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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117)

83화

리제아나는 델리사를 그저 노려보았다.

입이 막혀 있었으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녀는 핏줄이 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두려운 거야?”

델리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하지 못하니 답답하네.”

“…?”

“네가 있으나 없으나 넌 그에게 혼란만 줄뿐이야. 본래부터 그의 옆자린 나의 것이었단다. 그러니 넌 여기서 죽어야 해.”

그녀의 말에 리제아나는 질린 눈을 했다.

그녀의 말은 모순이었다.

애초에 라이핀이 먼저 그녀를 버리지 않았나.

그녀가 없어도 그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야기는 뭘까. 리제아나는 델리사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해 못하는 눈이네.”

리제아나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묶고 있는 줄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줄은 더 단단히 그녀를 옥죄기 시작했다. 결국 밧줄에 쓸려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팔목이 쓰라렸다.

“리제아나, 힘은 그만 쓰도록 해. 그러다가 팔목에 상처만 남을걸?”

“!”

아까와 똑같이 델리사를 노려보며 밧줄을 풀기 위해 뒤로 두 손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것인지 델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썹을 구겼다.

“약간의 마력이 섞인 밧줄이야. 희귀한 물건이지. 힘을 줄수록 더 풀어내기 힘들 거야.”

“!”

“네가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리제아나.”

“….”

“그러니까 조용히 얌전히 있어.”

“읍읍!”

“정말- 네르아가 풀지 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나. 얘기가 안 되니 답답하잖아?”

델리사는 결국 결정을 내렸는지 한숨을 쉬며 살짝 리제아나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내렸다.

“하아.”

동시에 리제아나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순간적인 그녀의 행동에 델리사가 한발 물러섰다.

“리제아나?”

리제아나는 델리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 당겨 그녀는 일어설 수 없었다.

내려다보니 굵은 줄이 그녀의 발목에 묶여 있었다. 그녀의 발목에 묶은 줄은 거대한 나무 기둥에 이어져 있었다.

“미쳤군, 당신?”

다시 몸을 일으켰으나 넘어지고 말았다. 리제아나는 델리사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사사건건 폐하의 앞을 알짱거려 내 심기를 건드는 건데?”

뜻밖의 상황에 황당해하고 있던 델리사는 재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쓰러진 리제아나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하.”

리제아나는 그녀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말은 똑바로 하지 영애. 라이핀은 이 나라의 황제고 나는 적어도 이 제국의 황태자비였어. 처음부터 너의 것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닥쳐.”

“윽.”

델리사는 리제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넘어진 그녀의 등 위에 서서 뾰족한 구두로 그녀의 등을 세게 짓눌렀다.

리제아나는 날카로운 구두 굽에 윽 신음을 흘렸다.

“너와 쓸모없는 대화는 여기까지야.”

“듣고 싶지도 않아.”

리제아나는 그 힘에 짓눌리면서도 꿋꿋이 의견을 표했다.

이러한 행동은 델리사를 자극하기 충분했고 델리사의 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거슬리는 그런 존재라고 넌.”

“…하, 피차일반이야.”

멈추지 않는 말대꾸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리제아나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네르아의 말이 떠올랐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하게 맞이하는 것이 가장 처참한 죽음이라고 했다.

모두에게 잊힌 채로 쓸쓸히 죽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끔찍한 형벌일 거라고.

그래서 그들은 선택했다.

가장 처참한 죽음을 리제아나에게 안겨주기로 말이다.

“듣고 싶지 않다라.”

델리사는 리제아나의 등에 올리고 있던 발을 떼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 상처투성이인 리제아나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네가 어떻게 죽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게 무슨.”

“넌 여기서 죽을거야, 리제아나.”

델리사의 말에 처음으로 리제아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했던 리제아나는 그 막막한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에 홀로 어디인지도 모른 채로 영원이라는 시간 동안 있는 것.

지금은 그녀를 구해줄 이안도 없었다.

“리제아나, 너는 이곳에서 홀로 추위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메말라 죽어갈 거야.”

“….”

“겨울은 생명이 얼어붙는 계절이잖아. 그렇지?”

델리사는 리제아나의 대답을 바랐지만 당연하게도 리제아나가 답을 할 리가 없었다.

조여오는 고통에 정신이 아늑해져 점차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니까 너 하나 더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있어봤자 쓸모없는 사람은 사라지는 게 맞지.”

그 말이 끝나자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리제아나의 몸에 힘이 풀리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네르아도 오고 싶어 했지만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이 새어 나갈 일이 없으니까.”

델리사는 리제아나의 턱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리제아나의 고개가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굶어도 한 14일 정도는 살 수 있다고 했나? 그러니 그 전에 네르아를 만날 순 있겠지. 너무 서운해하지 마.”

“당…신….”

리제아나는 델리사의 말에 대꾸할 힘도 없었다. 발버둥 칠수록 옭아매는 기분 나쁜 두려움이 리제아나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곧 델리사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묻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할 말이 많은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데….’

리제아나의 머릿속에는 델리사가 날리고 싶었던 일침들이 한가득 있었지만 입과 몸은 주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리제아나.”

델리사가 떠나기 전 잠깐 발걸음을 멈추어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이게 마지막일 것 같은데 마지막 인사라도 할까?”

리제아나는 반응조차 하지 않았지만 델리사는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펼치며 빙그레 웃었다.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황태자비 전하, 그동안 감사했답니다.”

허리도 굽히지 않은 채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제국의 인사법을 한 후 델리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

리제아나는 끝까지 델리사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밧줄을 끊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러기엔 몸이 너무 지쳐있었다.

지금 눈을 감으면 언제 다시 뜰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망할….’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얇은 드레스를 입은 몸이 추위에 얼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애당초 묶여 있어 멋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네르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묶인 채 눈앞의 창문 너머를 종일 바라볼 뿐이었다.

기댈 곳이 없었다.

텐젤에 가서도 홀로 이안의 도움 없어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에 이안의 도움을 받고 마는 그녀였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모습의 잔상이 여전히 그녀를 옥죄이고 있는 듯했다.

“이번에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메마른 입술을 애써 움직여 쓸쓸함을 내뱉어보았다.

패기롭게 델리사와 네르아 앞에서 죽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막상 닥쳐오니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이렇게 쉽게 그들의 뜻대로 흘러서는 안 됐다.

“아직 필로렌치아 공작의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도…. 라이핀이 내게 용서를 구하는 말도 듣지도 못했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에게 진심을 전하지도 못했다고….”

목이 탔다. 입안이 말라 침을 삼키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이안과 함께 새벽 수련을 하며 키웠던 힘들은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힘이 없었다. 완벽히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 사실만이 리제아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 후로부터 또 몇 번의 밤낮이 지나가고 그동안 리제아나는 하늘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 죽을지도 몰랐다. 몸에 이미 힘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강한 정신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 의지마저 실오라기처럼 얇아졌다.

하늘은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었고 창문 너머로는 잎이 떨어져 앙상한 거대한 나무만이 그녀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무서워….’

그동안 밉보이지 않기 위해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녀의 처지와 달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억지로 버텨왔던 눈을 감으려는 찰나, 문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네르아인가? 하필 내 마지막 모습을…. 그녀가 보는 건가….’

기왕 죽을 거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이안의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깐의 시간 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삐거덕.

오래된 오두막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희미해져 가는 시야 사이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알아본 리제아나는 이내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왜…. 왜 이 사람이….’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으나 그런 그녀를 끔찍하게 배신했던 라이핀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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