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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117)

84화

일라이자에게서 편지의 책임을 부여받은 샐리는 편지가 들어있는 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졌다.

델리사는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떠났기에 주인의 행방에 대해 잘 모르는 샐리는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하나.”

그녀는 들고 있던 빨래 바구니부터 뒤뜰에 갖다 놓고 빨랫줄에 빨랫감을 하나하나 널기 시작했다.

얄미울 만큼 추운 바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맡은 일은 마쳐야 했다.

“델리사 아가씨께서 부르십니다.”

그 후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샐리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델리사가 금방 돌아온 것이었다.

크로덴느 백작저의 또 다른 하녀 아리엘이 주방에서 일을 거들고 있던 샐리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샐리는 곧바로 델리사를 찾았다

“아가씨!”

“샐리.”

델리사에게 달려가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샐리는 먼저 예절에 맞게 짧은 인사를 했다.

델리사는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가볍게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이제 편지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려 할 때였다.

“아가씨, 제가 편지를 -”

“부탁할 일이 있어.”

“예?”

그녀는 샐리가 다시 말할 틈도 없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 들어줄 테니 내 부탁 먼저 들어줄래?”

“말씀하세요. 아가씨.”

평소라면 샐리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으며 라이핀으로부터 온 편지라고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델리사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그녀의 눈이 왜인지 섬뜩하게 빛났다.

불안한 듯이 손톱을 물어뜯는 그녀는 그와 상반되게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샐리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결국 그녀는 델리사의 기분을 맞추어주기로 다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와 함께 지냈던 그 여자. 기억하느냐?”

“네, 아가씨.”

델리사가 함께 지냈던 여자라면 아마 ‘네르아’라 불리는 어디선가 나타나 한동안 저택에 머물던 여자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샐리는 네르아의 주황색 머리칼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시장 세 번째 뒷골목에서 다양한 풀을 판매하는 곳에 이 백작가 문양을 건네주거라. 그녀의 인상착의를 기억한다면 그녀 또한 알아볼 수 있겠지.”

시장 세 번째 뒷골목이라면 주로 불량배들이 점령하고 있는 골목길이었다. 여러 암거래가 이루어지는 그곳을 떠올리며 델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곳을 찾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스스로의 위치를 잘 알고 있던 샐리는 이번에도 궁금증을 삼켰다.

“정말 그녀 말대로였잖아. 웃기기도 하지.”

샐리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델리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르아가 했던 말이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한번 결심한 이상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거든요. 전 아직도 기억하는걸요? 처음으로 살의를 가져본 때가.’

리제아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자 도리어 두려운 감정이 사라졌다.

드디어 리제아나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독설들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빼앗긴 그 절망스러운 기분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었다.

‘오두막에서 본 그녀의 초라한 모습은…. 정말이지….’

리제아나가 힘없이 바닥을 기는 모습을 떠올리자 델리사는 희열을 느꼈다.

그녀가 죽어서 그대로 사라진다면 더는 라이핀은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네르아는 먼저 델리사에게 리제아나와 대화할 기회를 양보했다. 네르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새로운 약초 조합을 찾을 거라 했다.

이를 시험하기 위해 리제아나를 희생양으로 쓸 생각이라고도.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이지, 그렇지?”

흥분이 델리사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말에 샐리는 당황해하며 물러설 뿐이었지만 델리사는 기분이 좋았다.

만일 네르아의 새로운 풀을 이용한 새로운 독초를 만들어낸다면 리제아나는 영광스러운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것이다.

설령 독초로 죽이는 데에 실패한다고 해도 홀로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곳에서 죽겠지.

어쨌든 그녀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아가씨가 어딘가 이상해진 것 같은데….’

샐리는 속으로 델리사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귀신같이 샐리에게 다시 눈을 돌린 델리사가 까칠한 어조로 그녀를 다그쳤다.

“뭐하니, 네르아? 어서 떠나지 않고.”

귀족들은 겉보기에 고귀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델리사는 귀족들을 잘 알았다.

크로덴느 백작저 또한 선량한 귀족 가문은 아니었다.

따라사 크로덴느 백작저 문양을 보여준다면 어느 약초든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샐리는 서둘러야만 했다.

“네 가야죠, 아가씨!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델리사의 행동만으로도 이미 샐리의 머릿속은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터였다.

샐리가 심부름을 하러 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득 그녀에게 아리엘이 말을 걸었다.

“심부름 가는 거야?”

“응. 바빠. 나중에 얘기하자.”

“너 심부름 갔다 와서 주방에서 저녁 도와달라고 말컴 주방장님이 부르셨어.”

“주방장님이? 부엌 저녁 담당은 너잖아 아리엘?”

“내 아버지가 다리를 삐셔서 당분간 내가 돌봐야 하거든. 부탁 좀 할게, 샐리. 응?”

“…하 알겠어.”

저녁 준비는 다른 식사 때보다 준비할 게 많아 가장 분주했다.

시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마차를 타고 가면 금방이었지만 그녀는 직접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두 배가 더 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녁 당번이라니.

머리는 더더욱 앞을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버렸고 이내 샐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편지의 존재를 까맣게 잃어버렸다.

“바쁘다, 바빠.”

샐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늦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 할 지경이었다.

⚜ ⚜ ⚜

편지에 적어 넣었던 약속 시간이 지나치게 빠르게 다가왔다.

라이핀은 새벽부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동안 곁에 없으면 죽을 정도로 사랑했던 델리사였거늘.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다짐하니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문득 라이핀의 침실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일라이자? 들어와.”

라이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문밖에 있는 그의 보좌관의 방문을 허락했다.

“폐하? 아니… 폐하,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그는 깨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일라이자는 외출복 차림의 라이핀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알현은 몇 시부터 있지?”

“두 시간 후에 사이사 백작이 뵙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라이핀의 물음에 일라이자는 고개를 숙이며 일정을 말했다.

“그 일정 한 시간 더 미루어 둬.”

“네?”

“혼자 갈 곳이 있다.”

“어디를-”

“개인적인 일이다. 나가보도록.”

단호한 라이핀의 말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일라이자는 묵묵히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가 개인적인 일이라 단언한다면 항상 델리사에 관련된 일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그녀와 놀러 가는 것이라면 일라이자는 직감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말렸을 테지.

하지만 근래 그녀에게서 거리를 두던 그가 아닌가. 머리를 굴리던 일라이자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관계를 정리하실 모양이군.”

일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라이핀이 있을 방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뜻이니 그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라이핀은 평범한 외출복을 입고 나섰다.

푸른 머리칼을 흩뜨리며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오두막으로 황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말을 몰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9시, 드디어 둘의 인연의 실을 끊을 때가 되었다.

“먼저와 있나.”

근처에서 말에서 내린 그는 오두막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델리사?”

오두막의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신 라이핀이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몸이 메말랐으며 입술이 거칠게 터 있었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그녀는 몸뿐만 아니라 얼굴도 상처투성이라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리…리….”

라이핀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갔다.

“리…리제아나…. 정말, 당… 당신이야…?”

라이핀은 혹여 자신이 닿기라도 하면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며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리제아나는 가늘게 숨을 쉬며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가 라이핀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리제아나? 말 좀 해봐라. 나다, 라이핀. 리제아나!”

“….”

리제아나의 앞에 선 라이핀은 무릎을 굽혀 그녀와 자신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드디어 그를 알아본 리제아나가 거칠게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차오르는 눈물을 결국 흘렸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이렇게 납치되어 있었던 거야…?”

라이핀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그대로 놔두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델리사가 리제아나를 증오하던 것을 알면서도 왜 한 번도 그녀를 의심하지 못했나.

‘제국의 황후가 될 사람을 이렇게 만들다니. 어찌 이리도 추악할 수가 있을까.’

마음속에서 거센 분노가 거칠게 일기 시작했다.

“리제아나…. 내 리제아나… 당신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라이핀은 리제아나를 안았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 그녀가 혹여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감히 팔에 힘을 주지 못했다.

“윽-”

리제아나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를 마주하자 괜찮을 줄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덮쳐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리제아나?”

라이핀이 다시 품에서 꺼내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기절해 축 늘어져 있었다.

가늘게 내뱉는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의원…. 의원을!”

라이핀은 재빠르게 칼을 뽑아 리제아나를 묶고 있던 밧줄을 끊어냈다. 마력이 깃든 검은 손쉽게 밧줄을 잘라냈다.

그녀를 안아 들고 라이핀은 오두막을 나섰다. 소중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에 태우고서 그는 말의 허리를 발로 찼다.

빠르게 달리는 말의 고삐를 쥐고 리제아나를 안자 라이핀의 심장은 다시금 빨라졌다.

“리제아나.”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숨을 내쉬는 리제아나를 바라보며 헝클어진 그녀의 검은 머리를 넘겨주었다.

“이제 서로를 잃어버리지 말고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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