제답지 않게 초췌해 보였다.

그의 푸른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자신감에 차 있었던 갈색빛 눈은 충격에 멍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황비 전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일라이자는 라이핀의 말속에서 범인을 찾아낸 듯 고개를 다시 쳐들었다.

“설마.”

“일라이자.”

일라이자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라이핀이 엄숙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폐하.”

공기에 떠다니는 중압감은 일라이자를 소름 돋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는 재빠르게 자세를 다잡았다.

“지금 당장 델리사 크로덴느를 잡아 와라.”

라이핀이 이를 갈며 짓씹듯 말했다. 일라이자는 그의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델리사의 이름을 낮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로 이 사안이 쉬이 넘어가지 않으리란 것을 눈치챈 일라이자는 숨을 죽였다.

“지금, 당장, 크로덴느 백작가를 찾아가든 시장 구석을 찾아가든 샤프롱을 찾아가든 아비드 제국을 뒤져서 그녀를 잡아 와라.”

“네.”

“저항해도 무슨 수를 써서 잡아 와라. 멀쩡하게 잡아 올 필요는 없으니.”

라이핀의 목소리가 그의 침실 안에 음산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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